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11일 화요일
어제에 이어서 오늘은 처형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한 날이다. 우리가 걷는 올레길을 같이 경험하기 위해 체력적으로 똑같이 진행하기가 어려운 점을 감안하여 오늘은 바닷길 경치가 좋은 제주 올레 10코스에 해당하는 구간 중에서도 송악산 부근을 함께 걷기로 했다. 아침을 먹고 00이는 한수풀도서관에 데려다주고 송악산으로 이동했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 송악산을 따라 올레길을 걸었다. 새삼 아이들을 인솔해서 오던 수학여행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산방산과 용머리해변, 이곳 송악산은 수학여행 올 때마다 단골로 들르던 장소 중의 하나다.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스쳐가고 또 솟구쳐 오른다. 시간이란 참 빠르고 무상한 측면이 있다.
연세가 있으신 처형들이 더 걷는 것은 힘들 것 같아 송악산을 한 바퀴 도는 정도로 마무리하고 일행이 쉬고 있는 사이에 차를 가지러 가다가 어이없는 상황이 되어 웃고 말았다. 우리가 한 시간 정도 이상을 걸었다고 하는 송악산 주변 길이 잘록한 목에 해당되어 천천히 걸어서 한 시간 걸린 거리가 지름길로 뒤돌아 가로질러 가면 바로 주차장이 빤히 보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올레길은 이렇게 효율과 속도에 저항하며 부러 제주의 바닷길을 에둘러 가도록 설계되어 있다는 점을 새삼 생각하게 하는 순간이었다. 빨리 이동하기를 원한다면 가로질러 가라. 그러나 속속들이 알고 천천히 음미하며 걸을 수 있는 시간과 자세가 확보되어 있다면 천천히 가라. 올레길은 그렇게 무언의 교훈을 주는 것이었다.
주차장에서 차를 이동시켜 섯알오름 주차장에 도착하고 나머지 일행은 걸어서 섯알오름을 거쳐 합류하였다. 이곳은 어두운 역사의 현장으로 제주의 많은 학살 장소 중의 하나다. 국가의 공권력과 무력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한 곳이라는 점에서 제주의 아픔이 진하게 배어나는 곳이다. 이런 기억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특히 계엄이라는 비상한 상황을 정치적 타개책과 정적 제거의 방법으로 선택함으로써 헌정 질서의 안정성을 뒤흔들어 놓은 전직 대통령의 행위에 대해서 그런 맥락에서 올바로 평가해야 한다. 계엄은 제주 4.3과 같은 국가적 폭력조차도 정당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잠재적으로 주장할 수 있기에 함부로 꺼내들 수 없는 비상한 최후 수단이어야만 하고 그 칼날이 국민을 향한 것이 아니라 외부의 적을 향한 목적일 때 필요악의 차원에서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계엄을 쉽게 선포하는 나라치고 민주적 질서의 차원에서 후진국이 아닌 나라가 없다.
우리는 비록 생각이 다를지라도 제주와 광주 산청·함양·거창 등지에서 벌어진 국가적 폭력과 학살의 아픔을 잊지 말고 폭력을 극복하고 민주적 헌정질서의 틀 안에서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시민이 되어야 한다. 서부지법 난입에 따른 파괴적인 행위는 강력하게 처벌되어야 하는 공익적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때 국가는 아노미적 상태가 된다. 국민저항권이 어쩌고 하는 주장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에 대한 저항인가 하는 점이다. 불의한 국가 권력을 구제할 어떤 수단도 부재할 때 최후의 방법으로 거론될 것이지 민주적 질서의 회복을 방해하는 맥락에서 거론되는 폭력이나 선동은 그 자체로 사회를 혼란케 하는 행위들이다. 그런 방식을 선동하는 자들은 사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기에 강력하게 처벌되어야 한다.
걷기를 마치고 처형들이 소개하는 모슬포항 근처의 동현식당이라는 곳에 들러 점심식사를 했다. 회정식이 15,000원인데 여섯 사람이 세 사람씩 상을 받았는데 아주 푸짐하게 나온다. 우선 회가 나오고 맑은 지리 매운탕과 튀김 등이 인심 좋게 나온다. 한국인들은 뭔가 배가 빵빵하게 차도록 양껏 먹어야 대접을 잘 받았다고 좋은 인상을 받는 것이 일반적인 것으로 보인다. 여기 제주에 와서 긴장을 풀고 많이 먹다 보니 이러다가 체중이 폭발하는 것은 아닌지 은근히 걱정도 된다. 많이 걸으니 조금 위안이 되기는 하지만.
점심을 먹은 후에는 우리가 소개하는 빵과 커피 그리고 분위기라는 측면에서 압권인 ‘미쁜 제과’를 향했다. 모슬포에서 11k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이곳에서 멀지 않은 지점으로 올레길 11코스가 지나가기도 한다. 처형들은 이곳이 처음인 듯하여 소개를 하고 소금빵과 호두빵 커피 등을 시켜놓고 쉬면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처형들 모두 이곳의 분위기가 맘에 드는 모양이다. 이제 하는 말이지만 작년부터 올해까지 제주에서 이 미쁜 제과를 몇 번 갔는지 모를 정도다. 하여튼 툭하면 들렀으니 말이다. 새별이와 또 가고 집사람과 다시 몇 번 가고 그랬다. 제과점에서 나와서 바닷가에 차를 세워두고 걸어서 한참 가다가 바닷가에서 바다 구경도 하고 밭에서 작업하는 주민에게 브로콜리 가격에 대해서 묻기도 하는 등 처형들도 활발하게 제주에서의 시간을 즐기시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자주 오면서도 사실 제한된 곳만 보고 가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에 새로운 경험의 여지는 늘 존재하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