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경계, 켄 윌버
옛날 배우 문숙씨는 고등학생 시절부터 TV 드라마에 출연했다. 나이 스무 살이 되던 해(1974년) 영화 ‘태양을 닮은 소녀’ 오디션을 보면서 당대 유명한 영화 감독이었던 이만희 씨와 처음 만났다. 그녀는 나이가 23살이 더 많고 이혼 경력도 있던 이 감독을 처음 만난 자리에서 사랑에 빠졌다고 한다. 훗날 이 감독과의 첫 만남을 “가슴이 두근두근 막 떨리고 숨을 쉴 수 없을 정도였다” 라고 회고했다. 1970년대 우리나라에서 영화 감독이라는 직업은 지금처럼 휘황찬란한 것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감독은 하루 촬영이 끝나면 남자 배우와 스텝들과 모여앉아 막걸리 말술을 마셨다. 빈털터리였던 이만희 감독은 집도 없어, 서울 충무로의 삼류여관에서 문숙과 동거 생활을 했다. 하지만 어려운 생활이 사랑에 지장은 되지 않았는지, 교외의 백양나무 숲으로 가서 둘 만의 결혼식을 올리기도 했다.
이만희 감독은 75년 봄 ‘삼포 가는 길’ 영화를 편집하던 중 병원으로 실려간다. 간경화 말기였다. 고통에 참을 수 없던 이 감독은 지인들에게 ‘피주사’ 라고 불리던 알부민 주사를 놓아달라고 애원했다. 알부민 주사는 당시 미8군에서만 구할 수 있었고, 주사 후 2시간 정도만 상태가 회복됐다. 주사가 반복될수록 효과는 급격히 떨어졌다. 결국 그는 고통과 이어진 혼수 속에서 죽었다. 두 남녀가 처음 만난 지 1년 만이었다. 벅찬 사랑의 감정만 경험하고 연인을 보냈기에 그리움은 참을 수 없는 것이 되고 말았다. 문숙씨가 당시를 회고하면서 한 말이다.
당시 나는 스물한 살이었다. 그런데 목숨을 거는 사랑을 했다. 삶이 끝난 줄 알았다. 낯선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 삶의 흔적, 고통의 흔적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문숙씨는 백상예술상(74년)과 대종상 신인상(75년)을 수상했고, 당시 영화계의 떠오르는 신인 배우였다. 계속 우리나라에 남았더라면 지금은 존경받는 중견 배우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과 실연은 그 모든 것을 의미 없도록 만들었다. 그녀는 미국으로 떠난다.
미국으로 간 그녀는 이런저런 종교의 문을 두드려 보면서 구도(求道)의 길을 걷는다. 기독교 교회의 가르침도 들어보았고, 남방 불교의 위파사나 수행도 5년이나 했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찾은 느낌은 얻지 못했다. 그녀는 “몸이 기도가 된다” 는 인도 요가를 접하고 처음 초월의 체험을 했다고 한다.
미국 산타페에서 요가 선생을 만났다. 그는 내 몸이 기도문이 된다. 내가 영적 에너지(Spiritual energy)에 대한 통로가 된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 걸 체험했다. 그렇다고 다른 종교나 다른 방식을 부정하지 않는다. 단지 이 방식이 나와 맞았다. … 힌두에는 여러 신이 있다. 요가의 신은 시바다. 시바는 버리는 신, 파괴의 신이다. 기독교의 회개, 불교의 참회처럼 요가는 철저하게 나를 버리는 과정이다. 육체적인 움직임을 통해 나를 버리는 작업이다.
우리나라에서 요가는 주로 다이어트 수단으로 보급되어 있지만 그녀는 전통적인 요가의 기본 사상을 설명하고 있다. 정신과 이어져 있는 몸을 움직임으로서 영적 에너지를 조절하는 것이다. 이런 요가 수행을 통해 머리에 끊임없이 맴도는 쓸모 없는 생각(거짓된 자아)을 버릴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다 버리고 비워진 인간 정신에는 원래 있던 것만이 남는다. 이에 대한 설명이다.
몸을 움직이다 텐션이 오는 지점에서 멈추라. 그 자세에서 길게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는 걸 반복한다. 그럼 잠시 후에 텐션이 풀린다. 몸은 더 움직여진다. 그리고 그 다음 텐션을 만나게 된다. 그렇게 수많은 텐션, 수많은 에고를 만나고 열어야 한다. 그래야 마지막에는 수퍼에고를 만나게 된다. 슈퍼에고를 만나면 빅 마인드(Big mind)가 된다. 마음이 어마어마하게 커진다. 의식 확장이 일어난다는 얘기다. 거기서 지혜도 나오고, 고요함도 나온다.
거대한 우주는 에너지 그 자체(Energy itself)이다. 인간이 생각을 다 버리면 그 우주와 만나게 된다. 그때는 인간 개체가 우주의 에너지와 하나가 된다. 그 에너지는 살아 있고, 의식이 있고, 지혜가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자아가 온 우주와 한데 섞인 것과 같은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 그로써 절대 떨쳐버릴 수 없을 것 같던 슬픔도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미국의 작가이자 사상가 켄 윌버는 자신의 저서 <무경계> 에서 이런 종류의 합일 정신을 잘 설명해놓았다. 그가 책에서 말한 구절이 문숙씨가 털어놓은 말과 너무나 흡사해서 놀랐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사라진 것 같은 합일 의식은 간절히 찾는 사람은 체험할 수 있는 것이란 뜻이다. 쉽게 생각해보면, 술만 많이 먹어도 자신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 필름이 끊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켄 윌버가 말하는 건 하룻밤 있다 사라지는 해리가 아닌, 전 세계가 나 같고, 내가 전 세계 같이 느껴지는 합일 정신, 빅마인드이다.
“나는 누구인가?” 라고 하는 물음에 대한 모든 답은 정확히 자기와 비자기 사이에 경계선을 긋는 기본적인 절차에서 비롯한다. 일단 전반적인 경계선이 그어지고 나면, 그 물음에 대한 답은 대단히 복잡한 것 – 과학적, 신학적, 경제적 – 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아주 단순하거나 모호한 채로 남아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가능한 모든 답은 처음 그은 경계선에 달려 있다.
이 경계선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그것이 흔히 변경될 수 있고 변경된다는 것이다. 경계선은 다시 그어질 수 있다. 어떤 점에선, 자신의 영혼soul의 지도를 다시 그릴 수 있고 결코 가능하다거나, 획득할 수 있다거나, 바람직한 것이라고 생각지도 못했던 것을 그 영역 속에서 발견할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경계선의 가장 혁명적인 제작 또는 변경은 지고의 정체성 체험에서 일어난다. 이 지점에서는 자기 정체성 경계가 전우주를 포함할 정도로 확장되기 때문이다. 경계선이 전부 없어진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와 동일시할 경우, 그곳에는 더 이상 어떠한 안도 밖도 없으며 따라서 경계선을 그을 곳이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자아를 설명하는 가장 유명한 명제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다. 하지만 켄 윌버는 생각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뿐이며, 실제로 ‘나’ 라는 존재의 경계는 원래부터 없었다고 말한다. 알쏭달쏭하지만 굉장한 통찰력을 담고 있고 있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