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울 수밖에, 멀 수밖에 없는 나라

삿포로 맥주 박물관 (2025년 10월 1일)

by 그래도 캠핑

80년대 초. 몇몇 기업인과 유학생들에게만 특혜로 주어졌던 해외여행. 특히 가장 가까운 나라인 일본 여행은 나라 전체에 진한 반일 정서가 남아 있어서 그랬던 건지 사회적으로 금기시되어 있었고, 이를 이용해서 몇몇 장사꾼들은 한국 사람들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일본 상품이나 문화를 그대로 표절해 한국 시장에서 수익을 올리기도 했다. 당시 TV에 방영했던 만화영화는 모두 일본에서 만든 걸 수입한 것이었고, 인쇄 만화는 당당하게 일본 만화를 베껴서 (일본 도서는 우철 -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읽는 방식 -이었기 때문에, 복사기가 귀하던 시절의 한국 표절 만화가들은 밑그림부터 다시 그려야 했다), 대본소나 소년잡지를 통해 공개되었다. 그리고 당시 한국 것과는 수준이 달랐던 일본 문구류들은 보따리 장사들에 의해 수입된 후 학교 앞 문방구에서 '팬시용품'이라는 이름을 달고 팔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학교에 일제 문구류를 가지고 다니다가 친구들에게 걸리면 당장 딱지가 붙었다. "친일파"라고.


따지고 보면 "친일파"라는 단어는 쓰임새가 이상하다.


어느 특정 나라와 친하게 지낸다는 의미의 단어가 어떤 이를 비난하는 멸칭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친일파 외에 또 있을까? 반대로, 일본에도 중국에도 러시아에도, '친한파'라는 단어를 멸칭으로 받아들이는 경우는 없지 않은가? 일제강점기의 상흔이 나라 곳곳에 여전히 진하게 남아 있고, 광복 후에 일본 제국주의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제대로 처벌하지 못한 역사를 가지고 있기에 더욱 큰 앙심이 남아 있는 건 인정을 하더라도, 그리고 여전히, 자국의 이익을 등한시 한 채, 일본 우익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수정주의 교과서나 현대 일본의 군사적 팽창 정책을 지지하는 자들이 사회 곳곳에서 암약을 한다고 하더라도, 일본 문화나 일본인 전체를 더 이상 적(敵)으로 규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 해에도 800만 명이 넘는 한국인이 일본을 방문하는 상황에서, 친일파를 계속해서 멸칭으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차라리 "일제부역자" 혹은 "민족반역자"라고 부르는 것이 어떨지.


뭐 이것도 이미 한국 국적을 포기한 나로서는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삿포로 시내 관광의 첫날은 삿포로 맥주 박물관과 함께 하기로 했다. 캐나다에서도 즐겨 마시던 맥주이기도 하고, 사실 시계탑 (구 삿포로 농학교 연무장)이나, 아카렌가 (구 홋카이도 도청)과 같은 명승지를 다니는 것보다 현재 내 일상생활에 관계가 깊은 관광지를 다니는 것이 더 실속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시에 자연스럽게 눈이 떠져서 메구미 씨의 최애커피라고 하던 맥모골을 타서 한 잔 마신 다음, 전날 미리 사둔 인스턴트 라면과 삼각김밥으로 아침을 해결하려고 봤더니 민박집 부엌에 라면 그릇으로 쓰기 좋은 크기의 대접은 없었다. 결국 약간 수프 농도를 높여서 국물을 면과 따로 서빙하는 츠케멘 방식으로 아침을 해결했다. 반숙 계란도 잊지 않고. 아.. 그리고, 일본 슈퍼에서 파는 삼각김밥에도 참치의 양이 무지막지하게 작았다. 이보시오. 원조 오니기리를 먹는다고 잔뜩 기대했더니 이렇게 배신을...



tempImagepiSs2R.heic 왕후의 밥 걸인의 찬



민박집에서 삿포로 맥주 박물관까지 가기 위해 숙소에서 5분 거리의 버스 정류장에서 19번 버스를 타야 했는데, 횡단보도 신호 한번 차이로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신호를 받자마자 뛰어가서 버스 운전기사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애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입이 귀밑까지 찢어지는 시원한 웃음을 남긴 채 버스는 떠나버렸다. 버스 얄짤없기는 삿포로나 밴쿠버나 마찬가지구나. 하지만 박물관 투어는 11시 반부터 시작이기 때문에 시간은 철철 넘친다. 찬 바람을 맞으며 30분 기다려 다음 버스를 탔는데, 아, 맞다. 일본은 뒷문으로 타서 앞문으로 내리는 거라며? 다들 처음 타본 버스에 경황이 없다. 분명히 유튜브에서 본 바로는 뒷문 옆에 있는 기계에서 정리권 (승차지점을 증명하는 티켓으로 버스요금 정산을 할 때 필요하다)을 뽑아야 한다는데,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정리권이 나올 생각을 안 한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지만 여행에서 이런 것에 일일이 스트레스받을 수는 없다. 뭐, 버스 정리권 못 끊은 걸로 체포되겠어? 몰랐다 그럼 되겠지.. 하는 마인드로 버텨야 한다.



tempImageNsSTKW.heic 이후, 10월 7일에 도야호 온천마을 버스에서 뽑아 본 정리권




다행히 버스 기사님이 무척 느긋하고 친절하셔서 잔돈을 챙기는 법까지 다 가르쳐 주신다. 비단 이 버스뿐만 아니라 이번 여행에서 만났던 모든 기사님들이 무척 친절하셨다. 알고 보니 7 정거장 사이의 짧은 노선을 운행하는 이 히가시19번 버스는 어디서 내리든지 요금이 240엔으로 동일했던 것. 그러니 정리권이라는 개념이 있을 리가. 오늘도 이렇게 하나 배우는군요. 20분 정도 버스를 타고 또 5분 정도를 걷는다. 맥주 박물관에 도착했더니 1시간 정도 시간이 남았다. 다행히 박물관 옆에는 Ario라고 하는 대형 쇼핑몰이 있어서 다이소나 로프트 등을 구경하며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 그리고, 모든 서류 작업을 할 때마다 가위를 즐겨 쓰던 아내는 하네다 공항에서 열쇠고리형 주머니 칼을 뺏긴 후로 매사에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로프트에서 작고 귀여운 가위를 구할 수 있었다.


DSC01604.JPG 맥주 박물관 입구. 홋카이도 개척 역사를 자랑하는 삿포로 시의 모든 곳처럼, 삿포로 맥주의 상징도 북극성을 나타내는 붉은 별 ((赤星:あかぼし - 아카보시)이다.



DSC01607.JPG 마침 비수기인 요즘은 박물관 외관을 수선하는 시즌.





삿포로 맥주 박물관을 방문하는 방법은 일반 관람과 가이드 투어 (프리미엄 투어)가 있는데, 인당 1000엔을 내고 사전 예약을 해야 하는 가이드 투어는 처음에 삿포로 맥주의 역사에 대한 동영상 관람과 나중에 맥주 2 잔을 시음하는 걸 제외하고는 일반 관람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가이드 투어는 영어 자막이 있는 동영상 관람을 제외하고는 일본어로 진행되는데, 갤럭시 폰의 Ai 통역기능으로는 도저히 쫓아갈 수 없는 속도로 안내를 하기 때문에, 맥주 제조 공정에 대해선 사실상 제대로 알아듣는 건 없었다. 입구에서 한글 번역앱이 설치된 아이팟을 유료로 (개당 500엔) 빌릴 수는 있지만, 동시통역이 아니라 사전에 준비된 원고를 타이밍에 맞춰 자막으로 띄워주는 것이어서 투어를 즐기는 것에 그닥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반 관람을 할 경우, 전시장에 역사나 제조공정을 설명하는 패널의 한글 번역문이 따로 비치되어 있기 때문에 그걸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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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미엄 투어 참가자가 착용하는 카드와 노다 사토루의 만화 <골든카무이>와 콜라보를 했던 삿포로 클래식




11시에 박물관에 들어가 예약명단을 확인하고 나서 가이드 투어가 시작하기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골든카무이>와 콜라보한 맥주를 출시했다는 광고가 눈에 크게 들어온다. 러일전쟁 이후를 배경으로 홋카이도 전역에서 이야기가 진행되는 만화 <골든카무이>에는 당연하게도 삿포로 맥주에 대한 에피소드가 등장한 적이 있다. 이곳에는 작가 노다 사토루의 사인과 함께 우시지마가 병째 들이붓고 있는 장면을 그린 기념삽화 역시 전시되어 있었다. 여기까진 무척 흥분되고 그랬지만


프리미엄 투어의 맨 첫 단계, 삿포로 맥주의 역사를 다룬 동영상 첫 장면에 바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영어 자막으로 본 것이지만) "20세기 초, 서양열강들의 침략으로부터 아시아 국가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본이 나섰는데..."



네?

뭐라 굽쇼?

이런 띠바...

어디서 대동아공영 똥물 튀는 소리를 하고 계시나.

외교권 빼앗고, 사법 / 치안권 빼앗고, 결국 나라를 강제로 침탈한 후, 조선 처녀 총각들 납치해서 니들 전쟁에 위안부로, 정신대로, 총알받이로 보낸 걸 보호라고 말하나?



깡패세요?



니들이 이러니 일본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욕을 먹는 거다. 친일파라는 단어가 아직 멸칭으로 쓰이는 거야.

세계적으로 유명한 맥주회사가 운영하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에서, 이렇게 뻔뻔한 대사를 가이드 투어 코스 맨 처음에 집어넣다니, 제정신이세요? 그러고 보니 삿포로 맥주 공장 건립을 추진한 당시 홋카이도 개척사 차관 구로다 기요타카가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의 시초였던 운요호 사건과 강화도 조약의 주요 인물이었네.


이때 너무 혈압이 올라서, 역사를 좋아하는 캐네디언으로서 너무 화가 나서, 그 뒤의 얘기는 잘 들어오지도 않았다. 너흰 도대체 언제까지 침략행위를 미화하려고 그러냐. 언제까지 살인, 납치, 감금, 생체실험 행위를 숨기려고 그러냐. 그러면서 어떻게 자꾸 과거를 잊으라고 그러냐. 씨바 그동안 삿포로 맥주 좋아했는데, 정말 있는 정 없는 정 딱 떨어졌네. 이제부터 두 번 다시는...


이라고 하기엔, 삿포로 맥주의 프랜차이즈가 너무 컸다. 가장 좋아하는 일본 맥주 브랜드 에비스도 삿포로 맥주 소속이고, 캐나다에서도 대량 생산 공장형 맥주 브랜드 중에 내가 애정하는 Okanagan Spring과 Sleeman 맥주는 삿포로 맥주에 팔린 지 오래다. 이런 제기랄.


처음 계획으로는 가이드 투어가 끝나면 삿포로 비어가든에서 징기즈칸과 함께 신선한 생맥주를 무진장 마시려고 했는데 입맛을 싹 버렸다. 시음회를 마치고 기념품 샵을 잠깐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와 홋카이도 대학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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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G_3629.JPG 최초 삿포로 맥주를 재현한 맥주 박물관 한정 개척사 맥주와 현재 가장 효자 상품인 구로라베루 (Black Label)을 시음했다. 화는 나지만, 공짜 맥주는 맛있네



DSC01652.JPG 유료 시음 가격


20251001_101428.jpg 야외 비어가든 가격. 관광지답게 가격이 착한 편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