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시련 없이 인간은 인간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영화의 원작은 아이작 아시모프가 집필한 소설 <이백살을 맞은 사나이>로 가정부 로봇이 감정을 배우고 주인으로부터 독립하여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다.
리처드는 어느 날 가정부 로봇 앤드류를 구매한다.
그러나 리처드는 앤드류의 조각 실력을 보고 그의 잠재력을 확인하고 앤드류에게 인간과 사회, 감정에 대한 것을 가르친다. 시간이 흐르며 앤드류는 자신의 정체성을 점점 인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오랜 세월이 흘러 리처드를 시작으로 그를 처음 데려온 가족 구성원이 하나 둘 사망하며 앤드류는 절망감을 느낀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왜 내가 아끼던 사람들은 모두 죽어야 하는 것일까. 앤드류의 몸은 개조를 거치며 마침내 인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수준으로까지 진화했지만, 진정한 인간으로 인정받기 위해 스스로 반영구적인 수명을 포기하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육체를 얻는다. 그리고 앤드류는 그가 공식적으로 인간으로 인정받기 직전 사랑하는 연인의 손을 잡으며 생을 마감한다.
이 영화는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는 물론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가, 영원함을 포기할 정도로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치 있는 것인가 등 우리에게 많은 질문을 던져준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아쉬웠던 점은 이런 질문들이 아닌 영화 자체가 가진 문제, 즉, 문제나 갈등 상황의 해결을 오로지 기술 발전에만 의존한다는 점이었다.
영화 속에서 흐르는 세월이 약 200년에 달할 정도로 길긴 하지만, 인간이 되기에 부족한 점을 하나씩 채워나가는 걸 오로지 발전한 기술에만 의존하는 건 아쉬움으로 남는다. 심지어 그 기술을 습득하는데 어떤 고난이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앤드류는 영화 중반부부터 이미 한 기업의 대표보다 월등히 높은 수익을 올리고 있었고 그 수익과 협력자의 도움을 바탕으로 아주 쉽게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한다.
물론 이는 인간은 영원하지 않고 그저 잠시 짧은 세월을 살다 간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한다.
기술을 통해 인간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채워갔지만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한 앤드류는 죽음을 맞이할 수 있는 몸으로 자신을 개조하고 나서야 비로소 인간으로 인정받는다.
하지만 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도록 개조하는 과정 역시 너무나 쉽게 전개되어 버리는 바람에 긴장감 없이 무난하게 영화가 끝나버린 게 아쉬울 따름이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건 무엇일까. 영원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아니다. 그것이 핵심적인 요소라면 우리가 키우는 강아지나 고양이, 심지어 파리나 하루살이 마저 인간으로 정의할 수 있다. 중요한 건 죽음이 아닌 흔적이다.
인간은 짧은 세월을 살아가며 여러 가지 크고 작은 일을 겪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만나고 이별하며 업적을 달성하기도, 반대로 잃어버리기도 한다. 불확실한 인생의 소용돌이를 마주하고 세월이 흘러 사라지는 것. 그것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핵심적인 요소다. 그러나 이 영화는 아쉽게도 그 점을 자세히 그려내지 못했다. 좀 더 앤드류가 원하는 걸 성취하는데 고난과 시련이 있었으면 이 영화가 전달하고자 하는 점이 더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고난과 역경은 그것이 존재함으로 인해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지 그것을 극복한다고 그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건 아니다. 바이센테니얼 맨은 충분히 좋은 영화지만, 인간이라면 응당 겪어야 하는 고난과 역경을 지나치게 축소하여 보여주는 바람에 나는 결말에서도 앤드류가 완전한 인간이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진정 인간다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충분한 고난과 역경을 보여줘야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