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새로운 용어를 배운다
<진로와 직업>이라는 과목을 수업하면서 만난 A는 똑똑하고 차분한 학생이다. 자신의 진로에 대해서 발표할 때 PPT도 무척 인상 깊었다. PPT의 전체적인 색조와 내용의 요약뿐 아니라 목소리도 마음에 쏙 드는 아이였다. 대부분 발표를 열심히 잘했다. 그러나 눈에 띄는 학생들이 있기 마련이다. 바로 A가 그런 경우다.
이미지 컨설팅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것은 첫인상과 목소리의 톤 그리고 용모다. 잘생기거나 예쁜가의 문제가 아니다. 면접에서 긍정적이며 신뢰를 주는 모습이 중요하다. 그런 이미지를 가졌다면 반은 성공한 것이다. 게다가 발표의 내용까지 좋다면 합격 가능성이 높게 된다.
그렇게 평소 신뢰가 가는 학생이 연말에 과목별 세부능력 특기사항(이하 과세특) 부분에 대해 상담을 하기 위해 나에게 왔다. 학생은 1학기에 발표를 했는데, 2학기가 되면서 자신의 진로가 바뀌어서 이것저것 책을 읽고 보고서를 썼다고 한다. 나는 학기 초 직업의 여러 가지를 소개한다. 그리고 과세특에 학생의 진로와 발표 내용 및 변화과정을 쓴다. 과세특은 1500바이트까지 쓸 수 있다. 수시 입시에서 중요하게 다루는 부분이자, 교사가 법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는 부분이다.
나는 학생을 관찰하고 열심히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글쓰기를 잘하는 것도 사실 학생들의 종합의견란이나 추천서 또는 과세특을 쓰는 데에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아름다운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수업을 통해 학생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를 관찰하고 쓰는 것이다. 그래야 진정성 있는 과세특이라고 본다. 어떤 태도로 발표를 했고, 어떤 보고서를 제출했으며, 어떻게 변화가 있었는지 혹은 다른 발표자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를 쓴다.
과세특은 대입에서 학생부를 면밀히 검토할 때 아주 중요한 자료다. 나 같은 경우에는 성적이 낮은 학생일지라도 어떤 영역에 높은 관심과 성의를 지니고 창의성과 변화를 보여줬다면 그것을 쓰게 된다.
학생이 보고서를 써 온 것을 꼼꼼히 읽었다. 내용은 '미디어 리터러시'에 관한 것이었다. 보고서를 매우 잘 썼다. 미디어 리터러시의 정의뿐 아니라 방향성 그리고 솔루션으로 자신은 어떻게 하고 싶은지까지 세 가지나 제시했다. 그러니 내가 놀랄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십중팔구 집에서 써 주거나 학원 대필일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생에게 질문을 하기 시작했다.
"미디어 리터러시가 뭐지?" (나는 처음 들은 단어다. 무식한 선생님 같으니라고. )
"미디어 리터러시란 미디어가 특정한 방향으로 조작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비판적으로 분석하고 행동하는 능력을 말해요. 그래서 미디어를 다양한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해요. "( 이밖에도 4차 산업이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아주 길고 똑 부러지게 대답을 해서 내가 조금 주눅이 들 뻔했다)
"그래? 선생님은 용어는 처음 들었네? 그런데 네 반 친구들은 이 용어를 알아? 친구들과 이야기는 해 봤어? 이런 문제에 대해서?"
" 아이들도 사회 수업시간에 용어에 대해 간략히 배워서 알아요." (처음 들어본다는 선생님을 무시하는 표정은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래도 이제라도 알게 되어서 고마웠다.)
" 그렇구나, 너희들이 선생님보다 똑똑하다. 하하. 그런데 생각해 보니 라캉이란 사람이 왜 미디어 쪽에서 인기가 많은지는 알겠다. 언제 시간 되면 라캉 이야기를 좀 해 보기로 하자. 용어를 들으니 '현명한 소비'라는 것과도 관련이 있구나. 기업은 소비 심리를 부추기기 위해 광고를 하고, 그 광고에는 문제점이 많다는 것을 말하지 않지. 우리 소비자는 그것을 비판적으로 분석해서 착한 소비를 해야 하는 거지. "
"네, 선생님. 그런 식으로 미디어의 문제점을 제대로 알고 그에 맞게 받아들이자는 거예요."
"그래? 그런데 이 해결책 부분은 네가 생각한 것이니? 책에 나온 것이니?"
"그것은 제가 생각한 것이에요."
" 정말? 참 발표를 잘하던데 역시 너는 차분하면서 똑똑하구나. 무슨 과를 가고 싶어?"
" 미디어 언론 정보학과에 가고 싶어요."
" 그래, 네가 남은 고등학교 시간을 열심히 보내서 꼭 성공하길 바랄게. 그런데 네가 읽은 책의 제목이 뭐라고?"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이에요. Z세대를 위한 미디어 교육 길잡이라고 되어있고요. 김광희 외에 4명인데 다른 작가는 생각이 안 나요."
"음, 너네가 Z세대로구나. 당장 사서 읽어봐야겠다."
이후, 책을 주문했다. 여러 명이 집필을 했다. 이런 경우 맨 앞에 제일 열심히 한 분의 것이 와야 할 것 같다. 다들 맨 처음 언급된 저자 이름만 기억한다.
제목 : 미디어 리터러시 수업(Z세대를 위한 미디어 교육 길라잡이)
작가 : 김광희(경기도 서촌초등교사), 김면수(소명여고 국어교사), 이선희(서울 양천 교육지원청 장학사), 정형근(정원여중 국어교사), 홍윤빈(정원여중 영어교사)
발행처 : (주)휴머니스트 출판그룹
책이 도착해서 오자마자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한 책은 아니었다. 미디어 리터러시에 대한 학문적인 책을 원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수업 모형에 관한 책이었다. 수업에 사용하면 도움이 될 듯하다. 그러나 우리가 미디어를 이용한 교육을 할 때 현재 늘 하고 있는 방식이었다. 다만, 용어만 모를 뿐이었다. (이렇게 거만하면 글을 잘 쓸 수 없다고 자책한다.) 그래서 꼼꼼히 살펴보았다. 중학교 현장의 교사들에게 도움이 될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고등학교는 교과서 자체가 이런 방향으로 제시되며, 교사용 지도서 등 외에도 이런 자료가 많은 편이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이 책으로 그렇게 해결책까지 제시한 나의 학생 A가 무척 대견스러웠다. 그 아이는 3가지나 방향을 제시했기 때문이며 책에는 나와 있지도 않은 것이었다. Z세대를 위한 쉬운 형식의 책이 많이 도움이 되었나 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성공한 사례라고 본다.
나의 큰 문제점 중 하나는 '이 정도는 나도 만들 수 있는데'라는 것이다. 이 책을 만들기 위해 여러 명의 현직 교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을 시간을 생각한다면 그런 말은 당치도 않다. 협업 작업은 좋은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서로 배려와 이해가 필요하다. 이들의 노력의 시간에 박수를 보낸다.
나는 매일 새로운 용어를 배운다. 신기한 일은 우리 머릿속은 쓸수록 시냅스 회로가 활성화되고 강화되나, 쓰지 않는 회로는 없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즉, 장기기억을 위해서 부지런히 새로운 용어를 익히고 메모한다. 매일 잊어버리지만 그래도 반복 강화하다 보면 치매 예방에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스스로 위로를 한다. 시냅스에 대한 전문가의 도움 글을 첨부한다.
https://m.blog.naver.com/sanchna/221666971441
그리고,
다음은
대입 면접에 도움이 될지로 모를 팁과 관련된 PPT 발표수업 모형을 아래에 더하기로 한다. 누군가 혹시라도 발표 수업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지 싶다.
관심 없는 이는 패스하길 바란다.
- 첫 시간 : 학생들에게 진로 카드를 주고 서로 자신의 진로에 대한 고민 및 진로희망 이유를 이야기하도록 한다(둘 씩 팀이 되도록 했는데, 코로나로 마스크 쓰고 조금 멀리 떨어져 앉았다).
- 둘째 시간 : 대학 '어디가' 웹사이트를 주로 이용한 다양한 직업을 설명하고 입시 자료를 찾는 법을 소개한다.
발표를 할 때는 순서가 있다. 먼저 이미지를 위해 절하는 법과 자기소개하는 법을 시범으로 가르쳐 준다. (절은 45도 정도로 하고, 용모를 어떻게 단정히 해야 하는지 설명한다. 목소리는 적당한 톤으로 하되 정확한 발음으로 상대가 들리도록 한다 등의 방법을 시범으로 보여준다)
1) 시범대로 인사하기
2) 한 문장으로 자기 소개하기
[저는 어디 무슨 과를 지망하는(또는 무슨 직업을 꿈꾸는) 000입니다 ]라고 큰 소리로 이름을 말해야 한다.
3) 지원 동기 및 꿈을 가지게 된 동기 말하기 (꿈이 없던 학생들이 일 년 동안 다른 친구들의 발표를 듣고 자신의 꿈을 찾게 되거나 고민하는 시간이었다)
4) 그 학과나 직업에 대한 자료 조사 브리핑하기 (인터넷에는 많은 콘텐츠가 있기 때문에 학생들이 아주 잘 찾고 요약해서 발표했다)
5) 원하는 학과나 직업에 관한 동영상 소개하기 (미디어 콘텐츠에 관심이 많은 학생들이기 때문에 졸다가도 번쩍 눈을 뜨게 된다. 단, 1인당 동영상 소개는 5분을 넘기지 않게 한다)
친구가 발표 시 나머지 학생들은 친구 발표 내용과 생각을 적는 관찰 일지를 작성하도록 한다.
관찰일지에는 날짜, 발표자, 발표자의 희망 진로, 발표 내용, 소감 등을 10줄 이내로 간략히 쓰도록 함.
매 시간 발표는 두세 명으로 제한하고 발표자에 매칭으로 돌발 질문자는 질문지를 미리 써 오도록 한다.
돌발 질문자가 결석한 경우 교사가 돌발 질문자가 되어 질문을 하기도 한다.
발표자에 대한 단점이나 모자란 부분에 대해서는 절대로 언급하지 못하게 하고, 잘 한 부분을 한 가지 이상 칭찬하게 한다. 한 발표자에 한 명의 칭찬하기를 무작위로 교사가 지목했다. 학생들이 친구의 발표를 잘 듣고 칭찬하도록 유도하는 시간이다. 칭찬은 어떤 식으로 하는 가를 몇 가지 예문으로 미리 알려줘야 한다. 단답형이나 일반적인 대답을 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 참 잘했어요. 하는 식은 피해야 하는 대답으로 특히 무엇을 잘했는지 구체적으로 말해주기로 한다)
일 년간 고등학교 2학년의 다섯 반의 강의를 한 결과 매우 만족스러운 성과를 거두었다. 가장 큰 이유로 학생들이 자신의 진로에 대해 무척 진지하게 임했다는 것이다. 학생들의 고등학교 1학년 시절,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 일 년 동안 엎드려 있던 학생들도 진로 탐구 시간에는 발표를 하거나 다른 친구의 발표를 듣고 질문을 하는 모습을 보였다.
또한 친구들이 보여주는 동영상 콘텐츠를 흥미롭게 시청했다. 친구가 들려주는 자신의 직업이나 진로에 대한 고민을 듣고 다양한 직업에 대한 이해의 접근이 용이했다고 본다. 솔직히 가장 좋았던 점은 시험이 없는 교양과목이었다는 점이다. 학생들은 부담 없이 수업에 임했지만 발표는 정규 수업보다도 훨씬 적극적이고 재밌게 했다. 교사는 채점이 없는 과목이라서 부담도 없고 학생들에게 미움도 사지 않았다. 평가란 항상 불만이 따르기 때문이다. 재밌게 한 해를 아이들과 보낸 시간이었다. 학생들의 발표를 통해서 나 역시 성장한 한 해였다고 본다. 8월부터 브런치를 시작한 나는 더욱 다양한 직업에 대해서 폭넓게 알게 되었다. 다양한 직업만큼이나 그들의 고민을 이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내년에는 주 중에 네 시간 동안 이런 기회가 주어졌다. 학생들과 더욱 재밌는 수업을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