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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Jan 12. 2021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 다시 읽는 제인 에어

나는 누구인가?

진 리스(Rhys, Jean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Wide Sargasso Sea, 1966)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Jane, Eyre, 1847)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도미니카 태생의 영국 작가가 1966년 발표한 책이다. 사르가소 해(Sargasso Sea)는 서인도제도와 유럽 사이에 광활하게 펼쳐진 바다이다. 영국에도 자메이카에도 속하지 못하며 방황하는 주인공의 캐릭터를 나타낸다. 대항해 시대에는 이 지역이 마의 바다, 죽음의 바다 등으로 묘사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소설 자체가 죽음을 내포하고 있다고 본다.


 여고시절 샤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1847년)를 읽을 당시 나는 꿈 많은 소녀였다.


고아인 주인공 제인이 얼어붙은 로체스터의 마음을 사로잡고 가정을 일구게 되는 스토리에 푹 빠졌었다. 제인의 캐릭터가 강하면서도 따뜻하고 사회적인 눈치를 보지 않고 당당한 여성이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도 당연히 주인공에게 맞춰졌다. 샤롯 브론테는 소설을 남자 필명으로 출판사에 보냈다. 당시 사회적인 여건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한다. 쉽게 설명하자면, 조선시대에 하녀가 주인과 결혼을 하는데 그것도 주인이 쩔쩔매면서 결혼해 주십사 하는 격이다. 하녀는 위풍당당하며 자신의 의지를 당당히 밝히며 명민하고 지적이다. 우리나라의 조선시대와 비교 불가할 정도로 영국은 그 당시 보수적이었다. 때문에  <제인 에어>의 당당하고 똑똑한 여성상은 사회에 해를 끼친다고 여겼다고 한다. 베스트셀러임에도 논란으로 금서가 되는 지경이었다고 한다. 19세기의 제인의 이야기는 단순한 로맨스를 넘어서 당시 사회상을 비판하고 있다. 그 점에서 높은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제인 에어>는 119년이 흐른 후 작가 진 리스에 의해 색다르게 재조명된다. 작가 진 리스는 크리올이고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의 주인공 앙투아네트 역시 크리올이다. 크리올이란 반은 백인, 반은 자메이카인을 말한다. 저자인 진 리스는 어느 날 제인 에어를 읽고 크게 반발하여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를 읽은 후, <제인에어>에 대해 다른 시선을 갖게 되었다. 제인 에어보다는 로체스터의 아내에게 더 초점을 기울이게 되었다. 몰락한 가정을 세운다는 이기적 명분만으로 일종의 사기 결혼을 감행한 로체스터에 실망했다. 광막한 바다가 자신의 고향과 현재의 삶 사이에 있어 돌아갈 수도 없는 앙투아네트에 연민을 느꼈다. 결혼은 그녀를 낯선 땅에 머물게 한다. 로체스터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아내에 대해 이해할 노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녀를 집안의 어두운 곳에 가두고 새 삶을 찾는 로체스터에 분개했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에서 앙투아네트는 부부의 잠자리 만이 이 남자를 자신에게 묶어 둘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당시 환경에서 그녀의 선택지는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결혼 전 자신이 가진 돈도 남편에게 귀속되고 아무런 사회적 힘도 갖지 못한 날개 잃은 여인의 삶이 안타까웠다.


아직 우리나라는 다문화 가정이 그리 많지는 않다. 한 반 학생이 30명이라면 그중에 부모님 중 한 분이 다른 나라 분인 경우는 한 명이 될까 말까 한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온 외국인 선생님 말씀이 그곳은 한 반 학생이 30명이면 30명이 거의 부모의 뿌리가 다르다고 했다. 우리가 단일민족임을 내세우면서 자랑하는 것에 나는 별로 찬성하지 않는다. 뿌리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중요한 일이지만 말이다.


과거에 우리나라의 많은 이들이 삶이 힘들어서 고국을 등지고 타지에서 생활하게 된 사례가 많았다. 불가항력으로 전쟁으로 끌려간 뒤 돌아오지 못한 채 그곳에 정착하게 된 경우도 많다. 어떤 연유가 되었거나 삶의 변화를 위해 낯선 곳에서 생활하게 된 교포들을 생각한다. 수많은 이민자들이 타지에서 이방인의 삶을 살면서 느꼈을 이질감, 정체성의 혼란을 이해하기 좋은 책이다.


더불어 상당수의 이민자나 우리나라에 체류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외국인 근로자들의 열악한 환경과 비 인간적 행위를 고발하는 사건 사고를 접한다. 지난주 '그것이 알고 싶다'에 방영된 사건만 봐도 그렇다. 인간이 인간을 제대로 대접하지 않으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우리는 아직 '나와 다른'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서툴다. 아직도 우월주의가 판치고 있다. 뭐가 그렇게 우월하다는 말인지 상식 밖의 행동들을 하는 경우를 마주하면 언어 표현이 주저된다. '나와 다른 타자'도 또 다른 나의 모습이라고 여겼으면 한다. 우리의 '다른'은 영어의 '디퍼런트 different'다. 틀린, '뤙wrong'이 아니다. 다름을 다름으로 보는 것이 평등이라 배웠다. 나 역시 지난 블로그 글을 읽다 보니 '틀리다'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영어를 배운 후 느낀 단어다. 그 후로 다른 사람에게 대답할 때, "음, 그건 좀 다른데."라고 말하려고 노력한다. 아직도 습관적으로 "틀려." 했다가 스스로 놀라는 경우도 있다.


<제인 에어>와 또 다른 느낌의 책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를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다름'에 대해, '나는 누구인가?'에 대해 물음을 던지는 책이다.


원서를 읽는 재미가 있지만 한국어 번역서도 있다.


진 리스(Rhys, Jean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Wide Sargasso Sea, 1966)에 관한 나의 논문을 첨부하기로 한다.


진 리스(Rhys, Jean 1890-1979)의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Wide Sargasso Sea, 1966)는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Jane, Eyre, 1847)에서 영감을 얻은 작품으로 도미니카 태생의 영국 작가가 1966년 발표한 책이다.


1830년대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소설에서 주인공 앙투아네트는 "나는 대체 누구인가?(147)"라고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서 끊임없이 의문을 제기한다. 언어로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여 '내'가 누구인지를 설명해야 한다. 그러나 자기 언급의 요구는 인간을 곤궁에 빠뜨린다.


쟈크 라캉(Jacques Marie Emile Lacan)은 상대의 언어를 자신의 욕망대로 해석하는 것을 응시라고 언급했다. 즉, 우리가 '본다'는 행위를 통해 각자의 욕망의 응시가 나타난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체계는 은유와 환유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언어처럼 구조되어 있다"(욕망 이론 19)고 주장한 이유는 프로이트(Sifmund Schlomo Freud)의 꿈의 작용이 언어에 적용된다고 분석했기 때문이다. 라캉에 의하면 시선과 응시의 분열은 그렇지 않아도 어렵기만 한 이해관계를 수수께끼로 만들며, 인간을 상대의 절대적 응시에 의존하게 한다. 그리고 인간은 끝없이 그 수수께끼를 향해 가고 또 가는 존재처럼 보인다.


신구 가즈시게(Shingu Kazushige)는 라캉의 이론을 해석한 책에서, "언어로서 내가 누구인지 말한다는 것은 자기 언급의 불완전성 때문에 불가능하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모른 채,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타자들 속에서 태어난 것이다"(121-136)라고 지적한다. 내가 누구인지를 언어로 표현해 낸다는 것 자체가 무리라는 것이며, '나'라는 존재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있었던 사회적 담론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결국 '나'는 속수무책으로 내가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어왔던 담론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위치에 놓이게 되는 수동적 타자가 된다. 이때 이름은 사회 속 '나'를 표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마치'나'는 하나의 타자가 된 듯이, '나'라는 주체가 언어를 습득하기도 전에 '나'를 지칭하는 이름이 만들어지고 별명이 만들어진다. 내가 언어를 습득한 후에는, '나'는 다른 이를 부러워하기도 하고 '나'의 다른 이름 즉, 별명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한편 다른 이들이 '나'를 지칭하는 다른 이름을 만들기도 한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에서 앙투아네트의 남편은 이름을 갖지 못한다. 이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 다만, 책 <제인 에어>의 다른 버전으로 여겨지는 독자들은 이미 로체스터란 이름에 익숙할 뿐이다. 영국인인 로체스터에게 작가 진 리스는 아예 이름을 주지 않음으로써 크리 올인 작가 자신의 복수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로체스터는 앙투아네트에 의해 '그(he)'라고 불려지다가 소설의 끝부분에는 '그 남자(that man)'로 칭해진다. 크리올인 앙투아네트는 영국인 로체스터와 결혼 후 로체스터에 의해 지배되는 삶을 산다고 볼 수 있다. 소설 전체를 아우르며 로체스터는 라캉의 상징계의 '언어'의 주체임에도 불구하고 자메이카, 즉 그랑부아(Grand bois)에서는 실질적인 언어의 주체가 되지 못한다.


로체스터가 그의 방식인 '버사(Bertha)'로 앙투아네트를 부른다거나 흑인 하인들이 그녀를 '하얀 바퀴벌레(White Cokroach)'라고 칭하는 것도 이름이 갖는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는 시종일관 애매모호하게 타자의 담론을 이야기함으로써 그것에 대한 답을 독자에게 맡긴다. <제인 에어>를 읽은 사람이라면,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의 결론에 대한 답을 추측해 낼 수 있다. 소설에서 모두 앙투아네트는 미친 부인이 된다. 각 인물들의 이름도 동일하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제인 에어>의 버사는 <광막한 사르가소의 바다>에서 주인공 '앙트와네트'로 다시 태어난다. 본 논문은 <제인 에어>의 소설과 그녀의 마지막 꿈을 근거로 앙투아네트가 결국 죽게 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며, 소설을 통해 한 번도 언급하지 않은 앙투아네트의 남편 이름은 동일하게 로체스터로 명칭 한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후의 자메이카를 배경으로 크리올인 여성과 영국인의 결혼 이야기에 집중하여 그들의 고뇌를 라캉의 욕망 이론을 통해 분석한다. 어떤 시대를 막론하고 인간의 심리구조에 나타나는 기본적인 현상이 있다. 그러한 현상이 주어진 조건 안에서 '어떻게' 그리고 '왜' 일어나게 되는지 주목하다 보면,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는 열린 마음을 가지게 된다.

                                                                       2012. 석사 졸업논문(영미문학)


이상은 논문의 서문 중 일부이다. 나머지 서문은 이미지로 올리기로 한다.



읽고 또 읽으면서 문장 하나 하나를 분석하기 위해 노력한 흔적이 드러나는 원서의 낙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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