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5년 3월 25일 화요일
오늘 정00 선생을 마중해야 해서 올레길 걷기 일정을 온전히 진행하기가 어려워서 오전에는 서귀포에 있는 치유의 숲에 가보기로 했다. 제주는 사려니 숲길을 비롯해서 한경면에 있는 도립 곶자왈 등의 좋은 숲길이 많다. 치유의 숲도 역시 중산간 너머에 위치하고 시오름을 포함하고 있다. 일단 1인당 입장료가 1,000원으로 저렴하고 주차장 요금도 2,000원에서 할인받아 도합 3,000원을 냈다. 이렇게 저렴한 장소가 쉽지 않은 세상이지 않은가? 게다가 한라산의 웅숭깊은 산내음을 마음껏 들이켤 수 있는 곳이다.
치유의 숲 안에 들어가면 많은 길이 명명되어 있고 서로 다른 리본색으로 구별하여 안내하고 있으니 찬찬히 원하는 대로 거닐면 된다. 또 곳곳에 누워서 쉴 수 있는 침대형 의자가 있어 한잠 자도 좋을 것이다. 입구에서 올라가는 길가에 노루가 네댓 마리 눈에 띄어 사진에 담았다. 역시 수놈이 뿔이 난 것이겠지. 사람을 크게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이 참 좋다. 사람이란 존재가 사람은 물론이려니와 짐승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닐진대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해치지 않으리라는 믿음이 생겼다는 것이기에 좋은 일이다. 새들조차 먹이를 주는 사람에게 날아와 손바닥 위에 앉아 그 신뢰를 표현하질 않는가. 사람도 사람에게 그런 두려움을 주지 않을 수가 있다면 세상은 얼마나 평화로울까. 우리는 서로를 불신하고 경계하며 항상 두려워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사진에 찍힌 노루들은 일부러 포즈를 취하는 것처럼 눈이 카메라를 곁눈으로 보고 있는 듯하다. 시원스레 쭉 뻗어 올라간 삼나무들이 우거진 길을 걸어가노라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고 숨이 고르게 펴진다. 말 그대로 치유의 순간이 아닐까 한다. 이것이 바로 치유이리라. 사진에 잡힌 우리 마님은 얼굴이 그야말로 까맣게 타버렸다. 선크림을 바르고 모자를 쓰고 해도 투과하는 빛을 피하지를 못한 것인가 보다. 힐링센터를 지나 더 올라가니 시오름으로 올라가는 표지가 보여 계단을 타고 올라가 본다. 시오름에 오르니 저 뒤로 한라산 정상부가 희끗한 눈을 조금 보이며 시야에 들어온다. 제주가 곧 한라산이요 한라산이 곧 제주 자체가 아닐 수 없다. 하나의 리본을 택해서 그 색만 따라 내려가는 길을 택했다. 이리저리 이어지는 길들은 서로 교차하면서 만났다가 헤어지고 다른 길과 만나기도 한다. 산동백 줄기가 훤칠하니 크다. 우거진 나무들 속에서 성장하느라 동백나무가 이렇게 빛을 바라고 깡충하게 키를 키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그리고 동백꽃의 붉은 빛이 선명하게 빛나고 떨어진 꽃도 목련에 비해 천천히 시들어가는 느낌이다.
주차장에 내려와서 준비해 온 간식을 먹었다. 치유의 숲에서는 일체 간식을 먹을 수가 없도록 안내되어 있다. 그래서 주차장의 차 안에서 준비한 음식을 간단히 먹고 서귀포 올레시장에서 모듬회를 사고 매운탕거리를 받아서 숙소로 돌아와 준비를 해놓고 나 혼자 공항으로 정00 선생 마중을 나갔다. 정00 선생을 만나보니 몇 달 만에 보아도 여전한 느낌이다. 삼십여 년 전의 그 분위기가 변함없이 이어지는 그런 느낌이랄까. 사람이 참 일관된 분위기를 풍긴다. 그것이 그의 미덕이 아닐까 한다. 일단 형성된 사람의 자아는 살아가면서 쉽게 바뀌지 않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의 언행은 왜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는 것일까. 심지어 신념이라고 내세웠던 가치관의 영역조차 그렇게 쉽게 뒤바뀌는 모습을 보게 될까. 그것 조지훈의 ‘지조론’을 거론하거나 공자의 ‘일이관지’의 관점을 들먹거리지 않아도 아름다운 일은 아니리라 믿는다.
숙소로 오는 내내 정00 선생이 전경으로 근무했던 군시절 제주에 대한 회상과 감회를 들었다. 의외로 교직 생활을 그렇게 했으면서도 군 시절 이후 제주에 온 경험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다. 제주에 온 지 거의 20여 년이 되어 간다는 것을 듣고 제주가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얼마나 친숙한 관광지인지를 생각할 때 납득이 잘 되지 않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열심히 사느라고 돌아볼 틈이 없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나름 짐작해 본다. 정00 선생은 지나간 세월 동안 참 열심히 살았고 지금도 하동에서 개인택시를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는 것이니 말이다.
숙소에 들어오기 전에 협재 해변에 잠시 들를 생각이 있느냐고 하니 좋다고 해서 잠시 내려서 해변을 바라보다 숙소에 도착했다. 정00 선생은 안방에서 나와 함께 지내고 집사람은 딸내미와 같이 며칠 지내기로 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딸내미가 불편할 수 있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이런 기회가 많지는 않으니 그 불편함을 견뎌 주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