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로 인해 맺은 인연들
장떡이란 전의 일종이다. 고추장 1 큰 숟갈 정도면 된장 1작은술 정도를 넣고 전을 부치듯이 기름을 둘러 부치는 음식이다. 두릅만 보면 나는 두릅 장떡이 떠 오른다.
지난해에는 산의 나무 두릅을 얻어서 데친 후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는데 향과 맛이 살살 녹았다.
올 해도 먼저 데친 후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그런데 땅두릅이라서 그런지 많이 쌉싸래했다.
"제니퍼, 이거 땅두릅은 원래 이렇게 씁쓰름했어? 가시 없는 거 말이야. 지난해 가시 있는 것은 더 연하고 향도 적절하고 맛있던데 이건 좀 쓴 맛이 강하네?" 하고 전화를 했다.
"원래 땅두릅은 좀 더 쓰지. 쓴맛에 먹는 거지. 근데 땅두릅도 전에 줄리아처럼 튀기면 더 맛있어." 하고 제니퍼가 말했다.
그런데 나는 튀김을 하지 않았다. 왜냐면 튀김보다 더 먹고 싶은 장떡 요리를 하기로 결정했다.
마지막은 줄기 부분을 좀 더 잘라서 넣었더니 향이 강하고 맛있다.
과거에 두릅 장떡을 맛있게 만들어준 사람은 나의 큰딸로 인해 알게 된 지인이다. 나를 조금 닮아 사교성이 있는 편인 큰딸이 5살 때 집 앞 미술학원에서 만난 아이와 친해져서 서로의 집에 자주 놀러 다니게 되었다. 직장에 다니는 나는 듬직한 그 아이의 엄마를 의지하게 되었다. 나의 딸이 자주 그 집에 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름대로 나도 다른 것들로 고마움을 표현했지만 그녀는 내가 인생에서 알게 된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결국 그 아이의 엄마와 나 역시 곧 친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아이들보다 우리들이 더욱 친한 인생 친구가 되었다. 그녀에게도 속한 그룹이 있었고 그 그룹에 나는 자연히 끼게 되었다. 우리들은 인생이 우리를 어디로 이끄는지 알지 못한 채 매일 시시덕거리면서 수다를 떨었다.
당시에 그녀들은 직장에 다니지 않았다. 최종학력도 다르고, 책 이야기 한마디 나누지 않는 사이였다. 다른 공통분모가 없는 상태에서 친해지기도 힘들다고들 하던데 나는 그녀들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 인생의 쓸데없는 가식은 모두 걷어치우고 삶의 밑바닥부터 함께 나누게 되었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 책에 있지는 않았다. 목욕탕을 함께 다니는 사이들이 되었다. 젊은 시절 사우나실에서 이야기하는 아줌마들이 그렇게 이상하게 보였는데 내가 그 아줌마가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참으로 따뜻했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나에게 잘해주었다.
우리에게 공통분모가 없는 것이 아니었다. 결혼, 육아는 엄청난 공통분모다. 그 당시만 해도 인터넷이 안되던 시절이었으니 경험자들의 한마디가 무엇보다 소중했다. 이해관계도 없었기 때문에 더욱 마음이 편했다.
그중 왕언니가 있었다. 나는 본시 '언니'가 없어서 대학의 과 선배 언니 이외에는 절대 '언니'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가 왕언니에게 언니 소리를 하게 된 것이다. 그 왕언니는 요리 솜씨가 정말 좋았다.
"김치 담그니까 와서 먹어!" 하면 퇴근 후 쪼르르 옆 동에 달려갔다. 그러면 그곳에 그 그룹의 여럿이 모여서 수다를 떨고 있었다. 어느 날 "두릅 장떡 해줄까?" 하는 것이었다. 나는 두릅이란 것도 처음 먹어보았다. 우리 집에서는 두릅 요리를 거의 맛보지 못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지 않으셨던 것 같다.
게다가 장떡이 뭔지도 몰랐다. "고추장과 된장 조금을 넣고 버무려서 전을 부치는 것을 장떡이라고 혀. 너는 가정선생님이 그것도 몰랐냐?" (이건 내가 제일 듣기 싫어하는 소리지만 왕언니가 하니 꾹 참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니까 나는 몰랐네. 언니~, 그런데 우리 집에서는 고추에 고추장 넣고 부침개를 부쳐먹었는데 그게 장떡이었네. " 하고 그제야 장떡의 의미를 안 내가 말했다.
그 후로 나는 두릅 킬러가 되었다. 두릅만 보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는다. 여러 요리 중 장떡은 꼭 해 먹고야 만다. 그날 여럿이서 장떡을 부쳐서 막걸리를 함께 나누며 박장대소하던 시간을 떠 올린다. 내가 만든 것은 왕언니가 만든 것보다는 맛이 덜하다.
서로 이사를 하고 아이들이 자란 후로는 연락이 거의 끊겼다. 그래도 해마다 두릅을 보면 왕언니의 손맛, 두릅 장떡이 생각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