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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준호 Feb 15. 2019

미켈란젤로 광장에서 르네상스를 품다

브루넬레스키와 기욤 뒤파이

로마를 떠나 꽃의 도시 피렌체에 도착했다.


아침에 로마를 떠나 점심이 되기 전에 피렌체에 도착했다. 한주 동안 머물 터이나 마음은 급하다. 시내 요소요소를 지나 미켈란젤로 광장(Piazzale Michelangelo)에서 피렌체를 한눈에 내려다본다. 로마가 고대로부터 세계의 수도라면, 피렌체는 르네상스의 심장이다. 단테, 다 빈치, 마키아벨리, 미켈란젤로, 예술과 사상으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위인이 모두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그 밑거름을 일군 것이 메디치 가문이라는 사실은 요즘 한국에서 “인문학에 관심 좀 있다” 하는 사람은 모두 안다.


석양이 물들어가는 아르노 강과 베키오 다리, 두오모를 보면서 찬찬히 여기까지 온 내력을 되살핀다.

내가 처음으로 구입한 르네상스 음반은 기욤 뒤파이라는 사람의 미사집이다. 미국의 포메리움이라는 앙상블이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미사>를 노래했다. 한글로 번역된 내지 해설에는 생전 처음 듣는 이름이 가득했고, 그 내용은 극도의 몰입을 요구했다.


태어나 처음 만나는 뒤파이라는 작곡가가 태어난 해는 1397년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조선이 건국한 직후이며 세종대왕과 동갑이다. 1474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대 최고의 작곡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활동했단다. 또 1450년(세종 타계)에 쓴 미사가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대성당에 봉헌된 도나텔로의 조각을 위해 쓴 것이라고 한다. 마치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을 위해 1436년에 쓴 <이제 막 장미 피었네Nuper rosarum flores>를 통해 그 성당을 지은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1377-1446)와 사귀게 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것이다. 무슨 이야기인지 살펴보자.

피렌체의 상징과 같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이 시작이다. 간단히 두오모(Duomo)라고 부르기도 한다. 돔이라는 뜻이므로  주교좌가 있는 다른 도시에도 두오모는 있게 마련이다. 두 사람의 석상이 성당을 바라보고 있다.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가 성당을 설계한 지 140년 만인 1436년에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덮어 완성했다. 그래서 캄비오의 석상은 정면을, 브루넬레스키의 석상은 지붕을 쳐다보고 있다. 앞서 1401년 브루넬레스키는 메디치 가문의 산 조반니 세례당에 쓸 청동문 설계 공모에서 탈락한다. 당선자인 로렌초 기베르티가 <천국의 문>이라 부르게 될 작품을 만드는 동안 브루넬레스키는 로마로 간다. 그곳에서 두오모보다 훨씬 큰 판테온의 돔형 지붕을 보고 영감을 얻은 그는 피렌체로 돌아와 설계상의 난제로 미완성인 채였던 두오모의 돔을 덮었다.  마침내 피렌체의 상징인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완공되었을까? 아니다. 모든 건축물은 그 안을 채울 소리가 있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다. 앞서 말한 뒤파이의 성가 <이제 막 장미 피었네>가 그것이었다.

이것은 힐리아드 앙상블의 음반이다
이것이 내가 산 음반이다

음반 해설은 계속된다.

“뒤파이 음악은 같은 시대 얀 반 에이크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특질 몇 가지가 보이는데, 선이 뚜렷하고 세부처리가 정교하며, 색이 풍부하고 영식이 완벽하게 자연스러운 점이 그것이다. (중략) 여러 권문세가의 사람들이 그의 음악을 칭송하기에 바빴다. 대표적으로 메디치 가문의 피에로를 들 수 있는데, 그는 1467년 뒤파이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장식품’이라고 했다. 피에로의 눈에는 뒤파이가 알베르티나 기베르티, 심지어 브루넬레스키나 도나텔로보다 위대하게 보였음에 틀림없다.”

돔을 얹은 사람보다 그 안에 위의 음악을 울려 퍼지게 한 사람이 더 위대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의 음악이 꼭 같은 시대 얀 반 에이크(1390-1441)의 회화와 같은 느낌이라는 것이다. 바로 위 유튜브에 보이는 붉은 모자를 쓴 사람이 반 아이크의 대표작(자화상이다)이나, 그보다 더 유명한 것은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이다.

훨씬 크게 보여드려야 하는데.. 여기도 강아지가..

세밀한 선으로 그린 부부의 침실 가운데 압권은 뒷벽은 붙은 거울이다. 부부가 두 사람의 손님을 맞고 있음을 알게 하는 거울 둘레에 그리스도의 수난 장면이 아로새겨 있다.

뒤파이의 성가를 다시 들어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이 음반에 실린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미사>를 듣기 위해 파도바를 미리 가보자. 베네치아로 가는 입구의 고도(古都)에 안토니우스 성인을 기리는 성당이 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1195-1231)는 포르투갈 리스본의 부유한 집안에서 페르디난도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수도원에 가서 공부하던 그는 어느 날 무슬림들에게 설교하기 위해 모로코로 떠나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들을 만나 큰 감화를 받는다. 얼마 뒤 그들이 모로코에서 순교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는 자신도 그 뒤를 따르기 위해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귀의한다. 이때부터 존경하던 이집트의 성 안토니우스의 이름을 따른다. 임무를 부여받고 모로코로 떠나던 그는 풍랑을 만나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어렵사리 이탈리아에 닿는다. 그러나 쇠약한 용모 때문에 아무 곳에서도 그를 받아주지 않고, 겨우 볼로냐 근처에 은둔한다. 우연한 기회에 도미니크회 수사를 대신해 설교를 한 그는 많은 사람을 감복시키고 뒤이어 속세를 위해 복음을 전하게 된다.


파도바의 안토니우스가 설교하는 것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욕심을 버리고 유혹을 이겨냈다. 특히 그는 어린이를 좋아해서 뒤에도 아이를 안고 있는 모습의 그림이 많이 남았다. 그가 파도바에서 세상을 떠났을 때 거리의 많은 어린이들이 울음을 터뜨렸고, 교회 종들이 저절로 울리기 시작했으며, 천사들이 내려와 종을 울렸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바실리카

구스타프 말러는 1890년을 전후해 독일 낭만주의 시인 브렌타노와 아르님이 엮은 민요 시집 『어린이의 요술피리Des Knaben Wunderhorn』에 곡을 붙였다. 그 가운데 <물고기에게 설교하는 파도바의 안토니우스Des Antonius von Padua Fischpredigt>는 같은 시기에 쓰던 교향곡 2번의 3악장과 멜로디가 같다. 노래 가사는 설교에 능했던 성인의 면모와 그가 교화하고자 했던 사람들의 세태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안토니우스는 설교하기 위해 교회에 갔는데, 사람들이 없이 텅 비어 있었다. 그는 강으로 나가 물고기들에게 설교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꼬리를 찰싹거리고 햇빛에 비늘이 반짝거렸다. 알을 품은 잉어는 더 잘 듣기 위해 입을 벌렸다. 그의 설교는 그 어떤 것보다 물고기들을 기쁘게 했다. 언제나 싸움질하는 꼬치고기들도 그의 얘기를 듣기 위해 모여들었다. 대구도 뱀장어도 철갑상어도 귀를 기울였다. 평소에는 게으르던 게와 거북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크나 작으나 미물이거나 영물이거나 말씀에 감복했다. 그러나 강론이 끝나고 뒤돌아서면 모두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꼬치고기는 다시 강도가, 뱀장어는 도로 호색한이 되었다. 게는 여전히 삐딱하게 걸었고, 대구는 아둔했다. 잉어는 게걸스레 먹었다. 모두가 마치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기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아르놀트 뵈클린의 설교하는 안토니우스 그림을 표지로 쓴 앨범

파도바의 성 안토니우스 성당 안에는 도나텔로가 만든 제단이 있었는데, 진품은 19세기 말에 해체되었고 오늘날의 제단은 19세기의 복제품이다. 위 음반의 표지에 사용된 희미한 조각상이 바로 도나텔로가 만든 파도바의 안토니우스 성인상이다. 아기 예수를 안은 마리아가 안토니우스를 포함한 여섯 성인과 나란히 서 있는 도나텔로의 제단을 볼 수 없어 아쉽다면, 뒤파이가 그곳에 바친 미사를 듣는 것으로 위로 삼을 일이다.

일본에서 발매된 뒤파이 앨범. 디자인이 다르다

이것이 돌이켜본 나의 첫 르네상스 체험이었다. 해가 진 미켈란젤로 광장을 내려와 베키오 다리를 건너 호텔로 돌아간다. 다리 위엔 여전히 벤베누토 첼리니의 흉상이 서 있다. 벤베누토는 이탈리아 말로 ‘환영합니다’이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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