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담그기
이웃집에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말씨도 곱고 예쁘장하신 분이 사신다. 고창 시댁에서 담근 동치미라고 조금 주셨다. 깊고 그윽하고 시원한 맛이 어린 시절로 나를 이끈다. 이게 바로 그 '프루스트 효과'다. 맛보자마자 과거로 날아가게 하는 맛이라니......
"이거 굉장한데요?"
"그래요? 조금만 더 줄까?"
"네!"
정말이지 딱 어린 날 맛본 동치미의 맛이다. 동치미를 좋아하시는 아빠 덕분에 김장 때면 엄마는 동치미를 꼭 담으셨다. 그러면 아빠는 땅을 파고 장독을 묻으셨다. 할머니가 안 계신 후부터 엄마는 김장을 아빠와 두 분이서 오순도순 담으셨다. 아니, 티격태격하시면서 일을 마치셨다. 팥죽에 동치미, 팥죽에 김치는 금상첨화다.
"설탕 조금만 넣으라니까"
"안 넣었다니까"
동치미의 맛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뭐니 뭐니 해도 청각이다. 김장을 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가 청각이다. 녹조식물인 청각은 바닷말 중의 하나이다. 사슴의 뿔 모양으로 자라며 톳과 비슷한데 톳은 끝이 좀 더 뾰족하다.
어렸을 때 청각을 만지면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이런 걸 왜 넣느냐고 엄마에게 여쭸던 것 같다. 흐물거리는데 의외로 질겨서 김장 김치의 양념으로는 자잘하게 다져서 사용한다. 백김치와 동치미에는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다지지 않고 이용한다.
청각은 젓갈, 생선의 비린내 또는 잡내를 제거하고 마늘 냄새를 중화시키는 작용을 해서 음식의 뒷맛을 개운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항생작용, 면역력 증강 등에 도움을 준다는데 너무 많이 오랫동안 먹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한다. 과유불급이다. 무엇이든 좋다고 지나치게 먹는 것은 역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나도 지난겨울에 동치미를 한번 담아 볼까 생각했다. 무도 맛있게 보여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포기했다. 김치 냉장고가 발달했다고 해도 땅에 김장독을 묻는 것이 최고다. 이제 친정도 시댁도 김장독을 땅에 묻지 못하니 안타깝다. 김장독을 묻어주던 이들이 계시지 않다. 그래서 김장철이 되면 그리움이 새록새록하다.
눈 온날 땅에 묻은 장독의 뚜껑을 열고 동치미 한 그릇을 퍼 올리면 맛이 일품이다. 가슴이 답답한 일이 있다면 뻥 뚫리게 된다. 물론 동치미를 퍼 오라는 엄마나 아빠의 부르심은 애써 외면했다. 손과 발이 얼어버릴 듯한 날, 나가서 장독을 열고 퍼야 하기 때문이었다.
찹쌀가루 새알심으로 된 뜨끈한 팥죽 한 그릇과 시원한 동치미의 단출한 식탁은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최고의 만찬이 된다.
최근 10년 이내에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맛보지 못했다. 화학적으로 발효시킨다든지 사이다 같은 것으로 맛을 내게 하면 겉 맛만 좋고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남의 털로 예쁘게 치장한 이솝우화의 까마귀 이야기 같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상 그 아름다운 겉모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본 맛이 아름다워야 깔끔하다. 내면에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이 만날수록 좋다.
이웃이 주신 동치미는 발효가 잘 되고 약간은 달면서 잘 삭은 그러나 시지 않고 시원한 맛이다.
어릴 적에 우리 할머니께서는 먹기 싫은 새알심을 많이도 넣어주셨다. 동짓날 나이에 따라 새알심을 넣어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나이 숫자만큼 새알심을 넣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새알심을 더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고 하셨다면 나는 아마 새알심을 신나서 먹었을 것이다. 어릴 때는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그렇게 신이 나는 일이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를 줄 알았다면 나이 먹기 싫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