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빔과 조청의 추억
시댁에서의 첫 설에는 한복을 예쁘게 차려입고 갔다가 너무 불편했다. 제사 음식 준비와 더불어 산더미 같이 많은 가래떡을 썰어 떡국떡을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추석에 송편 빚기가 있다면 설날은 떡국 떡을 썰어야 한다. 미리 떡을 빼서 하룻밤 지난 상태가 썰기 적절한 상태다. 너무 굳거나 너무 물렁거리면 하기 힘들다.
그 후 시댁에 갈 때는 예쁜 한복 대신에 앞치마를 들고 갔다. 어느 설에는 어머님께서 미리 떡국 떡을 썰어 놓으시기도 하셨다. 우리 시어머님께서는 하실 수만 있다면 힘든 일을 미리 해 놓으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엊그제 우리들에게 선언하셨다.
이번 명절부터 제사는 지내지 말자!
나의 동서는 교회를 지성으로 다니는 신자지만 한 번도 싫은 내색 없이 여태껏 우리와 함께 제사 음식을 준비해 왔다. 어머님의 말씀으로 이제 종교적으로도 자유롭게 된 것이다. 조상님을 섬기는 것도 좋지만 변화된 세상에서 제사음식을 모두 차리는 것은 낭비라고 생각된다.
지난주 예쁜 옷을 사들고 어머님께 다녀왔다. 어머님께서 올 설은 각자 지내자고 하셨다. 그래도 설날에 가 뵈려고 했는데 이번에는 형님네가 모시고 잔다고 한다.
그간 참으로 힘들게 살아오신 어머님께서 결단을 내려 주셔서 우리 모두가 행복한 설을 맞이하게 되었다. 앞으로는 우리가 먹을 음식만 장만하기로 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설이 다가 올 무렵이면 엄마가 이번에는 또 어떤 옷을 사 주실지 몰라 가슴이 뛰었다. 딸이 내리 셋인데 그중 맏이였기 때문에 늘 나는 새 옷을 입을 수 있었다. 동생들은 나의 옷을 물려받았고, 기껏해야 양말을 사 주는 정도였다.
자라면서 나의 막내 여동생이 어느 날 딱 한번 받은 옷을 서랍에 고이 간직하기에 물었더니 아까워서 그런다는 것이었다. 나는 엄마께서 새 옷을 사 주시자마자 입고 동네방네 돌아다녔는데 말이다. 철없는 언니였으니 어쩔 수 없다. 어린 날을 돌이켜 생각하면 할수록, 과거 어린 시절 이야기를 동생과 나누는 일이 어렵다. 만약 내가 한마디 꺼내기만 하면 동생에게 바로 질책을 당한다. 나의 바로 아래 여동생의 푸념을 하염없이 들어야 하는 것은 숙명이다.
내가 설빔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오로지 오빠가 남자이기 때문이었다. 만약 오빠가 여자였다면, 우리 집은 아래로 주르륵 넷이 맏이의 옷을 물려받아야 했을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나에게 여동생이 둘씩 되지 않았다 해도 엄마께서 여자 아이 옷을 사 주셨을지는 의문이다. 그만큼 할머니와 엄마의 오빠에 대한 사랑은 큼직하셨다.
조청의 추억
설날이 다가오면 설빔과 함께 부뚜막에서 주걱을 저으며 달이는 조청이 떠 오른다. 유독 설 명절의 조청이 떠 오르는 이유는 유과나 산자 때문인 것 같다. 떡을 조청에 찍어 먹기도 했지만 특히 유과나 산자를 만들 때 쌀 튀밥이 잘 달라붙게 하기 위해 조청을 사용한다.
산자를 만들 때면, 어린 시절 방 하나에서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곳에 넓게 잘 마르라고 산자를 펼쳐 놓았기 때문이다. 몇 주 전에 구례 오일장에서 사람들이 쌀 튀밥을 많이 하던데 그 이유가 산자나 유과를 만들기 위함이라고 했다. 여전히 우리 먹거리 풍속이 이어지는 점이 좋다. 전주 말고 다른 곳 중 살 곳을 선택하라면 구례, 진안을 생각한다. 현실성 떨어지는 도시 중에 제주, 강릉이 속한다. 이유는 바다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곤 한다. 내가 다른 도시에 산다면 하는.......
글 서두에서 밝히는 '손자'란 나의 아버지의 손자 즉, 나의 조카다. 우리 집안 손주 11명 중 딱 한 명이 남자아이다.
아이들에게 설날은 뭐니 뭐니 해도 세뱃돈이다. 나의 아버지 입장에서 손주를 합하면 손녀 10명에 손자 하나다.
나의 아버지께서는 첫 손녀딸인 나의 큰딸을 애지중지하셨다. 출산한 병원의 수술실 팻말에서부터 아기의 모습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까지 캠코더에 담아 후일 주셨다. 그럼에도 손자가 태어나자 모든 애정을 손자에게 기울이셨다.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고전적 사고방식의 소유자셨다.
막둥이라 그런지 나는 남동생 아이들이 더욱 귀엽다. 모두 눈이 왕방울들이다.
맛있는 새해 즐거운 한 해가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