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카치 도착 (2025년 10월 11일)
일본에서 우유, 술 혹은 다른 식료품을 사 본 경험이 있다면 포장지에 '북해도 십승 (北海道十勝)'이라는 한자가 적혀있는 걸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북해도야 홋카이도를 말하는 것일 테지만 십승은 무엇인가? 한국이나 캐나다처럼, 식료품 포장지에 있는 문구들이 대부분 마케팅 문구인 것에 익숙한 사람에겐, 이건 홋카이도내 어떤 경연대회에서 십연승을 차지한 걸 광고하는 문구라고 확신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블로그에서 십승 우유를 보고 "홋카이도 우유경연대회에서 십승을 차지한 우유답게 무척 고소했습니다"라는 소회가 적혀있기도 하니까. 나 역시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었고.
그런데 어떤 때에는 - 특히 일본 전통술이나 농산물의 경우 - 상표자체가 십승인 경우도 있었다. 그제서야, '어라? 이게 단순히 십연승을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의미가 있는 건가?' 싶었다. 아니면 한국의 '백설표'나 '하림'처럼 농축산 가공품을 주력으로 하는 대기업 브랜드일지도 모른다고도 생각했다. 브랜드 이름을 십승이라고 짓다니, 회장님 승부욕이 꽤나 대단하신가 보네... 하며 낄낄 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 초반 삿포로의 식당에서 일본술을 주문했을 때, 메뉴판에 십승이라고 쓰여있는 걸 보고, '쥬카츠 (十勝 한자의 일반적인 일본어 발음)'를 달라고 했더니 주문을 도와주던 서버분께서 단호하게 발음을 교정해 준 적이 있었다. '토카치'라고.
가만있자. 토카치? 어디서 들어본 단어였다. 그런데 기억이 가물... 그러다가 이번에 오비히로 여행을 준비하면서 만화 <은수저>를 다시 봤더니... 아아아아, 극 중 무대로 등장하는 '오오에조 농고'와 '오비히로 (帯広)' 시가 있는 지역이 바로 토카치였던 것. 십승 (十勝)이라고 쓰고 토카치라고 읽는 이 단어는 히다카 산맥 동쪽에 있는 홋카이도 남동부 농업지역을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국 대기업에서 쌀을 팔 때도 '나주쌀', '이천쌀'이라고 지역 이름을 브랜드화한 것처럼, 이곳 오비히로를 중심으로 하는 토카치 종합진흥국 지역에서 난 농축산물을 원자재로 사용한 식료품들에 '홋카이도 토카치'라는 브랜드를 붙였던 것.
그렇게 생각하니, 히다카 산맥으로 둘러싸여 일 년 내내 서늘한 기후를 가지고 있되 삿포로처럼 혹한 추위나 적설량은 없고, 지평선이 보일 만큼 광활하고 비옥한 대지를 가지고 있으며, 풍부한 일조량과 토카치 강으로부터 무한한 수량을 조달받아 예부터 낙농업이 발전해온 걸로 잘 알려진 토카치 지역을 브랜드화하는 건 이해가 가는 일이었다. 홋카이도가 일본 전국의 냉장고 역할을 한다면, 토카치 지역은 그중에서도 신선칸 역할을 한다고나 할까? 일본에서 유명한 디저트 브랜드인 '롯카테이 (六花亭)'와 '류게츠 (柳月)'의 본점이 오비히로에 있다는 건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한국의 정감록에서 소개하는 '십승 (十勝)'지역은, 전란이나, 흉년, 기근, 재난을 겪지 않게 되는 이상향처럼 그려지는데, 이 단어가 아이누어로 "젖이 많다"는 뜻의 '토카푸치(Tokapchi, トカプチ)'에서 유래된 일본 토카치 지역과 같은 한자로 사용된 것이 과연 우연으로 볼 수만 있을까?
해장 파르페로 배를 채운 후 가족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고 삿포로 역으로 향한다. 이쯤 되니 매일 삿포로 역을 통해 출퇴근하는 것 같구나. 이제 몇 번 출구에 엘리베이터가 있는 지조차 잘 알게 되었다.
오비히로행 특급열차의 이름은 '오오조라 (おおぞら)'. 규모가 작은 열차라서 화장실도 매 차량 앞 뒤로 있지 않다. 이렇게 운행구간에 따라서, 또는 운행시간에 따라서 다른 열차를 운영하고, 심지어 각 열차마다 개별 차량의 크기가 다르다 보니까 탑승구역이 제각각 다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그럼 안내표시라도 잘 만들어두던지).
(노상 그렇듯) 열차 안에서 잠깐 눈을 붙이고 나서 다시 여행기록을 남기다 보니 2시간 반 정도 지났나? 금세 오비히로 역에 도착한다. 역 앞에 광장이 있고 또 시외버스 터미널과 연결되어 있는 걸 보니 지난번 오타루 역이 생각났다. 그리고 한국의 오래된 지방 도시도. 주변 도시와의 교역이 거미줄처럼 잘 짜여서 돌아가는.
숙소까지는 걸어서 한 10분도 채 안 걸린 것 같았다. 이번 숙소는 '프리미어 호텔 캐빈 오비히로'라는 이름의, 13층 건물 외관에 '천연 온천 대욕장'이라는 커다란 간판을 달고 있는 호텔이었는데.. 어쩐지 좀 이상했다. 마침 10월 둘째 월요일이 '스포츠의 날'이라는 일본의 공휴일이라서 단체 숙박객이 많았고, 그에 비해 엘리베이터가 터무니없이 작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객실이 낡고, 비좁고 냄새가 나서 그런 것만도 아니었다. 그냥... 뭐랄까...
예를 들어, 어메니티 용품을 호텔 1층 프런트에 비치해두고 있는데, 그 안내문은 일본어로 간단하게 적어두고는 타월을 훔쳐가지 말라는 경고문은 4개 국어로 꼼꼼하게 적어뒀다는 점이랄까?
호텔에 도착하면, 캐나다에서도 그렇고 다른 나라로 여행을 갈 때도 항상, '아마존 파이어TV 스틱'이라고 하는 초소형 셋톱박스를 가지고 다니면서 숙소 TV에 연결하는 것부터 하는데, 이렇게 하면 숙소 TV에 내 개인 넷플릭스나 유튜브 계정 기록을 남기거나 혹은 새로 계정 연결하고 설치하는 귀찮은 절차 없이, HDMI 단자에 쓱 꽂는 것만으로도 집에서 보는 화면 그대로, 조작 그대로 TV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숙소에 도착했을 때도 자연스럽게 TV 뒷면에 남는 HDMI 단자가 있는지부터 살펴보는데..
헐.... TV 뒤에 전원 플러그 콘센트가 아예 밖으로 꺼내져 있다. 아니, 아예 콘센트를 매설했었던 흔적도 없다. 애초에 벽에 작은 구멍만 하나 뚫고 나서 TV용 전선을 밖으로 뽑아낸 것. 우워어어... 완전 위험하다. 이 동네에는 접지라는 개념이 없나요? 전원 콘센트를 벽에 매설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지 않겠어요? 이런 대형 숙박업 건물이면 매년 안전점검 같은 걸 안 하는가? 여기가 어떻게 안전심의를 통과했을지 의아했다. 이름은 프리미어라고 하더니. 북미에는 이런 걸 보면 항상 하는 농담이 있다. "이 콘센트는 누가 설치를 했나요?", "우리 조카가요. 손재주가 아주 좋거든요.", "아.. 그렇군요. 그런데 최근에 화재는 언제 난 건가요?", "아니, 그걸 어떻게 아셨죠?"
어두워지기 전에 동네 탐험을 나선다. 오타루 역 주변처럼 오래된 도시답게 여성접객원들의 사진을 대형 간판에 걸어 둔 유흥업소들이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주변으로 하나둘씩 이자카야들의 불이 켜진다. 어젯밤에 둘러봤던 어느 유튜버가 강추한 이자카야 한 곳을 찾아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예약이 다 찼다고 거절당한다... 아 그렇군요. 당연하겠죠. 사실 기대도 안 했습니다. 며칠 전 봤던 일본 여행 유튜브 중 한 클립에서는, 어느 이자카야 한 곳이 나와 자기들은 원래 단골 상대로만 장사를 한다는 걸 (하지만 이 유튜버 일행은 인상이 좋아서 받아줬다고) 자랑스럽게 얘기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사실 장사를 하는 사람이 손님을 가려 받는 일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뚜렷한 기준만 있다면. 뭐 그래도, 거절당하는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을 수는 없겠지만. 그러니, 당일 가게가 만석이거나, 원래 단골만 받거나, 드레스 코드가 있거나, 대머리는 안 받는 집이라면 아예 문 앞에 써두셨으면 좋겠습니다. 괜히 힐긋힐긋 쑥덕쑥덕 절차 후 거절하지 마시고. 이민 초기에 구직활동을 전전하면서 백번도 넘게 거절당했었는데, 거절당하는 일은 적응이 될 수 없는 일인가 보다.
발길을 돌려 다른 식당을 찾는데 어라? 이상한 맨홀이 눈에 들어온다. 포켓몬과 오비히로라는 글자를 담고 있다. 하하하. 이건 뭔가요?
포켓몬 맨홀 뚜껑. 이름하여 '포케후타 (ポケふた)'라고 불리는 이 맨홀뚜껑은 2018년부터 일본 전국에 설치되기 시작한 것으로 전 세계, 전 세대 포켓몬 덕들을 일본으로 끌어들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41개 토도부현에 400여 개가 설치되어 있다고 하는데, 에반게리온도 그렇고 슬램덩크, 진격의 거인, 드래곤 볼까지 사골을 끓이듯 계속해서 우려내어먹는 일본의 상술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한 때 한국에서도 띠부띠부 씰을 모으는 아이를 위해 편의점 앞에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리던 학부모들도 있었으니까. 이 포케후타를 위해 일본까지 찾아오는 사람이 왜 없겠는가.
반짝반짝하는 이자카야 골목을 나와 큰길을 조금 지나가니 포장마차 촌이 나온다. '북쪽의 포장마차 (北の屋台 키타노야타이)'라는 간판과 함께. 그러고 보니 어제 봤던 유튜브에서 이 포장마차 촌을 또 강추했었는데, 각 가게마다 고유의 특색이 있고 모두 매우 높은 수준의 음식이 제공되는 것으로 명성이 자자하다고 했다. 그중에서 손을 꼽았던 곳이 바로 '산타 (さん太)'. 그런데... 밖에서 보니 빈자리가 있잖아요. 게다가, 어서 오라고 하며 환영해주지 않겠어요. 어흑. 눈물이 다 날...
오오오... 오토시부터 시작해서 모든 음식의 수준이 대단히 높았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이번 여행동안 다녔던 모든 식당 중에서 최고였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특히 '카니미소(かにみそ - 붉은 대게 내장을 농축해서 만든 음식)'와 마 튀김은, 뭐랄까.. 뭔가 그동안 내가 가지고 있던 음식 경험의 지평을 콱하고 넓혀주는 것이었다. 한 젓가락 찍어먹자마자 밥 생각이 간절해져서 공깃밥 하나 달라고 해서 싹싹 비벼 먹었지만.
카운터로 되어 있는 테이블 안에서 젊은 남성은 연신 굽고 튀기고 볶아대고 있고 젊은 여성 한 명이 간단한 칵테일이나 샐러드 등 차가운 음식을 서빙하는데, 하이볼 하이볼 말만 들었지... 아, 가쿠빈 하이볼이 이런 맛이었군요. 결국 위스키 피즈 개념인데 강탄산 소다수에 어떤 시트러스를 썼는지 모르겠지만 청량함이 코 끝을 찡하게 만들었다. 이쯤 되니까 왠지 아까 그 집에서 퇴짜 맞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민 생활을 오래 한 사람들은 공감하겠지만, 기초적인 생활이나 직장에서 필요한 언어 습득 단계까지는 무척 어렵더라도 어떻게든 언어 실력이 향상되지만, 그 이상은 자신이 공부하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더 성장하지 않는다. 대신 다른 능력이 성장하는데 그게 바로 눈치빨. 이 눈치빨의 단점이라면 어떻게든 대충 수습하며 살아지니까 언어 공부의 필요성을 저해한다는 것이 되겠지만, 나름 장점이 있었으니 (영어 외에) 다른 언어에도 적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결코 일본어를 할 줄 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렇게 다른 손님들과 카운터 석에 따닥따닥 붙어 앉아있다 보니까 옆 그룹의 이야기를 흘려듣게 되었다. 이 고장 출신으로 고등학교 동창들인데 그중 둘은 고향에 자리 잡았고, 한 명이 도쿄에서 파견 일을 다니던 중 최근에 계약 종료가 되었단다. 오랜만에 만나 겸사겸사 가진 위로 술자리. 전 세계 어딜 가든 기성세대들의 기득권 때문에 젊은 사람들의 사회 진출은 걸림돌이 많은 것 같다. 특히 일본처럼 내수시장에 의존하는 경제구조를 가진 나라에서 이렇게 젊은 세대들의 구매력이 약화되는 방향으로 계속 흘러간다면, 출산율 1명도 안 되는 나라와 뭐가 다를 것인지. 유튜브나 일드를 보면 이럴 때 포장마차에서 만난 아저씨가 술값을 대신 계산해 주는 일이 종종 있던데... 큼큼. 죄송합니다.
그래도 무척 맛난 음식을 만나고 와서 뿌듯한 마음을 가지고 숙소로 돌아온다. 어제 삿포로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늦여름 날씨였던 것 같은데 어느새 밤공기가 제법 싸늘하다. 가운을 걸치고 서둘러 지하 대욕탕으로 향하는데, 에그머니나. 남탕에 여성 종업원이 자유롭게 들어와서 일하는데요. 어이구 깜짝이야. 이거 완전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보는 줄 알았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여성 왁싱사나 비뇨기과 의사도 있으니, 온천 관리 직업의 전문성을 인정한다면야 여성 종업원이 내 알몸을 보는 것에 대해 그리 부끄러워할 일은 없는데, 아... 왠지 좀 그렇다. 전문성을 인정한다기보다 그냥 예전부터 해온 일을 관습대로 하는 것이겠지. 뭐, 저들이 별 상관 안 한다면 나도 뭐 딱히 반발할 것까지는 없지만, 예전에 작은 애니메이션 프로덕션에서 일본 성인 애니메이션을 하청 받아서 일할 때 기억이 났다. 섹스 장면이 클로즈 업되는 컷이 나오면 어린 여성 동화팀원이나 칼라팀원에게는 주지 않았던 관행이 있었다. 그땐 단순히, 혹시나 울까 봐 그랬던 거였지만. 지난번 글에도 언급했지만, (독일이나 북구유럽에는 남녀 혼탕 문화가 있듯이) 이렇게 신체 노출을 과감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더 진보적인 건지, 현재처럼 상대가 받을 수 있는 성적 수치심에 고민을 해야 하는 게 더 진보적인 것인지 잘 모르겠다.
그런 상념을 핑계 삼아 한 잔 더 하고 잤다는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