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의 오타루

그리고 밤의 시하치 (2025년 10월 2일)

by 그래도 캠핑

사실 이번에 여행을 준비하면서 오타루 관광은 계획에 없었던 걸로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라는 표현이 정확한데, 사실 이번 여행 계획에 내 의견은 단 하나뿐이었다. '더운 데 빼고').


많은 이들에게 오타루라는 동네는 영화 <러브레터>의 주 촬영로케 장소로 먼저 알려져 있고, 또, 치즈케이크 전문점 '르타오 (Le TAO)'의 본점이 있는 곳으로, <미스터 초밥왕>의 모델로 알려진 '정초밥 (政寿司 마사즈시) '이 있는 곳으로 (사실 초밥왕 주인공 쇼타는 도쿄에 있는 '봉초밥 (오오토리 스시)'에서 일했습니다. 오타루에 있는 가족 식당 이름은 '토모에 스시'), '오르골당' 등 예쁘장한 여러 관광명소로, 그리고 오타루 운하의 야경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중 어떤 것도 확 떙기지 않았다. 사람들이 붐비는 곳을 싫어한 탓도 있지만, 치즈케이크도, 오르골도 취향에 안 맞아서 그랬던 게 더 크다. 그러다가 신치토세 공항에서 감격하면서 먹었던 가마에이 어묵의 본사가 오타루에 있다는 걸 들었다. 오오오오. 그 동네 괜찮을라나? 튀김냄새가 장난 아니겠는 걸.. 하면서 웃고 넘어가려고 했으나, 마침 요이치 증류소에서 돌아오는 길에 있었기에 겸사겸사 들러보기로 했다. 아주 가벼운 마음으로, 아무런 목표 없이 살살.





그런데 목적 없이 가다 보니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네.





사람들이 앞다퉈 들어가는 삼각시장은 가볍게 패스하고 일단 앞으로 직진.


그러나 유명 관광지답게 역에서부터 바다까지 내려오는 중앙대로 (中央通り 츄오도리)는 번잡하기 짝이 없었다. 머리가 좀 아파왔는데 숙취 때문인지, 요이치 양조장에서 시음 때문인지, 아니면 주변이 시끄러워서 그런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마침 한국과 중국의 가장 긴 연휴 중 하나인 추석 연휴와 겹쳐서 골목마다 사람들로 가득 차있었다. 그 와중에 눈에 들어온 상가 건물은, '부도칸'이라고 하는 건물 하나가 통째로 파친코인 곳과 접객 여성들의 사진이 대형 현수막으로 걸려 있는 유흥업소. 갑자기 에이스 여성이 만일 그만두게 되면 저 현수막은 못 쓰게 되는 건가..? 하는 쓸데없는 걱정이 들었다. 그 외에도 라면과 카이센동 (해산물 덮밥)과 멜론을 같이 팔고 있는 전형적인 관광지 식당들도 많이 보였다. 경주역에도 부여역에도 역 앞에는 유흥업소와 관광업소 등이 많을 테니, 역 앞 풍경만 보고 판단하는 건 무척 불공평한 일이겠지만... 그래도 괜히 왔다 싶었다.


맨 아래 바닷가까지 내려오니, 엥? 그 많았던 사람들이 언제부터인지 다 사라져 버렸다. 아... 그들은 본인들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던 게로군. 그리고 적어도 내가 지금 서있는 이곳은 아닌가 보군... 하면서 관광 기념품 상가 옆에서 잠시 머리를 식히다가, 일단 좀 달달한 걸 입에 넣어야겠다는 좌중의 의견에 따라 르타오 운하 플라자로 향했다. 치즈케이크를 먹으려는 생각은 조금도 없었지만 사실 오전 요이치 증류소에서도 제법 걸을 만큼 걸었기 때문에 오타루에 와서는 어떻게든 자리에 앉고 싶었던 것도 있었다 (아직 숙취도 남아있...).


친구들이 치즈케이크를 먹는 동안 멀뚱히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가 이상한 걸 발견했다.


응? 저게 뭐지?




명성이 자자한 더블 프로마쥬 케이크



애초에 치즈케이크 제과점이 이렇게 근사한 기와집에 자리 잡은 것도 이상했지만, 저렇게 용마루 끝에 근사한 치미(雉尾)가 있다고? 일본 궁궐이나 종교 시설에는 저런 게 있다고 들었는데.. 이걸 최근에 만들어 넣은 건지 아니면 예전부터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건지 궁금했다. 알고 보니 이곳에 있는 건물들은 메이지 시대 오타루가 홋카이도 최고 상업도시였을 때부터 그대로 보존해 온 창고 건물들이었다. 이름하여 운하 창고. 다이쇼 시대로 접어들면서 청어 조업이 몰락하고, 또한 홋카이도 내에 탄광 수요도 줄어들게 되면서 오타루의 경제규모는 전성기에 비해 말도 못 하게 줄어들었겠지만, 그래도 유럽의 전통도시가 그렇듯이 가장 빛날 때 남겨둔 유산으로 세계적인 관광지가 되었다. 운하 주변의 창고들의 멋들어진 자태들을 보면서, 무척이나 화려했던 오타루의 전성기를 가늠할 수 있었다. 오래전에 걸었던 프라하의 '카를대교'가 생각이 났다. 그때도, '아이구 이 놈들은 정말 조상 잘 만난 탓에 이렇게 오랫동안 관광유산 팔아먹으면서 살고 있구나.. 싶었는데.





초저녁의 오타루. 운하를 따라 좀 더 걷다가 길을 하나 건너 사카이 마치 골목으로 들어가니, 아이쿠, 여긴 더하다. 25년 전에 갔었던 프라하의 구시가 거리 같다. 각종 선물가게들이 즐비한 관광도시의 전형적인 구성도 닮았다. 하지만, 건물 하나하나, 집 하나하나에 세월의 때가 눅진하게 묻어 나왔다. 게다가 집집마다 건축 연도가 다 다른 것 마냥 스타일도 다 다르다. 저런 집은 도무지 1950년대 이후 스타일로 볼 수 없는데, 그렇다고 오타루의 번영기 때 집이라고 보기엔 너무 추레하다 싶은 집들도 으리번쩍한 건물들 사이에 숨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 와 여긴 진짜, 건축가들을 위한 맛집 골목이네. 만일 미국이라는 나라가 망하고 나면, 백 년 후 누군가가 맨해튼의 마천루 숲을 지나가면서 한때의 전성기를 추측할 수도 있겠네. 뉴욕 하니 하는 말인데, 부자들이 모이면 예술을 얘기하게 된다던가? 오타루를 대표하는 또 다른 관광상품은 바로 유리공예였는데, 이 역시 사카이 마치 골목 이곳저곳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문외한인지라 이곳에서 직접 만든 수제품과 중국 공장에서 찍어낸 싸구려를 구분할 수는 없었지만.



사카이마치의 다종다양한 건물들




오르골당 앞의 증기시계. 어디서 많이 봤다 했더니 밴쿠버 개스타운에 있는 것과 같은 것


르타오 본점의 시계탑



르타오 본점을 지나 오르골당까지 오게 되자 급작스러운 피곤이 몰려왔다. 한동안 화려한 건축물들의 향연을 보느라 숙취를 잊고 있었던 것. 아쉽게도 오르골당이 자랑하는 오래된 앤틱 오르골들은 전시만 되어있고 작동을 하려면 직원을 부르게 되어 있었는데, 가격 자체에 이미 주눅이 들어서 누군가를 불러보겠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다. 당연히 언어도 안 되었고 작동이 안 되는 앤틱 오르골은 그냥 예쁜 나무 상자에 불과했다.


운하 산책로로 접어들면서 잠시 따로 행동했던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갑자기 허기도 몰려온다. 나이가 들면서 혈당 떨어지는 순간을 종종 몸으로 느끼게 되는데, 이럴 때마다 자동차 연료계기판에 주황색 등이 들어오는 느낌이 든다. 아까 사카이마치를 지나면서, 사람들이 줄 서서 기다리던 무슨 장키인지 가라아게인지 키오스크 같은 것들이 보였는데 거기까지 돌아갈 체력이 될는지 모르겠다. 도저히 안되면 근처에 있는 르타오 본점에라도 가야 할라나.. 아냐. 저긴 본점인데, 저기서 줄 서다간 쓰러지지 싶었다. 그러던 중 자기들만의 관광을 즐기고 온 친구들의 손에는 '가마에이 가마보코 (かま栄のかまぼこ)'의 어묵 한 봉지가 들려있었다. 아이고. 황송해라. 이렇게 적절한 타이밍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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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이 방문한 가마에이 가마보코 공장 직영점. 스낵으로 생각하면 싸진 않습니다.



힘을 내서 숙소로 돌아갈 시간. 요이치에 갈 때는 중간에 한 번 갈아탔지만 삿포로로 돌아갈 땐 미나미 오타루 역에서 쾌속을 타고 한 번에 갈 수 있다. 쾌속은 속도가 빠른 기차가 아니라 정차역이 좀 더 적은, 그러니까 완행이 아닌 기차의 개념이었던 건지, 운행편수로 보자면 일반 기차에 비해 쾌속 기차가 더 자주 있어 보였다. 여전히 의심이 들어 친구가 창구에 있는 역무원에게 한번 더 그 기차가 쾌속인지 아닌지 물어보는데, 엥? 의외로 짜증을 낸다. 이제껏 일본의 고객서비스 업종에서 만난 사람 중에 이런 경우가 처음이었다. 뭐, 최근 일본사회에 과잉관광 (Over-Tourism)에 대한 경계가 만연하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고, 고객 서비스 업종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사람으로서, 저들의 고충 - 특히 언어소통이 잘 안 되는 손님을 대응할 때의 어려움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그동안 일본 사회의 접객문화에서 무조건 스미마셍으로 시작하는 스타일 역시 좋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짜증 내는 역무원의 태도에 대해 가치판단을 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단지, 좀 놀랐다. 아.. 일본도 이제 많이 변해가는구나.










삿포로 역에 도착해서 저녁을 어떻게 먹을지 잠시 고민하다가 숙소 근처의 북24가 역 주변에 가보기로 했다. 처음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 집주인인 메구미 상께서 추천한 집이 있는데, 무척 인기가 있는 집이어서 원한다면 본인이 대신 예약을 해주겠다는 제안을 했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뭘 예약까지 해서 식당에 가야 하나 싶었지만... (이후 여행일정에서 일본 식당에 있어서 예약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알게 되었다) 다른 식당에 가기엔 시간이 애매해서 그냥 찾아가 보기로 했다. '시하치'의 이름을 가진 이 식당은 본래는 생선이나 해산물을 파는 가게였지만 한편에 공간을 만들어 음식도 대접하는 곳으로 가성비 높은 해산물 덮밥으로 익히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평일이어서 그랬는지 운이 좋게 예약 없이 그대로 테이블을 얻을 수 있었다.


아. 여기 주방장 고수구나. 이게 첫인상.


일본의 식당이나 이자카야에는 오토시 (お通し)라고 해서 일종의 자릿세 개념의 기본 안주가 있는데, 이곳에서는 그날의 오토시가 11종 정도 냉장고에 진열되어 있었고 손님이 직접 그릇에 퍼담을 수 있었다. 소통의 문제 때문에 처음에는 그냥 4그릇에 비슷한 걸 담아왔었는데, 알고 보니 한국의 예전 피자헛이나 패밀리 레스토랑의 샐러드 바처럼 본인의 기술 재량에 따라 양껏, 여러 가지를 담을 수 있는 거였다. 아... 그걸 몰라서... 덕분에 한동안 테이블에서 대역죄인처럼 머리를 조아리고 있어야 했다. 그런데 또 이게 하나같이 맛있어서 더욱 큰 죄책감이.


시하치 북24가 지점



샐러드바 스타일의 오토시 바. 요 작은 접시에 담아오면 됩니다. 안내에 100g 담으라고 적혀있어서 신경 썼는데 지금 보니 제가 봐도 민망할 정도로 조금 퍼왔네요



시하치의 화려한 음식들



메뉴판. 이 정도 다양한 글꼴이 있으면 파파고도 번역이 힘들다. 윗 사진의 해산물 덮밥은 재료에 따라서 1000엔에서 최대 2000엔으로 무척 저렴한 수준


알고 보니 시하치 (ShiHachi)라는 이름은 이름하여 '2048 프로젝트'에서 따왔다고 한다. 2006년의 한 연구를 통해 2048년에 일본의 앞바다에서 생선이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가 있었고, 이에 무분별한 어획을 막기 위해서 생선의 비인기 부위를 사용한 요리를 개발하고 있다고. 삿포로 시내 타누키코지에 본점이 있는데, 그곳은 무척 인기가 높아 한 시간 이내로 기다려서는 테이블을 얻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집이었다. 아... 이렇게 지속가능한 먹거리를 연구하는 식당들이 맛있는 음식으로 인기까지 좋으니 기분이 무척 좋아져서 다음 날 저녁 테이블을 냉큼 예약했다. 기분이 좋아지면 예약 말고 또 뭘 하나요... 술이죠. 마시면 더 기분 좋아질 거 아녀요.



'연어의 백자'라고 파파고 번역된 건 '연어의 고니'의 오역



못키리(もっきり)라고 해서 이자카야에서 일본술 (니혼슈)를 마실 때 잔에 넘치게 따라서 술잔을 담은 나무상자 (마스 ます)에도 술을 채워 마시는 문화가 있는데, 이것도 일본 여행의 로망 중 하나였다. 주문을 하면서 아후레로(溢れる 넘치게)라고 말하면 된다고 해서 한번 해봤는데, 아쉽게도 나무상자는 없다고 한다. 나무상자가 아니면 어때. 술만 맛나면 되지.


넘치게 따라 주는 술




시하치의 니혼슈 메뉴. 중간에 '지금 인기'라고 적혀있는 술이 십승 (十勝)인데, '쥬카츠'라고 읽었더니 점원이 '토카치'라고 정정해 준다. '토카치'의 의미는 이후 오비히로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