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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Jan 06. 2021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키치에 대해


어제 카페에서 읽기 시작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꺼내 들고, 이불을 동그랗게 말고 드러누워 팔이 좀 아프지만 이쪽으로 누웠다 저쪽으로 누웠다 하면서 종일 읽는다.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이번이 세 번째다. 그런데 처음 읽는 기분이다. 새삼 여기저기 줄을 긋는다. 고전이란 다시 읽어도 처음 읽는 것 같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밀란 쿤테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고전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키치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한다. 오늘은 키치라는 용어를 중심으로 소설을 읽어보기로 한다. 여기에서 키치는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294)이다.

키치는 20세기 후반에 보편적이며 저속한 대중적 문화를 의미했다. 그러나 최근 본래의 기능을 거부하는 특성, 충동이나 수집의 특성, 값이 싸야 하며 축적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낭만적 요소를 포함하며 상투성과 쾌적함의 요소를 가지는 특성, 여러 요소들을 조금씩 가지고 있는 중층성의 특성 등을 가진다."(아래의 출처 2. 키치에 대하여)
소설 속 키치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니체의 영원회귀를 알아야겠다.  니체는 사랑 고통 질병 전쟁 화해와 같은 우리 삶의 요소들이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끊임없이 일어나고(영원) 그것이 반복되어 나타난다(회귀)고 말했다. 영원회귀로 보면 우리 삶은 무겁기 그지없다. 아무리 해도 인간은 존재하는 한, 그를 짓누르는 삶의 무게가 무겁고 끝이 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의미하는 키치


1) 테레사의 키치(전통적 키치, 삶의 무거움을 대변하는 인물)


결혼에 대해 특별한 생각이 없던 토마스는 테레사라는 여인으로 인해 결혼을 받아들이게 된다. 테레사는 '안나 까레리나' 한 권을 들고 토마스 집에 나타났다. 결혼 후 테레사는 자신보다 사회적으로 높은 계층에 속하는 바람둥이 토마스의 여자관계를 알면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토마스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테레사는 어찌 보면 전통적인 키치를 지닌 인물이다. "전체주의적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 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당한다."(29모든 것을 알면서도 받아들여만 하는 세계에 사는 여인이다. 소설에서는 삶, 현실, 인생의 짐을 무거움이라고 언급한다. 테레사는 이러한 무거운 키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가장 실존적인 인물이며 강한 인물이다.


2) 토마스의 키치(야망, 권력 등에 대한 대중적, 사회적인 키치를 버리게 되는 인물)


토마스의 눈에 테레사는 허약하다. 소설에서 여러 번 테레사의 "허약성"(354)이 언급된다. 토마스는 테레사를 '강물에 떠밀려 내려온 바구니의 아기'라고 생각한다. 토마스는 아기를 지키기 위해 '그래야만 한다'라는 사회적 키치를 버린다. 즉, 유망한 외과의사에서 유리창을 닦는 청소부로 마지막엔 시골 농부가 된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죽는다'. 토마스는 테레사에 의해 '가장'이라는 키치에 머물게 된다.


3) 사비나 (가벼움의 키치를 대변하며, 속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대표적 인물)


사비나는 공산주의의 키치, 가족이라는 키치 등의 속박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갈구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그래서 그녀는 언제나 '배신'한다. 그녀는 소설에서 전지적 시점의 작가에 의해 언급되듯이 "평화롭고 조화로운 가정의 모습"(292)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은 채 가슴 깊숙이 품고 살았다고 의심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어쨌든 삶에서 그녀를 짓눌렀던 것은 인생의 무거운 짐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다."(144) 그녀에게 남은 것은 공허였다. 결국 사비나는 가정을 이루지 않고 끝내 깃털처럼 가볍고자 하며, 죽으면 화장을 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긴다.


4) 프란츠의 키치 (자신만의 이상을 향한 키치, 왜곡된 이미지에 몰입하면서 허상을 쫓는 인물, 보는 나만 존재하는 인물 )


프란츠는 '대장정'이라는 키치를 사랑한다. 몽상가적인 프란츠의 대장정은 "앞을 향한 멋진 전진, 우정, 평등, 정의, 행복을 향해 멀리 나아가는 노정"(294)이었다. 대장정의 키치를 동경한 나머지 언제나 사비나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고 그 시선 안에서 만족하고 살아갈 희망을 가졌다. 심지어는 자신이 가르치던 여학생과 연애관계에 빠졌을 때조차 이 여학생을 사비나가 보내준 사람이라고 합리화하는 자기중심적 인물이다. 마지막에는 아무 명분이 없는 죽음을 당한다.



작품에 등장하는 네 명의 주요 인물들인 토마스, 테레사, 사비나, 프란츠는 모두 각자의 키치 또는 비-키치를 지니고 그것을 추구한다. 이들은 키치 안에서 행복하거나 불행하다. 왜냐하면 "어느 누구도 초인이 아니며 키치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무리 키치를 경멸해도 키치는 인간 조건의 한 부분인 셈이다."(294)



키치는 라캉의 '대상 a' 즉, 디테일이며 메타포이다. '인간은 태어나고 살기 위해 바둥거리다가 죽는다. ' 디테일이 없이, 메타포 없이 이렇게 간단히 말해버리면 허망함만 남는다. 비관적 허무주의가 된다. 토마스는 테레사의 "언어를 통해"(240) "뇌 속에 시적 기억을 독재자처럼 점령하여 다른 여자들의 모든 흔적을 쓸어내 버렸다."(239) 테레사가 다른 여자와 구별되는 디테일은 바로 그녀의 키치이다. 질투하고 사랑하고 몸부림치며 살아내는 삶의 무게를 지니는 여자다.



그런데 나는 이 대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테레사는 프란츠의 아내와는 다른 방법으로 바람피우는 남편을 떠나지 않는다. 프란츠의 아내는 사회적 시선에 의존하는 반면 테레사는 오로지 남편의 시선만 의존한다. 그야말로 순종적인 이미지이다. 밀란 쿤테라는 테레사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 싶었을까? 테레사는 토마스와 인생의 우여곡절을 함께 한 후 마지막에 깨닫는다. 자기의 '공격적 허약성'이 결국 토마스의 힘(삶을 전진하게 하는 대상 a)을 빼앗아 그를 토끼로 만들었다는 것을. 아이가 없는 그들을 이어주는 것은 개 카레닌이었는데 마지막에 개도 죽는다. 대상 a가 없는 삶은 죽음으로 가는 마지막 역이다. 소설의 끝 부분에서 '인생의 마지막 역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 이것이 어쩌면 작가의 키치였을까?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한 ebs 강좌를 들으니 우리가 삶의 주체가 되어야 하며 필연보다는 우연을, 존재보다는 생성을, 미래보다는 순간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긍정하라고 한다.(아래 출처 1. 니체)



라캉은 인간이 절대 자기 자신의 주체가 될 수 없는 점을 수많은 책을 통해 설명했다. 라캉의 주장도 매우 설득력이 있다. 그러나 라캉도 '자신이 주체가 되어 살고 싶었던 인간이었기에 타자를 욕망하는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인식'해야 함을 강조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관점에서 우리 삶을 무겁게도 가볍게도 만들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결국 자기가 생각하기 나름이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을 생각하면 존재의 가벼움을 참을 수 없다는 말은 무엇인가? 인간 존재란 이러저러하게 인간을 옭아매는 것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고, 그렇게 되었을 때는 허망함만이 남는다는 뜻이 아닐까? 비록 생의 마지막에 가서야 남편을 믿지 못해 모든 힘을 빼앗은 테레사가 자기 자신을 책망할지라도, 존재하는 한 우리는 인생의 무게를 감내하며 그 순간 최선의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 지난 글을 수정하여 올렸습니다. 2021년 1월 현재는 코로나로 인해 카페에서 커피가 테이크 아웃만 되기 때문에 한가롭게 앉아서 향과 음악과 책을 즐길 수 없어 아쉽습니다. 아래에 니체의 영원회귀와 키치의 용어 해설을 링크합니다.





1. 니체의 영원회귀에 대하여:)


http://m.blog.naver.com/metalenigma/220109478113


2. 키치에 대하여:)


http://m.terms.naver.com/entry.nhn?docId=1530996&cid=41799&categoryId=4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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