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지고 싶을 때 권하는 책
더글라스 케네디의 <빅 피춰>는 스릴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긴장감이 넘친다. 펼친 순간 끝까지 손을 놓을 수 없다.
우발적 범죄를 그렸으므로 범죄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딱히 어느 한 부류로 정하기는 어렵다. 아주 뻔한 이야기를 너무도 흥미진진하게, 처참하게, 아프게, 공감가게 그렸다.
꿈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오히려 불행한 듯이 여겨진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사는 것이 더 나은 삶일까?
소설은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주인공이 끔찍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독자는 주인공과 한 몸이 되어 변명하게 되며 그의 미래를 같이 걱정하게 된다.
소설의 표지 그림을 보면 <빅 피춰>의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호기심이 인다. 왜 이 남자는 길거리 한 복판에서 다른 사람의 사진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것일까? 그리고 그의 손은 어찌하여 피로 물들어 있는가? 이런 의문 속에 첫 장을 펼치게 된다.
"새벽 네 시, 조시가 또 울었다. 나는 몇 주 동안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조시 때문에 깬 건 아니었다."라고 시작하는 서두에서 이미 예고된 바대로 이들 부부는 가족 문제로 심한 대립 상태에 있다. 흔한 이야기처럼 둘은 두렵기는 하지만 잘 헤쳐나가기를 기대하며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다. 그러나 안정된 삶을 누리는 대신 점점 자신이 꿈꿔 왔던 일들은 멀어지고 만다.
그러나 자신이 꿈꿔 왔던 일들이 멀어질수록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고 그 탓을 상대에게 돌리게 되면서 가족은 붕괴된다.
카메라 렌즈 너머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그건 절대 '수동적'일 수 없다고 말하지만 다분히 수동적이다.
우리 인생은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정말 내 것인가? 소설 <소금>은 한국적 정서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썼다면 <빅 피춰>는 미국식 정서로 아버지의 이야기를 풀어냈다고 본다.
나는 뷰파인더 뒤에 숨어서 내가 속한 세상 이야기를 그 구멍으로 들여다본다. 그러나 세상과 교류가 없이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또 복잡해진다. 그러니 소설 마지막 문장처럼 어쩔 수 없다. 참아내면서 살아야 한다.
한때 인생이 나에게 너무 한다 생각한 적이 있다. "왜 나만 못 살게 굴지?"라고 원망도 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모든 것은 원인이 있다. 그리고 나의 선택이 있다.
내가 추구했던 것들이 모두 무너졌을 때 사라지고 싶었다. 바로 그 시기에 이 책은 나에게 지금 너의 인생이 차라리 낫다고 말해줬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나는 그때 내가 너무 욕심을 많이 부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있다. 나는 살아 꿈틀대는 인간이니 외로움과 고통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는 것이다. 누가 말했다. 내가 고통스럽다 하면 남들은 피를 흘린다고. 그렇다. 인정한다.
이제 나는 나이 들어서 행복하다. 나이 들어서 좋다. 방황하고 힘든 영혼에게 조용히 권하고 싶은 책이다. 지금 당신의 삶은 나쁘지 않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