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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Feb 09. 2021

12월, 시원한 동치미와 뜨끈한 새알심 팥죽

청각을 아시나요?

12월의 절식으로는 새알심 팥죽이 있다. 여기에 곁들이로 동치미 한 그릇만 있으면 금상첨화다.


이웃집에 나보다 나이가 한 살 많은, 말씨도 곱고 예쁘장하신 분이 사신다. 고창 시댁에서 담근 동치미라고 조금 주셨다. 깊고 그윽하고 시원한 맛이 어린 시절로 나를 이끈다. 이게 바로 그 '프루스트 효과'다. 맛보자마자 과거로 날아가게 하는 맛이라니......


"이거 굉장한데요?"

"그래요? 조금만 더 줄까?"

"네!"


정말이지 딱 어린날 맛본 동치미의 맛이다. 동치미를 좋아하시는 아빠 덕분에 김장 때면 엄마는 동치미를 꼭 담으셨다. 그러면 아빠는 땅을 파고 장독을 묻으셨다. 할머니가 안 계신 후부터 엄마는 김장을 아빠와 두 분이서 오순도순 담으셨다. 아니, 티격태격하시면서 일을 마치셨다.


"설탕 조금만 넣으라니까"

"안 넣었다니까"

 

<나의 식탁> 할머니의 김치 비밀 편에서



동치미의 맛을 살리는 가장 중요한 식재료는 뭐니 뭐니 해도 청각이다. 김장을 할 때 반드시 들어가는 재료가 청각이다. 녹조식물인 청각은 바닷말 중의 하나이다. 사슴의 뿔 모양으로 자라며 톳과 비슷한데 톳은 끝이 좀 더 뾰족하다.


어렸을 때 청각을 만지면 느낌이 좀 이상했다. 이런 걸 왜 넣느냐고 엄마에게 여쭸던 것 같다. 흐물거리는데 의외로 질겨서 김장 김치의 양념으로는 자잘하게 다져서 사용한다. 백김치와 동치미에는 모양새를 유지하기 위해 다지지 않고 이용한다.


청각은 젓갈, 생선의 비린내 또는 잡내를 제거하고 마늘 냄새를 중화시키는 작용을 해서 음식의 뒷맛을 개운하게 한다고 전해진다. 항생작용, 면역력 증강 등에 도움을 준다는데 너무 많이 오랫동안 먹는 것은 오히려 좋지 않다고 한다. 과유불급이다. 무엇이든 좋다고 지나치게 먹는 것은 역의 영향을 받게 되는 것 같다.


나도 지난겨울에 동치미를 한번 담아 볼까 생각했다. 무도 맛있게 보여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포기했다. 김치 냉장고가 발달했다고 해도 땅에 김장독을 묻는 것이 최고다. 이제 친정도 시댁도 김장독을 땅에 묻지 못하니 안타깝다. 김장독을 묻어주던 이들이 계시지 않다. 그래서 김장철이 되면 그리움이 새록새록하다.


눈 온날 땅에 묻은 장독의 뚜껑을 열고 동치미 한 그릇을 퍼 올리면 맛이 일품이다. 가슴이 답답한 일이 있다면 뻥 뚫리게 된다. 물론 동치미를 퍼 오라는 엄마나 아빠의 부르심은 애써 외면했다. 손과 발이 얼어버릴 듯한 날, 나가서 장독을 열고 퍼야 하기 때문이었다.

찹쌀가루 새알심으로 된 뜨끈한 팥죽 한 그릇과 시원한 동치미의 단출한 식탁은 수라상이 부럽지 않은 최고의 만찬이 된다.


최근 10년 이내에 맛있는 동치미 국물을 맛보지 못했다. 화학적으로 발효시킨다든지 사이다 같은 것으로 맛을 내게 하면 겉 맛만 좋고 뒷맛이 개운하지 않다. 남의 털로 예쁘게 치장한 이솝우화의 까마귀 이야기 같다. 아름답게 보이지만 실상 그 아름다운 겉모습은 자신의 것이 아니다. 본 맛이 아름다워야 깔끔하다. 내면에 아름다움이 있는 사람이 만날수록 좋다.


이웃이 주신 동치미는 발효가 잘 된 약간은 달면서 잘 삭은 그러나 시지 않고 시원한 맛이다.


동치미와 어울리는 팥죽을 사 와서 뜨겁게 한 다음 먹어보려고 사진부터 찍는다.


 

어릴 적에 우리 할머니께서는 먹기 싫은 새알심을 많이도 넣어주셨다. 자료를 찾아보니 동짓날 나이에 따라 새알심을 넣어먹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할머니께서 나이 숫자만큼 새알심을 넣어 주셨다면 좋았을 텐데, 아니면 새알심을 더 먹으면 나이를 한 살 더 먹게 된다고 하셨다면 나는 아마 새알심을 신나서 먹었을 것이다. 어릴 때는 나이 한 살 더 먹는 것이 그렇게 신이 나는 일이었다. 언제부터 나이를 생각하지 않게 되었는지 따져보니까 결혼 후부터다. 그때부터 나의 인생은 돌아보고 말고 할 겨를도 없었지만 신경 쓰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아이가 몇 개월이에요?"

"네, 지금 30개월이에요."


누구도 나에게 나이를 물어보지도 않았고 나 자신도 관심이 없었다. 대신 누구에게든 나의 딸 개월 수를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 딸을 보면 모든 것이 대견하고 신기할 따름이었기 때문이다.


"글쎄 오늘은 우리 딸이 왼쪽 손에 딸랑이를 오른손으로 잡았다니까요."

"글쎄 오늘은 다섯 걸음이나 걸었어요. 넘어지면서도 다시 일어나서 또 걷기를 반복하다니 참, 대견하지요?"


등등의 문장에는 반드시 글쎄 이제 겨우 (00)개월 밖에 안되었다니까요, 라는 문장이 덧붙여졌다.


나의 큰딸의 경우 일찌감치 언어가 발달해서 언어 요정 같았다. 그 예쁘고 앙증맞은 입술로 말을 하고 있으면 바라보기만 해도 세상 근심을 다 잊었다.  


중학교에 들어간 아이가 독립심도 생기고 성장통도 겪게 되었다. 아이가 세상을 마주하는 만큼 나도 아이와 나만의 거울 세계로부터 밖의 세상으로 나와야 했다. 그 후부터 갑자기 내 나이를 따져보게 되었다. 어느 사이 나이를 성큼 먹어 버린 나는 아가씨 때의 몸매와도 성격도 모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일찌감치 그런 이야기를 듣기는 했었다. '중년의 위기'가 올 수 있다는 말. 그것이 나에게 왔고 나는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 여러 가지로 몸부림쳤다. 그 후 또다시 많은 시간이 흘렀다. 몸매도, 또한 명랑하고 곱상한 성격도 젊은 날로 되돌릴 수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거울 속 낯선 이방인 같던 나의 달라진 몸매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시간이 흘러버렸다. 사진을 먼저 찍고 나중에 글을 쓰려고 했는데, 시작하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얼른 맛보기로 한다. 물을 조금 넣고 약간만 더 가열할까 하다가 그만둔다.


팥죽은 식어도 잘 먹으니 맛보기로 한다.

고소~하다


동치미도 그릇째 들고 들이켜 본다.


시원~ 하다!


벼의 어린 모종에서부터 추수 그리고 쌀알과 벼 껍질, 지푸라기 이야기까지 모두 끝났다. 마치 한 해가 다 간 느낌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묵은해를 보낸다. 며칠 있으면 음력설인 정월 초하루가 된다. 다음은 음력설 '까치까치설날, 우리 우리 설날'에 대해서 이야기하기로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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