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진 거울 조각도 빛을 내기에
거울 조각에 비치는 것들.
나는 내러티브가 명확한 영화를 선호한다. 상징적 연출이 과도한 영화보다 직관적인 영화가 좋다.
입맛으로 치자면 초딩입맛, 혹은 중딩입맛이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 영화를 본 이유? 최근 영화 이미지 이론에 관한 공부를 하던 중 몽타주에 대한 이해가 더 필요하다 느꼈기 때문이다.
영화 좀 봤다 하는 사람들은 잘 알겠지만 타르코프스키는 몽타주의 대가다.
타르코프스키 영화는 난해하기로 유명한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지. 이 글을 쓰기 전 내가 해석한 내용이 대중들의 생각과 얼마나 비슷한지 확인하기 위해 왓챠피디아 스크롤을 살짝 내렸음을 미리 고백한다. 그만큼 이해하기 힘든 영화였다.
나는 뭐랄까...짜치는 것을 싫어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을 감상할 때 좀 그랬다.) 유전자 레벨에서 거부 반응을 일으킨다. 영화에 평점을 줄 때 난 이 느낌에 의존해 평점을 준다. 감독이 유명한가 아닌가는 관계없다.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대표적으로 내가 평점을 짜게 준 유명한 영화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짜치는 느낌은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수려한 카메라 워킹과 미장센에 감탄하며 푹 빠져 들었다.
이 영화는 줄거리를 요약하기 힘들다. 영화를 몇 번 더 돌려보면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힐 것 같긴 하지만 난 영화를 볼 때 체력을 소모하기에 이 영화를 더 돌려보는 건 상당히 힘든 일이다. 그래서 줄거리에 대해선 딱히 말할 수 없다. (앞서 말했지만 이 영화는 내러티브가 명확하지 않다.) 영화는 흑백과 컬러, 물과 불, 도시와 시골,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파편적인 이야기 만을 전달한다. 그리고 중간중간 타르코프스키의 아버지가 목소리로 시를 낭송한다. 이 영화의 제목은 거울이다.
거울은 무언갈 비추는 성질을 띄고 있다. 그런데 만약 거울이 깨졌다면? 거울이 깨져 두 동강이 난다면 각각의 거울 조각은 다른 형태를 비춘다. 거울 조각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비추는 것도 많아진다. 나는 이 영화가 마치 산산이 부서진 거울 조각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주 잘게 으스러진 거울 조각들이 사방으로 퍼져 우리 인생을 비추고 있다.
거울은 깨지지 않을 땐 사용자의 의지가 반영된다. 사용자가 비추고 싶은 걸 비춰준다. 하지만 거울이 깨져버린다면, 더 나아가 산산조각 나서 흩어진다면 그 조각엔 의지가 반영되지 않는다. 단지 들어오는 빛을 반사시킬 뿐, 아무런 목적이 없다. 이 영화는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 러시아인들의 모습을 직간접적으로 비춰준다. 그저 그들의 인생을 비춰 줄 뿐이다. 그리고 인생은 영화와 달라서 극적이거나 드라마틱하지 않고 공허하며 때로는 허무하기까지 하다.
이 영화 역시 마찬가지다. 극적인 느낌이 없고 공허하고 허무함만을 남긴다. 화면에 등장하지 않는 시인은 끝없이 인간의 의지를 찬미하고 책 속의 푸시킨은 러시아의 위대함을 설파하지만 이 영화는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다. 마치 예술과 실제 삶이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영화의 제목이 거울인 이유는 단순히 비추기만 하기 때문이다. 그 거울은 산산조각 나 있다. 그리고 그 거울 조각 속에 비친 우리 모습은 특별하지 않고 공허하다. 이따금 평소와 다른 일이 벌어지긴 하지만 전혀 극적이지 않다. 이런 면에서 어찌 보면 이 영화야 말로 리얼리즘의 끝을 달리는 영화라고 볼 수도 있겠다.
삶은 특별하지 않고 어찌 보면 허무하기까지 하나, 원래 그것이 인생이다. 본래 모습일 때도, 산산조각이 나도 거울은 거울인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