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는 즐거움

- 소한과 대한을 견디는 독서

by 차거운

내게 겨울은 산사의 스님들처럼 동안거의 기간이다. 어쩌면 지리산에 방사되어 살아가고 있는 반달곰이나 야산의 멧돼지를 비롯한 많은 동물들처럼 겨울잠을 자면서 최소한의 대사로 생존하며 따뜻한 봄을 기다리는 날들이라고 해도 무방하겠다. 자연의 계절적 흐름에 순응하면서 살아가는 삶이 거대한 도시의 복잡한 삶에서는 부정되고 있지만 여전히 인간의 몸에 새겨진 오랜 환경 적응의 생체적 본능은 그것이 옳다고 믿게 한다. 오븐에 구운 고구마를 먹다가 자연스럽게 어릴 적 할머니가 땅에 묻어둔 동치미 항아리에서 꺼내온 살얼음 낀 국물과 아삭한 동치미 무를 떠올리게 된다. 화로가 있는 방의 풍경. 밖에는 눈이 내리고 산자락에는 토끼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혀 있고 가끔 꿩들이 푸드덕거리며 날아가고 얼어붙은 개울 아래 아롱거리며 공기를 머금은 채 흘러가던 투명한 물의 일렁임. 코끝이 쨍한 찬 기운이 눈보라를 일으키며 텅 빈 밭과 논을 휘젓고 사라지는 그런 시간들이 있다.

2026년의 달력 첫 장이 벌써 후반으로 넘어가고 있다. 게으른 성품이라 만보계의 숫자가 100에서 200 사이에서 왔다 갔다 하는 날들이 많아진다. 여행을 가거나 둘레길, 올레길과 같은 의식적인 걷기를 하는 날들에는 하루 3만 보까지도 넘기기도 하였건만 이러다가 영 근육이 녹아내리는 건 아닌지 심히 저어 된다. 유일하게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격렬한(?) 숨쉬기 운동이다. 살기 위해서 이건 열심히 하고 있다. 그래도 책상 위에 읽어야 할 책이 몇 권이라도 쌓여 있으면 왠지 마음이 뿌듯하고 부자가 된 기분이다. 요즘은 책을 주로 빌려다가 읽는데 이런 점에서 유럽 여행에서 우리나라의 화장실에 대해 자부심을 가진 것처럼 집 근처의 도서관에 대해서 새록새록 고마움을 느끼고 있다. 서가 사이에 있으면 아름다운 이성을 본 듯이 마음이 뛰고 오월의 햇살 아래 모든 것을 가진 듯 풍요롭다는 이양하 선생의 <신록 예찬>의 그 심정처럼 <서가 예찬>이라도 읊조리고 싶은 심정이 된다. 이런 점에서 요즘 그동안 살면서 세금을 낸 보람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세상이 들끓어도 책상에 앉아 책을 펴 들고 앉아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가라앉는다. 전에 보았던 영화 <퍼펙트 데이즈>에서 히라야마가 살아가는 그 삶의 일상적 순환의 고요함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생계를 위한 노동을 비루하다 여기지 않고 최선을 다해 수행하면서 목욕을 하고 차 한 잔 때로 술 한 잔을 마시고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서 문고본 책을 뒹굴거리며 읽다가 잠이 드는 평범한 일상의 그 귀함에 대해서 생각하는 것이다. 예측 가능한 삶이야말로 인간에게 안정감을 주는 요소다. 재작년쯤에 이 영화를 보고 나서 영화의 내용에 잔잔한 공명을 느끼면서 퇴직 이후의 삶이 이렇게 흘러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드러내기도 하고 트럼프가 두 번째로 미국의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나와 같은 사람의 삶에 큰 영향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렇지만 현재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순진한 생각이었던 것 같다. 재작년 연말의 계엄 사태도 그렇고. 사람의 삶은 결코 고립된 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수 없음을 다시금 깨닫는 시간들이었다.

힘든 세상을 책 읽기에 의지하며 살아낸 옛사람들을 자주 생각한다. 인간의 앎이란 참으로 보잘것없는 것이다. 지식은 항상 우리의 기대를 배반한다. 삶은 프로테우스처럼 앎의 그물망을 빠져나간다. 그래서 항상 인간의 지식은 터무니없이 불완전한 그 무엇이 되고 만다. 그래도 우리는 그 제한된 지식에 의존하여 세상을 이해해 왔다. 지식이 인간의 무기라면 잘 부서질 수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 조심스럽게 다루되 희망을 갖고 겸손한 태도로 이용할 필요가 있다.

실비아 나사르가 쓴 <사람을 위한 경제학>을 읽으면서 경제학이라는 분과학문이 인간의 손에 주어진 쓸 만한 도구가 되어가는 과정을 흥미롭게 지켜볼 수 있었다. 원제가 <Grand pursuit : The story of economic genius>이니 번역된 우리말 제목과 그 강조된 어감이 살짝 다른 것 같기도 하다. 일종의 의역인 셈인데 나쁘지는 않다. 차이가 있다면 인본주의와 천재성에 대한 방점의 차이에 있다고나 할까. 과학사에서 천재적인 과학자의 활약을 그리는 것처럼 경제학의 천재적인 인물들에 대한 지적 무용담이라고 할 수 있겠다. 대영도서관 열람실에 앉아서 자료를 읽으면서 <자본론>을 쓰기 위해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그 특유의 외모를 상상해 본다. 망명자의 처지에서 가족들을 거느리고 엥겔스의 후원을 받으며 책들을 잘근잘근 염소처럼 씹어먹으며(?)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던 그를 생각한다.

아담 스미스의 <국부론>과 밀, 리카도와 같은 고전 경제학자들,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그려진 산업혁명기의 영국 노동자와 광부와 빈민의 삶을 생각해 본다. 알프레드 마셜과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맬서스의 <인구론>, 베아트리스 웨브와 시드니 웨브, 어빙 피셔, 슘페터, 하이에크, 케인즈, 프리드먼, 새뮤얼슨, 조앤 로빈슨, 아마르티아 센의 이름이 이 책에서 소개하는 경제학계의 천재적 인물들이다. 그들의 개인사와 학문적 성과와 사회적 영향력과 역사의 흐름이 겹쳐지면서 흥미진진한 하나의 서사적 흐름과 역동성이 만들어진다. 저자의 이야기 능력이 뛰어나다는 뜻이겠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생각하건대 이런 인물들의 학문적 삶이 전경화하고 인류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의 삶은 후경화한다는 것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이는 에릭 홉스봄의 장기 19세기 <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 <제국의 시대> 3부작과 단기 20세기에 대한 역사적 서술 <극단의 시대>를 읽으면서 느꼈던 것과 유사한 감정인데 서술의 체계와 논리의 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간 무수한 민초들의 실체들이 추상적인 지도와 통계적 수치와 학문적 공식 너머로 가려져 있기 때문이겠다. 어쩌면 우리의 독서는 우나무노의 <안개>와도 같이 작중 인물과 저자가 만나는 행위와 닮아 있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세상의 끝 날까지 이 이야기의 전체적인 맥락을 알지 못할 것이다. 오직 중간적인 흐름만을 불완전하게 알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학이 사회적 역동성을 이해하고자 하는 도구로서 아마르티아 센의 윤리적 차원의 경제학까지 포함하는 방향으로 계속 나아가기를 기대한다.

이성미 시집 <너무 오래 머물렀을 때>와 채호기의 시집 <레슬링 질 수밖에 없는>을 읽었다. 채호기 시인의 시집에서는 문자와 삶의 연관성에 대한 오랜 천착의 흐름을 느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기표와 기의 그리고 현실 사이에 경계가 어떤 이들에게는 불가의 화두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 같다. 이성미 시인의 시는 처음 읽는 것 같다. 더 많은 시인들을 만나고 싶다.

2024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을 읽었다. 수상작은 조경란의 <일러두기>다. 함께 실린 작품으로는 김기태의 <팍스 아토미카>, 박민정의 <전교생의 사랑>, 박솔뫼의 <투 오브 어스>, 성혜령의 <간병인>, 최미래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 등이다. 낯선 이름들이 많다는 것은 그동안 내가 읽기에 게으름을 부렸거나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었던 탓이겠다. 중년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도시의 한 모퉁이에서 가게를 꾸리며 생계를 유지하면서 동료적인 관계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의 단서를 만나게 되는데 그것이 자기 치유로서의 글쓰기이고 일러두기는 그 글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에 대한 장치라는 것을 생각하게 한다. 삶의 기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라고 본다.

김기태의 <팍스 아토미카>를 읽으면서 인류 멸망의 순간을 시계로 표상한 이미지가 이야기 전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개인적인 세심증과 불안은 울리히 벡의 <위험사회>는 물론이고 날이면 날마다 벌어지고 있는 맨해튼 프로젝트와 오펜하이머와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핵폭발 등을 총체적으로 혹은 간헐적으로 환기하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강박을 떠올리게 한다. 아마도 우리 모두 병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성복의 시구와는 달리 '아프기도 할 것이다.' 박민정의 전교생의 사랑은 일본 영화를 리메이크한 영화에 출연한 아역 배우들과 감독과 연예계와 관객 등의 관계 등을 건드리고 있는 작품으로 보인다. 생각할 그리고 논의할 거리를 줄 만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 기억에 남는다. 성혜령의 <간병인>은 부모와 간병인과 환자인 인 나 사이에서 오가는 감정의 흐름과 기억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람은 돈으로만 살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는 점도. 최미래의 <항아리를 머리에 쓴 여인>은 글쎄 <진주 목걸이를 한 소녀>라는 그림 혹은 영화를 떠올리게 되었을까 나도 모르겠다. 청년의 문제와 아이 돌봄 아르바이트의 문제와 고용의 문제를 생각하며 읽었다. 박솔뫼의 <투 오브 어스>는 움직임 연구회라는 모임을 매개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글쎄 조금 낯설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더 읽어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요즘 책을 복본으로 구입하는 일이 자주 생긴다. 집에 있거나 이미 읽었던 책이 기억회로를 자극해서인지 재차 구입하게 되는 일이 잦다. 조지프 스티글리츠의 <불평등의 대가>가 바로 그렇다. 물론 이번에는 빌린 것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정신이 자꾸 오락가락하는 것 같다. 누군가의 책 제목처럼 집중력을 도둑맞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벌써 1월이 거의 다 지나가고 있다. 요 며칠 바짝 춥다는 느낌이다. 겨울은 좀 추워야 하겠지만 고혈압 환자인 처지에서는 조심해야 한다. 시원한 동치미가 그립다. 슴슴하면서도 살얼음이 살짝 떠 있는 아삭한 무가 가득 씹히는 그 시원한 맛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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