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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대상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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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Dec 31. 2020

황금수, 대상-a

매거진 대상-a에 대한 설명글(라캉 이론과 관련)

현대 사회에서 라캉 이론의 중요성은 자유 회복의 문제와 관련된다. 행복한 삶을 추구하는 인간은 수많은 외적인 공포로 인해 고통받는다. 인간에게 있어 가장 큰 공포는 불확실성의 공포라고 할 수 있다. 그중 가장 큰 것은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확실성에 의한 공포다. 나의 설명글은 라캉과 관련된 여러 책을 읽은 후,  라캉 이론의 핵심이라 생각되는 것들을 엮어 놓은 것이다. 괄호 안에 책과 페이지가 적혀있다.


자크 라캉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무의식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라캉은 언어를 사용하는 인간은 언어로 무의식을 표현한다고 주장한다. 라캉의 방대하고 어려운 이론을 자세히 설명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최대한 짧게 설명해 보기로 한다. 더욱 궁금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장 속 괄호에 나온 책을 보기 바란다.     


라캉은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인간이 불확실성의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고 주장한다. 언어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말해야 하지만 그 자체가 어렵다는 것이다. 라캉의 언어는 상징계이고, 시니피앙(기표)이며,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 “나는 한 사람의 타자이다”라고 말한 랭보의 문장을 언급하면서 ‘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고 역설한다. 인간의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 19) 무의식은 언어의 은유와 환유로서 반복된다고 말한다.   

   

각의 영역에서 모든 것은 일종의 덫이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 232) 시각의 영역에서 대상-a를 규정하기는 무척 어렵다. 시각의 영역에서 대상-a는 응시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 248). 라캉은 <세미나 제20권>에서 다른 두 사람에게 보이는 ‘나’를 대상 –a로 규정한다. 대상 –a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 91). 대표적인 대상-a는 응시, 유방, 똥, 목소리이다.    

  

여기서 특히 ‘응시’에 주목하기로 한다.      


응시와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의 관계에는 유혹이 따른다. 주체는 자신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제시되고 우리가 그에게 보여주는 것은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이 아니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대상 –a로서 즉, 결여의 차원으로 작용한다(자크 라캉 욕망 이론 247).  

   

인간이 무엇인가를 행동으로 옮길 때, 자신의 욕망이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이다’ (라캉의 정신분석, 대상-a는 황금수이다 15). 인간을 욕망으로 이끄는 원인인 소문자 타자, 즉 대상-a를 이해하려면 라캉의 이론에 대해 좀 더 설명이 필요하다.


라캉의 정신분석학적 3단계는 상상계, 상징계, 실재계의 개념을 발전시켰다. 상상계의 거울 이론은 오로지 ‘바라보는 나’만 존재하는 상태이다. 이런 환상 속의 이미지가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이런 환상이 어두운 현실의 고통 속에서 인간을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매료된다. 아이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자신과 완전히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 단계를 상상계라고 한다. 이 단계에서 아이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이미지를 총체적이고 완전한 것으로 가정한다. 그러나 거울 속의 이미지는 새로운 자아형성의 원천이고, 자아형성 시 개입되는 ‘오인’으로부터 생겨난 환상일 뿐이다(Tyson 27).     


라캉의 분석에는 주체에 대해 네 가지 측면이 관여하고 있다. 무의식의 주체로서 자아인 이드(Id), 이드의 파트너이면서 자아로서의 분석 수행자인 소문자 타자, 자아로서의 분석가인 에고(Ego), 그리고 에고의 파트너로서 더미 혹은 죽은 사람으로 대문자 O로 표기하는 타자로서의 분석가인 대문자 타자이다. 실재의 주체인 이드는 파트너로서 소문자 타자에 영향을 주고 이는 거울이미지로서 에고에 영향을 준다. 이드와 소문자 타자는 거울 이미지를 만들어 ‘보는 나’에  직접 관계하고, 에고와 대문자 타자는 ‘보여지는 나’를 만들게 되며 주체인 이드에 영향을 주어 전체적으로는 자아의 네 측면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게 된다. 즉, 대문자 타자는 무의식의 영역에서 주체인 이드에게 영향을 주며 또한 동시에 분석가의 자아인 에고에 영향을 준다(에크리 읽기 23-33).    

 

라캉의 대상-a는 응시(gaze)이다. 우리의 시각은 보기만 하는 시선(eye)이 아니라 보여짐(gaze)이 함께하는 중첩적인 것이다. ‘보여지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라캉이 욕망하는 주체다. 상상계 못지않게 상징계를 강조하듯 그는 보여짐, 즉 ‘응시’가 대상을 허구화시키는 욕망의 동인(대상a)임을 보여준다. 데카르트식 사유는 상상계적 사유요, 시선만 있을 뿐 눈먼 사유라는 것이다. 장자가 나비가 되는 꿈을 꾸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난 후 나비가 장자의 꿈을 꾸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꿈속에서 그는 나비다. 현실 속에서 그는 나비에 의해 보여지는 자신을 본다. 응시란 우리가 시야에서 발견하는 것이다. 신비로운 우연의 형태로 갑작스레 접하게 되는 경험이다. 응시는 주체가 상상계에서 상징계로 들어서듯 바라보기만 하던 것에서 보여짐을 아는 순간 일어난다. 그래서 실재라고 믿었던 대상이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지 못함을 깨닫고 다시 욕망의 회로 속으로 빠져들게 하는 동인(대상 a)이다. 기표를 작동시켜 주체를 반복충동으로 몰아넣는 중심의 결여, 즉 실재계에 난 구멍이다(욕망 이론 33).


 즉, 라캉의 상징계에 진입하면서 아이는 언어라는 타자에게 복종하면서, 기표가 그/그녀를 대신하게 한다. 라캉은 우리의 무의식이 상징계에 진입해서 언어를 사용하게 되면서 ‘은유’와 ‘환유’로 나타난다고 한다. 주체는 타자의 욕망(대상-a)의 자리를 떠맡으며 더 이상 그것에 의해 예속되지도 그것에 고착되지도 않는다(라캉의 주체 139).     


라캉의 욕구와 욕망에 대한 내용에서 소문자 타자인 대상 –a주체의 욕구에 의해 욕망처럼 나타나게 되는 기표이다. 반면, 대문자 타자는 요구에 의해 나타나는 진정한 욕망의 기표이다. 라캉은 상징계에서 개인은 언어나 사회적 관계를 이해하고,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이나 도덕적 윤리에 구속받기 시작한다고 설명한다. 사회적인 자아로 발전하면서 사회적 정체성은 확립되고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을 인정하게 된다.      


무의식이 타자(대문자로 표시되는)의 담론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것이 개별 주체들을 넘어선 어떤 차원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거기에서 욕망은 타자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욕망이 된다. 달리 말하면 타자란 그것이 없으면 거짓말도 가능하지 않은 내 속에 있는 진리의 보증 자이다. 이러한 사실로부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언어의 등장과 함께 진리의 차원이 열린다는 것이다(욕망이론 92-93). 문제는 주체가 그 대문자 타자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그 이유는 대문자 타자인 기표가 항시 숨겨져 있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기표이다) 이를 향한 기표로서 소타자를 요구한다. 즉, 대문자 타자에 대한 욕망은 대문자 타자가 베일에 싸인 채 소타자를 그 대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다. 여기서 대문자 타자는 무의식의 주체로서의 분석 수행자이다. 이러한 순환에 의해 주체인 이드는 자신이 무엇을 욕망하는지 결코 알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주체는 상징계의 주인이자 언어의 주관자 같지만 사실은 정반대로 시니피앙이 주도권을 갖는다(라캉으로 이끄는 마법의 문자들 119). 사실 라캉의 실재계는 모호함을 지녔다. 그래서 라캉에게 실재계는 ‘형용할 수 없는 것’, ‘불가능한 것’ 같은 의미를 같게 된다. 즉, 그것은 의미 작용의 영역 너머에 존재하는 접근할 수도, 다다르 수도, 알 수도 없는 인지 너머, 장막 너머의 실재이며 동시에 주체의 욕망을 이끄는 세계이다(Tyson 32). 그러므로 현실성은 주관적 시각이 투시된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진정한 이해’는 잘못된 명명이며 ‘통찰 insight’이라는 용어는 무관한 용어란 것이다(라캉의 주체 141).      


언어라는 타자와 인간 주체의 관계에서의 핵심은 인간이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시니피앙을 갖지 못한 데에 있다. 이러한 결여에 의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언어라는 타자의 욕망의 대상으로 경험하게 된다. 인간이 언어를 통해 세계를 경험하고 그 경험이 사상누각이 아닌 현실이 되기 위한 기초는 인식이 아닌 욕망, 그것도 타자의 욕망이다. 내가 정말로 원하고 있는 것이 실현되었을 때 나의 욕망은 타자의 욕망으로서 실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나 자신보다도 이 타자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스스로의 자기 동일성을 확증하려는 바로 이 순간에도 나를 동요시키는 이 타자는 도대체 누구인가? 타자는 단순히 나와 또 하나의 주체가 아니다. 타자는 또 다른 주체가 아닌 주체가 환원시킬 수 없는 이질성(eccentricity)으로 이해될 때에야 비로소 나와 다른 주체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수행할 수 있다(신구 121-36)



대학원 논문을 라캉의 이론으로 썼는데 솔직히 모두 잘 이해한 것은 아니다. 다만, '나는 한 사람의 타자이다'라는 문장이 가장 와 닿았다. 매거진의 제목을 대상-a라 칭한 이유를 이제야 설명해 보았다.


<위대한 게츠비>의 게츠비가 손을 뻗어 닿고자 했던 데이지 집의 '초록 불빛'은 대문자 타자를 향한 대상-a이다. 대상-a를 황금수라 했다. 그 이유는 무지개와 같이 실체가 없는 것을 향한 실존하는 소문자 타자이기 때문이다.


또 눈이 내리고 있고, 오늘은 한 해의 마지막 날이다. 집 밖에 나가서 눈을 맞고 싶다. 이러한 나의 바람은 소문자 타자인 대상 -a이다. 눈 내리는 도심 속 타인을 보는 것, 그 타인의 눈으로 보여지는 나, 그리고 기록으로 남길 모든 것들은 나의 욕구를 넘어선 욕망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다.



인사말씀 드립니다.


한 해 동안 저의 브런치에 관심 가져주신 이웃 작가님들, 그리고 구독자님들께 정성을 담아 감사 인사드립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되, 상대를 볼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응시가 되는 것입니다.


저의 삶의 '결여'를 메우고 무지개를 잠시 바라보게 된 순간도 있었습니다. 브런치를 얼마나 더 하게 될지는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브런치는 결여를 메운 대상-a이지만 어쩌면 허상일런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했기에 저에게 소중한 곳입니다. 그리고 소중한 공간에서 만난 인연들 또한 소중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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