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 뭇국과 딸
딸의 대입 수능 시험에 맞춰서 서둘러 보온도시락을 샀다. 반찬은 무엇을 해야 할까 망설이다가 평소 큰딸이 좋아하던 소고기 뭇국으로 정했다. 소고기를 볶고, 무를 송송 썰어 넣어 소고기 뭇국을 끓였다. 보온 물병도 준비했다. 물병 주머니를 바느질로 만들었다. 어느 사이 자라서 대입 수능시험을 본다니 설렘 반 떨림 반의 심정이었다. 수능 시험 한 번이 인생을 좌우하는 상황은 십수 년이 흘러도 참으로 변함이 없다. 수능 시험날 어떤 반찬이 좋을지 고민하는 부모님들이 많다. 딸이 잘 먹고 좋아하며 소화가 잘 되는 반찬이 최고일 듯하다. 글의 맨 아래에 작은 팁이 있다.
아침에 보온 도시락을 들고 시험장으로 들어가는 딸은 씩씩했다.
종일 떨리는 가슴 진정시키면서 EBS 방송을 들었다.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는데 신기하게도 그 많은 아이들 중 나의 딸이 보인다. 도시락을 열어보았다.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시험이 오후 5시경에 끝났는데 온종일 물만 먹고 밥과 도시락은 그대로 가져왔다. 너무 긴장이 되어 밥을 먹을 수 없었다고 했다. 마음이 아리고 딸이 너무나 안쓰러웠다. 한편, 이렇게 굶고 시험은 어떻게 봤을지 걱정도 되었다.
수능 시험은 첫 단추가 중요하다. 그리고 엄청난 집중력을 필요로 한다. 첫 시간에 자신 있게 풀지 못하면 남은 시간들의 시험을 망치기 일쑤다. 첫 시간에 놓친 문제들이 있어서 마음을 추스르기 힘들었다지만 다행스럽게도 둘째 시간부터 집중을 잘했다. 종일 긴장 속에서 체할 것 같아서 식사를 못 한 것이다.
나의 큰딸은 상당히 섬세한 편이다. 성장할수록 감성적이고 따뜻한 아이라는 것을 알았다. 중학생 때 빨간 머리 앤 10권을 읽다가 엉엉 울어서 물어보니 "앤이 결혼해서 감성이 줄었어."라고 말했다. 그게 그렇게 울 일인지. 또 모네의 그림을 보고 울어서 왜 그러냐고 물으니 "엄마, 너무 감동적이야. 나중에 커서 엄마랑 오르세 미술관에 갈래." 하고 대답했다. 수학을 잘했고, 과학에 관심이 많아 자기 용돈으로 과학잡지를 사 보기도 했다. 학습적으로 볼 때 이과를 선택할 줄 알았는데, 본인이 희망한 고등학교는 문과가 정해진 학교였다.
결국 타 도시의 고등학교에 진학한 후 기숙사 생활을 했다. 첫 해에, 자주 얼굴을 보지 못하는 딸로부터 편지가 왔다. 다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고 "엄마, 이제 엄마 인생이 벌써 몇십 년이 흘렀어요. 항상 엄마가 내 곁에 있으면 바라고, 집에 가서도 주말에 엄마가 나랑 지냈으면 바랐지만, 이제 엄마도 엄마의 인생을 살아야겠지요...... 등등" 긴 편지를 읽으면서 우리 딸이 엄마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을, 그리고 체념인지 수용인지 엄마의 마음을 편하게 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았다. 눈물이 났다. 어쩌다 오는 딸도 바쁘다고 함께 하지 않았으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부터 큰딸은 엄마와 무엇이든 함께 하는 것을 좋아했다. 아이가 조금 자라자 나는 '나'를 찾느라 돌아다녔고, 동생과 아빠는 매우 내성적인 성향이라서 집안이 늘 조용했다. 다정다감하고 이야기를 좋아하는 큰딸은 고독하고, 외롭고, 힘든, 중고등학교 시절을 지냈던 것 같다.
큰아이가 생후 5개월 되었을 무렵, 나는 직장에 복직을 했다. 양가 부모님께서는 아이를 돌봐주실 수 없었고, 남편도 다른 도시에서 근무했다. 다행히 휴직기간에 옆 동 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다. 아침 7시경 출근해야 했던 나는 새벽마다 잠이 덜 깬 아이를 이불에 싸서 옆 동에 데려다주고 출근을 했다. 아이를 사랑으로 돌봐주셔서 감사했다. 그러던 중 딸아이가 생후 23개월 되었을 때, 아이를 돌봐주시던 분에게 다른 이유가 생겨서 더 이상 나의 딸을 돌볼 수 없게 되었다.
그 시절은 대부분 유치원이 2시 정도에 끝났다. 종일 유치원에 남아있는 아이들은 고작 두 세명 정도였다. 바뀐 환경이 두려운 아이는 아침마다 내 손을 잡고 놓지 않으려 하며 울었다. 유치원으로부터 계속 들려오는 아이 울음소리를 골목 어귀에 서서 들으면서, 아이가 울음을 그치기 바라며 나도 한동안 울고 서 있었다. 저녁에 데리러 가면 아이는 종일 울어서 쉬고 지친 목소리로 엄마를 부르며 땀에 젖어서 나에게 달려왔다.
"아이가 아주 똑똑한데 사회성은 제로네요. 더 이상 보기 힘들 것 같아요."라고 유치원 원장님이 말씀하셨다.
나의 아이가 사회성이 제로라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화도 났다. 내가 잘못 선택한 최초의 작은 유치원은 지인의 여동생이 운영했고, 무엇보다 직장 바로 앞이었기에 안심되는 마음으로 선택했었다. 열흘만에 겨우 23개월 아이에게 사회성이 제로라고 말하는 그 원장은 어린아이들을 맡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을 탓하기에는 아이를 돌보지 못하는 나 자신이 한탄스러웠다.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지만, 그다음 날 또 출근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단 하루도 더 이상 그곳에 보내고 싶지 않았다. 곧바로 지쳐 잠든 아이를 안고 택시를 탔다. 수소문하여 알게 된 체험 중심 유치원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착잡한 심정이었다. 힘든 육아 정책, 혼자 육아를 책임져야 하는 상황들, 어릴 때 엄마 따라간다고 울었던 나, 날마다 엄마랑 헤어지기 싫다고 우는 나의 딸, 너무 안쓰러운 나의 딸을 내일 어디에 맡겨야 한단 말인가를 생각하며 참담했다.
아이를 데리고 두 번째 유치원에 갔을 때, 상담을 하는 사이 아이는 잠에서 깨어 유치원 마당에 있는 모래를 만지고 놀았다. 아이가 처음 유치원에 오면 일주일 간은 선생님이 밀착 보호를 해 주신다고 하셨다. 정말 신기하게도 일주일 만에 아이는 웃으면서 유치원 셔틀버스를 탔다. 매일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래를 묻혀 왔다. 호주머니를 뒤집어 보면 거기에도 모래가 있었다. 매년 모래를 한 트럭씩 유치원 놀이터에 붓는다고 했다. 원장님이 직접 아이들의 관찰 일기를 써 주셨다.
그 당시 체험 위주 유치원은 손꼽을 정도였다. 유치원 마당에서, 또는 들로 산으로 늘 아이들을 데리고 체험을 다니는 그곳에서 아이는 잘 지내주었다. 환경에 대한 교육을 직접 체험하게 했고, 전주천의 생물과 전주 근교의 산에 사는 생물 관찰과 교육에도 힘썼다. 게다가 다행스럽게도 맞벌이 부부가 많아서 유치원에 종일 있는 아이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실내 교육 위주의 유치원, 즉 한글이나 영어, 악기 등을 가르치는 곳이 부모님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그러나 나는 아이의 유치원이 최고였다. 아이의 행복이 곧 나의 행복이었다.
아이의 두 번째이자 마지막 유치원이었던 그곳은 무엇보다 셔틀버스 아저씨가 최고였다. 아이를 데리러 유치원에 갈 때면, 깡마른 아저씨에게 "포청천 아찌! 그네 밀어주세요. 포청천 아찌! 축구해요." 하면서 두 팔에 매달리는 모습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중국 송나라 판관 포청천은 기골이 장대한 모습으로 당시 드라마로 나왔던 것 같다. 포청천이 무엇이든 잘 해결하고, 힘이 세다고 생각해서 아이들이 붙인 별명이었다. '포청천 아찌'는 나의 둘째 딸을 그곳에 보냈을 때도,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난 지금도 유치원의 셔틀버스를 운행하시면서 언제나 한결같이 웃는 얼굴로 대하셨다. 큰딸은 23개월 이후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그곳을 다녔다. 바로 어제 아파트 입구에서 우연히 유치원 셔틀버스를 보고, 운전 중 창문을 내려 손을 흔들었다. 아저씨도 차를 멈추시고 웃으면서 이제 성인이 된 우리 아이들의 안부를 물으셨다. 아이들의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신다.
대학에 가면 엄마와 놀아주지 않는다는 다른 집과 달리 나의 딸은 가족을 첫 번째라고 여긴다. 우리 가족 중 나와 큰딸은 성격이 맞는 부분이 많다. 딸과 함께 한 여행지는 여러 나라다. 마지막 여행지는 코로나 사태가 있기 전 필리핀의 보홀 섬이었다. 몇 해 전 딸이 친구와 다녀온 후 엄마와 꼭 다시 가 보고 싶다고 해서 다녀오게 되었다. 올해 8월 1일 오스트리아를 가기로 했는데 이번 코로나 19 사태로 가지 못했다.
나의 큰 딸은 지난 어버이날 선물로 두툼한 용돈 봉투와 '특별한 노트'를 준비했다. 아직 그 '특별한 노트'는 받지 못했다. 덜 채워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걸 쓰면서 본인이 눈물이 많이 났다고 한다. 엄마에게 쓰는 편지 노트라고 했다. 언제 받을지 나도 울 것 같다. 우리 딸 정말 이제 다 컸다.
수험생 부모님께 드리는 중요 꿀팁
혹시 글을 읽으시는 수험생 부모님 중, 수능날 어떤 음식이 좋을지 고민하시는 분들께 한 가지 팁을 드리고자 한다. 서울대에 진학한 학생이 있다. 한 달 전부터 매일 점심을 같은 메뉴로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다. 본인의 아이들은 타 도시에 있었기에 도시락을 그리 싸 줄 수가 없었다. 이도 저도 안된다면 아이들에게 익숙한 반찬이 최고가 될 것이라 여긴다.
교육심리에서 보면 시험장에 익숙한 경우 시험을 더 잘 치른다고 한다. 아마도 그래서 홈그라운드에서 경기를 하면 선수들이 더 잘하는지도 모른다. 그러니, 하루 전에 수험장에 꼭 가서 어느 교실 어디쯤에서 보게 될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