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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송수영 Jan 12. 2024

총체적인 사랑

<이터널 선샤인(Eternal Sunshine)> 톺아보기

1. 사랑은 한 사람의 견고한 세계에 균열을 일으키는 일이자 동시에 그 안에 새로운 세계를 형성하는 일이다. <이터널 선샤인>은 조엘이 클레멘타인을 만난 후로 자기답지 않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자기답지 않음이 서서히 조엘다움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을 보여준다.


2-1. 기억의 세계 안에 현재 자신의 의식을 가지고 들어가며 동시에 외부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화의 설정은 사랑의 속성을 나타내는 데에 적합하다. 조엘이 잊혀가는 기억과 싸우듯이 사랑은 거스를 수 없는 것과 싸우는 일이며 '으레 그렇듯이'의 세계를 넘어서는 일이다.


2-2. 조엘의 기억 안에서 클레멘타인은 조엘의 사유를 넘어서는 아이디어들을 제안한다. 사람들은 때때로 꿈을 꾸면서 사유 가능한 영역을 넘어서는 일을 보곤 하는데, 이 무의식이 얼마나 신비로운지 또 얼마나 놀라운지 자주 생각했다. 이 현상은 무의식의 언어로 표현하면 신비이지만 사랑의 언어로 표현하면 힘이다. 곧 사랑은 현실 세계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적이자 신비라고 볼 수 있다.


3.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자기만의 장소인 찰스강으로 데리고 간다. 조엘은 꽁꽁 언 강 위에 누워 "죽어도 좋다"라고 말한다. 이 장면이 인상 깊은 건 둘이 사랑하는 시점에서 나오지 않고 조엘이 과거를 회상하는 시점에서 등장한다는 것이다. 미셸 공드리 감독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엑스의 것이라고 해도 그건 내가 죽을 만큼 좋아했던 순간이라고 말이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했던 과거를 다른 이와의 것이라고 해서 불행하게 재구성할 이유는 없다. 더욱이 내가 사랑하는 이의 형성사는 사랑의 깊이를 갖기 위한 필요충분조건이 아닌가. 엑스는 부정되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애인의 현재에 보탬이 된 고마운 존재다.


4. 하워드 박사는 기억의 완전한 소거를 위해서 기억의 매개물들을 가져오라고 한다. 이것은 완벽한 기억 소거를 위해 혹시 모를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이다. 패트릭은 클레멘타인의 사랑을 얻고자 조엘의 말과 선물을 그녀에게 준다. 그러나 패트릭의 의도와는 달리 오히려 이 일은 클레멘타인을 자신이 아닌 조엘과 엮는 계기가 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을 기억해서 그에게 다시 가는 것이 아니다. 클레멘타인의 몸이 조엘에게 반응해서, 몸이 그를 기억해서 다시 가는 것이다. 우리 몸은 소중한 기억들이 잊히지 않도록 머릿속의 작은 공간 외에도 그 역할을 의탁하고 있다.


5. 흠결 없는 처녀 사제는 얼마나 행복한가 / 세상은 그녀를 잊고 그녀는 세상을 잊어가네 // 티끌 없는 마음의 영원한 햇살(eternal sunshine of spotless mind)이여 / 기도는 허락되지만 소망은 내려놓는구나. 알렉산더 포프의 이 시는 이 위대한 영화가 세상에 나온 계기다. 대마초에 취한 여성의 입에서 나온 이 시를 통해 미셸 공드리 감독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걸까? 누구나 자신의 흠결을 지우고 싶어 하지만 오히려 그 티끌 안에 영원한 사랑이 비친다는 것일까?


6. 기억 소거의 마지막 단계는 때때로 사람들이 마지막 하루의 일과를 묻는 그 뻔한 질문을 떠올리게 한다. 세상의 마지막 날, 즉 사랑의 마지막 날에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그 순간을 그저 음미하기로 결정한다. 가장 가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그 순간에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그들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지금을 가장 가치 있는 순간으로 만든다.


7. 메리의 폭로로 지웠던 자신들의 과거를 듣는 클레멘타인과 조엘은 혼란스러워하며 다시 만날지 고민한다. 클레멘타인은 조엘에게 자신들이 헤어지게 된 본질적인 문제를 꺼낸다. "넌 나를 거슬려할 테고 난 너를 지루해할 거야." 조엘은 한 마디로 답변하며 문제의 근원을 해결한다. "오케이." 이내 클레멘타인도 "오케이"로 화답한다. 모르긴 몰라도 그 둘의 미래는 밝을 것이다. 그들은 사랑을 이상적인 것으로 이해하지 않고 지지부진한 일상의 것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닐까? 고집부리고 잘못하고. 그래서 싸우는 것. 그래서 토라진 채 늦은 사과를 건네는 것. 그렇게 온전히 부족한 자신으로 상대를 만나는 것. 그럴 때에야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용납이 아니라 진정한 만큼 토 나오게 어려운 용납이 그 사랑 안에 가득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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