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여행용 건강관리 (2025년 9월 30일)
이번 여행을 준비하면서 좀 호들갑을 떨었던 건 사실이다. 특히 건강관리 측면에서.
그도 그럴 것이, 매번 여행 갈 때마다 아파 골골대며 아무것도 못 하던 때가 꼭 하루나 이틀 정도는 있었기 때문이다. 지난해 뉴욕에 갔을 때도 그렇고, 한국에도 갈 때마다 독감에 걸린다든지 드러누워서 허송세월하던 적이 있었다. 얼마 안 되는 휴가를 털어서 여행을 가는 건데 기왕이면 알차게 놀고 싶었다. 게다가 수많은 블로거나 유튜버가 고백하듯이 일본 여행에서 2만 보 걷는 일은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니까.
먼저 지난 캠핑 때 다친 손목을 조속히 회복시키기 위해서 노력했다. 물리치료에도 가고 침술원에도 가봤다. 일 할 때는 항상 보호대를 착용해서 부담을 줄였다. 항염진통제도 꾸준히 복용했고 음주량도 줄여서 염증이 악화되지 않도록 했다. 그렇게까지 했는데도 가기 직전까지 손목이 나을 생각을 안 했다. 결국 짐을 캐리어가 아닌 배낭에 싣는 걸 계획해야 했다. 아무래도 캐리어를 끌다 보면 손목에 더 무리가 갈 일이 많을 테니까.
한편으로는 장시간 도보관광을 하게 되리라는 확신 때문에 발에 무리를 덜 주는 신발도 연구를 했는데, 선천적으로 발볼이 넓은 데다가 평발이다 보니 딱 맞는 신발을 찾기 힘들었다. 모두가 찬양하는 호카 본디나 아식스 젤은 쿠션이 너무 좋아서 장시간 걸을 때 발목에 무리를 준 적이 있었다. 벤틸레이션 모델이 생산중단된 이후로는 통기성이 애매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지난 십여 년간 꾸준하게 애용했던 머렐 모압이 가장 만만하다 싶었는데, 일기예보를 보니 여행 일정동안 비가 오는 날이 제법 되었다. 비에 젖은 운동화를 끌고 도보여행을 한다는 건 심란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죽 커버로 된 스케처스 신발을 새로 구입했건만, 발 편한 신발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무척 착용감이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그리고 메모리폼으로 된 인솔 덕분에, 30분 이상 걷게 되면 발에 금세 땀이 차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출발 직전까지 고민하던 중, 결국 장시간 걷기에 적합한 인솔을 추가 구매해서 그걸 스케처스에 넣어 신기로 했다. 그리고 막판엔 머랠 역시 챙겼다. 비만 안 온다면 나처럼 넓적한 발을 가진 사람에게는 머렐만큼 편한 신발이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여행 일정 중 단 하루 급작스러운 폭우를 만났던 날에 방수기능이 없는 머렐을 신고 있었다. 엉엉).
또한 여행 출발 전까지, 그리고 여행 중에도 비행기 내에선 물론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가급적 마스크를 착용하는 걸 잊지 않았다. 이렇게 꼼꼼하게 대비한 덕분인지, 이번 여행은 그래도 앓아눕는 일 없이 무사히 잘 놀고 온 셈이다. 거의 매일 빠지지 않고 했던 온천욕 덕분인지, 아니면 친구들이 사다 준 홍삼엑기스 때문인지도 모르겠지만.
수면 관리에 대한 중요성을 느끼기 시작한 후부터 잘 때도 스마트 워치를 꼭 차고 자는데, 이날은 일어났더니 에너지 점수가 50점대라고 무리하지 말라고 한다. 하하하하 며칠간 갑자기 무리하긴 했지. 특히 무리해서 많이 먹었구나. 그건 그렇고 이런 건강관리까지 점수를 꼭 먹여야 하는가? 하다못해 이제 시계마저 평가질이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에는 했었는데, 이게 또 숫자로 보이는 점수만큼 내 상태를 비교판단하기에 적당한 시스템이 없는 것 같기도 했다. 예를 들어 어제보다 내 건강상태가 조금 달라졌다면, 점수 말고 시계가 더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나? 완벽한 상태까지는 멀었지만 그래도 조금씩 좋아지고 있다는 걸 말하고 싶을 때 "어제는 59점이었는데 오늘은 65점이네" 만큼 이해하기 쉬운 건 없을 것 같기도 한 것이다.
삭발을 하고 다니는 사람 입장에서 여행지가 불편한 건 적당한 시간에 면도를 할 계획을 매번 세워야 하는 것이다. 혹시나 해서 집에서 쓰던 면도기도 가지고 오고 어제 노보리베츠 시내에 나갔을 때 면도크림을 사 오긴 했지만, 사실 캠핑이 아니라 이번처럼 숙박업소를 전전하는 여행이라면 웬만한 호텔에는 다 일회용 면도크림과 면도기가 배치되어 있었다. 실제로 이후 토야 호수의 온천 리조트에서 사용해 보니 성능이 믿고 쓰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이날은 아침 온천욕을 하면서 집에서 가져온 면도기를 사용해 몸단장을 한 후 아침식사를 하러 내려갔다.
아... 정말.. 이 청소와는 거리가 먼 노보리베츠 세키스이테이는 먹는 것엔 진심이네. 조식뷔페는 엊저녁에 비해서 무척 단출한 편이었지만 그래도 하나하나 맛깔난 음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무엇보다 돼지고기 완자를 넣은 돈지루가 지난밤 고생했던 뱃속을 따스하게 감싸주었다. 그 밖에도 방어구이, 생선 미소국, 일본식 치킨카레, 베트남 국수 등, 전반적으로 해장 음식들의 연속이었는데 그중에서도 발군은 폭실폭실한 홋카이도 감자로 만든 감자 고로께였다. 오늘은 좀 걸을 예정이라 더 먹고 싶었지만... 내 소화기관들한테 너무 미안해서
보통 11시에 체크아웃인 북미지역의 숙박업소와 달리, 이번 홋카이도 여행에서 신세 진 많은 곳이 10시에 체크아웃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청소할 일이 많아서 그런 건가? 평소에 비해 장시간 아침 식사를 즐기느라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동네 산책보다는 객실에서 쉬는 것을 택했다. 10시가 되면 호텔에서 제공하는 버스를 타고 삿포로 역으로 이동할 계획이다. 오늘부터 며칠간 삿포로에 있는 민박집에서 한국에서 오는 친구들과 묵기로 했다. 실시간으로 몸무게가 늘어나는 소리가 들리지만, 아침 먹고 나서 침대에 또 드러눕는 일만큼 휴일을 상징하는 일은 없는 것 같다.
버스에 올라타고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호텔 직원들이 연도에 줄을 서서 인사를 하고 깃발을 흔들며 전송을 해주었다. 사회마다 만남과 이별에 대한 다른 문화적 기준이 있을 테니.. 여기에 대해 가치판단을 한다는 건 무리한 일이겠지만, 만일 회사에서 강제적으로 동원한 일이라면 저렇게 줄을 서 있는 일은 무척 슬플 것만 같았다. 어릴 적 살던 동네 큰길로 전두환의 차량이 지나간다고 해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길가에 서서 2시간가량 기다렸던 기억이 났다. 하얀 입김을 뿜어내며 몸을 비비며 추위를 견디고 있었는데, 막상 2시간 후에나 나타난 대통령의 차는 1초 만에 쌩하고 지나가버렸다. 테러를 당할지 두려움에 떠는 지도자와 그 지도자에게 과잉충성 경쟁을 하는 부하들이 벌인 환장의 콜라보였다. 아 쒸. 맛난 밥 먹고 왜 또 옛날 생각을 하며 성질을 내고 있나. 따뜻한 전송은 그냥 감사하게 받으면 되는 거지.
어제 오면서는 자느라 정신이 없었는데, 오늘은 버스 창 너머로 다양한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무엇보다 나무들이 인상적이다. 이 정도로 고속도로 주변을 가득 매운 나무들은 캐나다에서 침엽수림으로만 경험했었는데, 어쩐 일인지 홋카이도도 나름 위도상으로는 높은 지역임에도 활엽수림들도 많았다. 이렇게 높게 솟은 나무들 위로 고속도로를 만들 생각을 하다니.. 정말 인간들의 억척스러움은 대단하다.
노보리베츠에서 삿포로까지는 버스로 2시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휴게소에 들를 시간이 있었다. 이곳은 매점이나 다른 오락시설은 없고 그냥 화장실만 있는 곳이었는데... 일본에서 본 화장실 중 가장 청결했다. 세상에나. 빔벤더스의 영화 <퍼펙트 데이>에 나오는 청소업체가 관리하는 곳인가? 모든 설비에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였다. 각 소변기에 번호가 달려있는 것도 인상적이었다. 어쩌면 이곳을 관리하는 청소업체는 회사가 담당하는 모든 소변기의 관리이력이 문서로 보관되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조금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버스는 서서히 삿포로 외곽으로 접어들었다. 큰길 주변에는 큰 간판을 단 상점들이 많이 보인다. 마치 한국의 지방도시에 진입할 때 맨 처음 보이는 게 "타이어 센터"나 "폐업정리" 간판이 정신없이 들쑥날쑥 보였던 것처럼. 하지만 다르다. 뭐가 다르냐면 글꼴이 다르다. 예전에 도쿄 쪽으로 갔을 때에도 느꼈던 거지만, 각종 간판이나 매체에서 보이는 글꼴 디자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열정만큼은 정말이지 감탄할 수밖에 없다. 전 세계 어느 곳에서 이 정도로 글꼴 디자인에 진심이 나라가 있을까 싶다. 사실 따지자면 단지 글꼴뿐만 아니라 캐릭터 디자인이나 다른 시각 디자인에 대한 감수성도 대단하다. 처음에는 시각 디자인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가 그만큼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다르게 생각하면 그만큼 싸게 부릴 수 있는 고품질 디자인 능력자들이 많아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 않다면 심지어 변두리 이자카야의 메뉴판마저도 다양한 글꼴과 디자인으로 어떻게 가득 채울 수 있겠는가.
그것도 아니라면 무료 사용이 가능한 디자인 클립아트들이 일반인들의 접근이 쉬워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한국에는 공예 혹은 디자인이라는 개념조차 생소했던 5~60년대에도 일본에서는 '도안집 (圖案集)'이라는 이름으로 출판되는 책이 여러 권 나와있었고, 한국의 출판사 등에서도 그 책들을 구해서 삽화에 사용하기도 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나고 자란 집에도 몇 권이 있었는데, 한참 뛰어놀아야 할 어린 나이 때부터 턱을 괸 채 그 도안집을 베껴 그리며 혼자 놀았다. 물론 그림을 잘 그리는 능력과 자신이 시각 디자인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컨셉을 세우고 그것에 맞는 클립아트를 찾는 능력은 전혀 다른 일이겠지만... 그래도 (저작권 보호에 무척 엄격한) 일본에서 전용이 가능한 클립아트를 책 한 권 사서 해결할 수 있는 문화가 존재했다는 것은, 각종 간판들로 뒤덮인 도시 거리의 미관에도 무척 도움을 주었을 거라 생각한다
뉴욕에서도, 파리에서도, 바르셀로나에서도, 미술로 유명한 다른 어떤 도시에서도 이 만큼 일상생활 속에 디자인 문화가 깊숙이 침투해 있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냥 유명한 작품들이 많고, 상품들이 많고, 유명한 디자인 회사가 많고, 멋진 건축물들이 많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뿌리는 전단 중에도, 나무젓가락 포장지에도, 이쑤시개를 담는 통에도 디자인 감성이 들어있는 나라가 몇이나 될까? 떄문에 19세기 중반 일본의 개항 이후부터, 일본식 정원이나 복식을 흉내내는 이른바 '자포니즘'이 서유럽 미술사조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 것이 아닐까? 전국시대, 난전 중에서도 다이묘들의 눈에 더 잘 띄기 위해서 투구를 가꾸던 전통이 일본의 디자인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다는 믿거나 말거나 썰이 있지만... 이유를 만들어내려면 끝이 없을 것 같고, 그냥 "일본은 원래 그래"라는 말만 할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