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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들국진 Jun 27. 2019

난 다음 주 내내 블라디에 있어요

블라디와 함께 일주일 1편 - 프롤로그

"나 휴가 받았어"


휴대폰에 도착한 친구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블라디 여행은 시작됐습니다. 시간 있고 돈 있는 이런 황금기가 우리 인생에 다시 있을까 싶어,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퇴사 후 여행에 대한 갈증은 없었지만, 괜히 훌쩍 떠나고 싶은 순간은 있었거든요. 친구는 퇴사와 존버 사이에서 '일단' 존버를 택한 상황이었고, 그 대가로 긴 휴가(17일)를 받았습니다. 


어디로 갈래? 시드니? 베이징? 두바이?
 내 맘속 1위는 블라디보스토크이고, 2위가 시드니야
그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


6월 블라디보스토크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날씨예요. 카디건이나 재킷을 꼭 걸쳐야 하는 날씨. 추위를 탄다면 경량 패딩을 하나 욱여넣어 다녀야 하는 그런 날씨.


한국이 더위로 푹푹 찌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러시아에 다녀왔어요. 무려 6박 7일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박 3일 또는 3박 4일이면 충분하다는 평이 많아요. 그런데 난 시간도 있고 돈도 있잖아요?(얄밉)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현지 음식도 가능한 많이 경험해보고,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좀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어요. 사실 하바롭스크도 고려했었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8시간 이상 타고 이동하며 고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블라디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답니다.


블라디보스토크 해양공원 전경(왼쪽), 해양공원 버스킹
운 좋게 볼 수 있었던 맑은 날 해양공원의 일몰. 정말 아름다웠어요.

"선배, 이번 주는 혹독하게 다이어트한다고 했죠? 이번 주 지나고 접선 한 번 합니까?"

"다음 주는 내내 블라디에 있어요"

"와, 어디 동유럽 소설 대사 같고 정말 멋있네"


여행은 항상 떠나기 직전이 가장 설레잖아요.


후배들과의 대화창에서 "다음 주는 내내 블라디에 있어요"라고 말하고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라고 감탄했던 게 떠올라요. 사실은 그냥 백수면서, 뭐 대단한 일을 하러 블라디에 가는 것 같잖아요. 여행이란, 어떤 의미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공항에서 시내로 이동하는 방법 중 하나가 공항철도를 이용하는 것. 하루에 5번 운행하고, 택시비의 1/4가격으로 블라디보스토크 역에 도착할 수 있어요.

퇴사 후 큰 고민 없이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저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제 친구는 여행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매일 밤 보드카, 와인, 맥주를 곁들이면서요.(술이 정말 싸더라고요. 특히 와인) 서로의 생각에 공감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기도 했지요. 


서로가 처한 상황, 이겨내야 할 환경, 각자가 그리는 미래, 이루고 싶은 꿈, 원하는 결혼의 형태 등.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이야기가 오갔어요. 공감과 동감, 그렇지 않은 생각엔 질문을 통해 내 친구의 좀 더 솔직한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좋았습니다.


먹을 줄 아는 이들의 꿀 조합. 마트에선 산 멜론과 살라미의 조합 최고. 새우 2kg 순삭(당분간 새우 금지령)
금각교(골든브릿지)의 낮과 밤

어떤 생각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러니,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아니'라고 말하기보단 먼저 질문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상대방이 하는 생각의 이유를.


블라디보스토크는 가장 가까운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많은 도시들 중 가장 유럽스럽지 않은 도시입니다. 첫인상은 이랬습니다.


여기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된 건가
묘하다, 이 도시


무채색의 건물들, 짓다 만 건물, 공사가 한창인 러시아 정교회 사원, 이런 분위기 속 갑자기 분위기 미국인 듯한 햄버거 가게, 안갯속에 모습을 반쯤 드러낸 금각교, 여기만 유럽인듯한 미술관, 무표정으로 날 응시하던 빨간 머리의 할머니. 유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건물 사이, 처음 마주한 안개에 싸인 금각교
공항철도를 타고 도착한 블라디보스토크 역. 우산이 없어도 당황하지 않고 비를 맞고 걷던 사람들.

이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동안 러시아로만 존재했던 이 도시가 자본주의 미소를 살짝 머금은, 세계와 공존하는 도시로 변하고 있거든요.

일주일 중 하루 반 맑고, 계속 비가 왔어요. 이런 흐린 날이 사실 블라디엔 더 잘 어울려요.

또 하나 러시아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냉담하고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가기 전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만난 러시아인들은 츤데레 그 자체였습니다. 루스키섬에서 곤경에 처한 낯선 우리를 아르바트 거리까지 태워준 커플, 9시 57분에 술을 사러 갔더니 함께 뛰어다니며 술을 사게 해 줬던 와인랩 직원(러시아는 10시가 넘으면 술을 구매하지 못해요), 화장실 못 찾을까 봐 끝까지 지켜보면서 손가락으로 무심히 방향을 알려줬던 백화점 경비원 등. 


'뭐야. 이 차갑고도 간질거리는 태도는. 겉차속따한 사람들이잖아!'


내 단골가게, 와인랩! 매일 밤 우리에게 최고의 술을 추천해준 당신, 못 잊을 거예요.


블라디와 함께 한 일주일. 음식과 문화, 미술관과 박물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속편으로 이어집니다.


기립박수가 쏟아져 나왔던 중국 발레단의 공연. @마린스키 극장
후기 없어 불안했지만 대만족이었던 루스키섬 반야 체험. 사우나하고 차가운 바다에 퐁당. 뜨차뜨차의 반복 속에 다시 태어난 내 피부.

인상 깊었던 발레 공연, 다시 하고 싶은 반야 체험, 해산물 덕후에겐 천국이었던 블라디의 음식들, 우리 역사의 흔적 등.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요. 앞으로 이어질 제 여행의 명장면을 재밌게 읽어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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