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와 함께 일주일 1편 - 프롤로그
"나 휴가 받았어"
휴대폰에 도착한 친구의 메시지를 시작으로, 블라디 여행은 시작됐습니다. 시간 있고 돈 있는 이런 황금기가 우리 인생에 다시 있을까 싶어,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퇴사 후 여행에 대한 갈증은 없었지만, 괜히 훌쩍 떠나고 싶은 순간은 있었거든요. 친구는 퇴사와 존버 사이에서 '일단' 존버를 택한 상황이었고, 그 대가로 긴 휴가(17일)를 받았습니다.
어디로 갈래? 시드니? 베이징? 두바이?
내 맘속 1위는 블라디보스토크이고, 2위가 시드니야
그럼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자
6월 블라디보스토크 날씨는 한국의 늦가을 날씨예요. 카디건이나 재킷을 꼭 걸쳐야 하는 날씨. 추위를 탄다면 경량 패딩을 하나 욱여넣어 다녀야 하는 그런 날씨.
한국이 더위로 푹푹 찌기 시작할 때 우리는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러시아에 다녀왔어요. 무려 6박 7일입니다. 블라디보스토크는 2박 3일 또는 3박 4일이면 충분하다는 평이 많아요. 그런데 난 시간도 있고 돈도 있잖아요?(얄밉)
한 도시에 오래 머물며 현지 음식도 가능한 많이 경험해보고, 그곳의 문화와 사람들을 좀 더 깊이 느껴보고 싶었어요. 사실 하바롭스크도 고려했었지만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8시간 이상 타고 이동하며 고생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블라디에서 일주일을 머물렀답니다.
"선배, 이번 주는 혹독하게 다이어트한다고 했죠? 이번 주 지나고 접선 한 번 합니까?"
"다음 주는 내내 블라디에 있어요"
"와, 어디 동유럽 소설 대사 같고 정말 멋있네"
여행은 항상 떠나기 직전이 가장 설레잖아요.
후배들과의 대화창에서 "다음 주는 내내 블라디에 있어요"라고 말하고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라고 감탄했던 게 떠올라요. 사실은 그냥 백수면서, 뭐 대단한 일을 하러 블라디에 가는 것 같잖아요. 여행이란, 어떤 의미로 나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건 아닐까, 생각했답니다.
퇴사 후 큰 고민 없이 하루를 충실히 살아가는 저와 끊임없는 경쟁 속에서 능력을 증명하고 있는 제 친구는 여행에서 참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매일 밤 보드카, 와인, 맥주를 곁들이면서요.(술이 정말 싸더라고요. 특히 와인) 서로의 생각에 공감했던 순간도 있었지만 생각의 차이를 확인하기도 했지요.
서로가 처한 상황, 이겨내야 할 환경, 각자가 그리는 미래, 이루고 싶은 꿈, 원하는 결혼의 형태 등. 다른 듯 같고, 같은 듯 다른 이야기가 오갔어요. 공감과 동감, 그렇지 않은 생각엔 질문을 통해 내 친구의 좀 더 솔직한 모습과 마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게 좋았습니다.
어떤 생각에도 이유가 있다는 걸 알았거든요. 그러니, 나와 생각이 다르다고 해서 '아니'라고 말하기보단 먼저 질문해야겠다 생각했어요. 상대방이 하는 생각의 이유를.
블라디보스토크는 가장 가까운 유럽이지만, 러시아의 많은 도시들 중 가장 유럽스럽지 않은 도시입니다. 첫인상은 이랬습니다.
여기 전쟁 끝난 지 얼마 안 된 건가
묘하다, 이 도시
무채색의 건물들, 짓다 만 건물, 공사가 한창인 러시아 정교회 사원, 이런 분위기 속 갑자기 분위기 미국인 듯한 햄버거 가게, 안갯속에 모습을 반쯤 드러낸 금각교, 여기만 유럽인듯한 미술관, 무표정으로 날 응시하던 빨간 머리의 할머니. 유럽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어요.
이 도시는 끊임없이 변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동안 러시아로만 존재했던 이 도시가 자본주의 미소를 살짝 머금은, 세계와 공존하는 도시로 변하고 있거든요.
또 하나 러시아인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데요. 냉담하고 불친절하다는 이야기를 가기 전에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만난 러시아인들은 츤데레 그 자체였습니다. 루스키섬에서 곤경에 처한 낯선 우리를 아르바트 거리까지 태워준 커플, 9시 57분에 술을 사러 갔더니 함께 뛰어다니며 술을 사게 해 줬던 와인랩 직원(러시아는 10시가 넘으면 술을 구매하지 못해요), 화장실 못 찾을까 봐 끝까지 지켜보면서 손가락으로 무심히 방향을 알려줬던 백화점 경비원 등.
'뭐야. 이 차갑고도 간질거리는 태도는. 겉차속따한 사람들이잖아!'
블라디와 함께 한 일주일. 음식과 문화, 미술관과 박물관, 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속편으로 이어집니다.
인상 깊었던 발레 공연, 다시 하고 싶은 반야 체험, 해산물 덕후에겐 천국이었던 블라디의 음식들, 우리 역사의 흔적 등. 풀어낼 이야기가 많아요. 앞으로 이어질 제 여행의 명장면을 재밌게 읽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