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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Nov 11. 2020

모녀의 서울 여행

경복궁 옆 과일빙수

큰 딸이 일본 유학을 간 사이, 서울에 올라 둘째 딸과 지낸 적이 있다. 아무 곳도 가지 않고 집과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우리는 조용히 커피를 마시거나 집에서 쉬기도 하면서 지냈다. 그렇지만 큰딸의 부재가 아주 커다랗게 느껴지는 서울행이 되곤 했다.


큰딸은 내가 서울을 간다고 하면 자신의 계획을 모두 미루고 '모녀의 서울 트래블'을 여행사 기획자처럼 짜서 어떤 안이 좋은지 먼저 문자로 보냈다. 예를 들면 금요일 밤에 올라갔다가 일요일 아침에 내려오는 계획안은 다음과 같다. 이런 경우 2일 차에 여러 가지 방안을 제시했다.


1안

1일 차   엄마와 고터에서 만남

            00 맛집에서 저녁 후 고터 옷집 구경


2일 차  홍대 중심

           아침은 간단히 00으로 식사

           점심은 00 맛집

             점심 식사 후 홍대 주변 탐방

             저녁 식사 00 맛집

             홍대 앞 야간 버스킹 구경/ 대신 홍대 주변 소극장 뮤지컬 감상

             라이브 카페에서 엄마가 좋아하는 와인 한잔

2안

 2일 차  삼청동 중심

            아침은 간단히 00으로 식사

            점심은 00 맛집

               점심 식사 후 미술관 관람

               저녁 식사 00 맛집

               뮤지컬 감상

3안

   2일 차 동대문 DDP중심

            점심은 00 맛집

            점심 식사 후 옷집 구경/DDP 구경

            저녁 식사 00 맛집

            영화감상


사실 나의 딸이 보내주는 계획안은 위의 내용보다 더욱 디테일했다. 딸아이는 상당히 꼼꼼하고 자상한 성격이다. 주요 테마 중심의 맛집을 미리 탐색한 후 계획안을 만들었다. 미술관과 뮤지컬은 우리 둘 다 좋아하는 것이니, 종종 계획안에 넣고 표를 항상 미리 예매해 두었다. 나는 영화를 좋아하기는 했지만 서울까지 가서 봐야 할까 싶어서 항상 망설였는데, 딸은 꼭 엄마와 보고 싶어 했다. 나는 촌놈이 서울 구경 나선 사람처럼 명동이나 고속버스터미널 즐비한 옷집들과 동대문 돌아보기를 아주 좋아했다. 동대문의 다양한 패션디자인이 마음에 들었다. 큰딸은 기본적으로 필요한 옷만 구입하는 성격이다. 그런데도 엄마를 위해 배려했다. 아이들이 터전을 옮긴 후는 KTX를 주로 이용해서, 고속터미널의 옷집 구경을 접었는데 아울러서 동대문도 잘 가지 않게 되었다.


2011년 어느 무덥던 여름날, 딸과 나는 경복궁역에 내려서 돌담길을 따라 무한 걷는 중이었다. 서울 갈 때면 항상 운동화를 잘 신고 가야 한다. 걷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여기 갔다가 저기 갔다가 매일 바빴다. 다른 날은 에너지가 넘치고 딸과 즐겁게 다녔지만 그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대학원 과제는 산더미이고, 놀아도 뒤통수가 당기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너무 더워서 땀이 주르륵 흐르는 상황이었다. 무럭무럭 올라오는 짜증을 참으면서 우리 얼마나 더 걸어야 하는지 물었다. 조금만 가면 된다면서 그 집이 분위기도 괜찮고, 티라미수와 과일빙수가 특별하다고 했다. 어차피 되돌아 갈 힘도 없었고, 꾹 참고 힘을 내어 걸었다.

풀 죽은 나의 딸, 엄마가 미안해

카페 '고*'은 깨끗하고 아담했다. 지금은 개성 있고 아기자기하거나, 모던하면서 고급스러운 카페들이 한집 걸러 있지만 그 시절은 카페 붐이 막 일기 시작했다. 그곳은 젊은이들에게 숨겨진 핫 플레이스였다. 딸아이는 내가 인테리어에도 관심이 많은 것을 알기에 분위기 좋은 맛집이라 생각해서 엄마와 꼭 함께 다시 오고 싶었다고 했다. 그런 말까지 했는데, 심기가 불편했던 나는 티라미수 말고 빙수만 하나 주문하라고 했다. 가격이 어마 무시하다고 생각했다. 주변은 모두 젊은이들이었다.  < 젊은이들은 '부모님들 등골 브래이커'라더니, 이렇게 비싼 것을 잘 들도 먹는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모양도 예쁘고 맛은 달콤하고 부드러웠다. 딸이 용돈을 허투루 쓰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딸에게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나의 딸은 엄마 눈치를 살폈다. 우리는 그렇게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딸은 다른 곳을 가거나 다음 음식을 주문하려면 여러 차례 묻고는 했다.


나는 왜 그렇게 못된 엄마였을까. 시간이 지나 5살 터울의 둘째를 서울에 보내고 용돈을 보내다 보니, 그제야 나의 큰딸이 용돈을 얼마나 아껴서 썼는지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용돈을 나누어 평소 관리비, 겨울에는 난방비까지 냈던 것이다. 나의 대학시절을 되돌아보면, 나 역시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썼던 기억이 났다. 밥 가격보다 세배 혹은 네 배 비싼 커피를 마셨고, 커피 가격보다 비싼 유화물감을 샀다. 나 역시  '부모님 등골 브래이커'였다.


글을 쓰면서 딸에게 전화해서 그때 경복궁 옆 과일빙수집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확실히 그 카페 이름을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 사라진 집이라고 한다. 요즘 북촌과 더불어 서촌도 임대료가 올라서 기존 가게들이 문을 닫은 집들이 있는 것 같다. 딸의 대답이 흥미롭다.


"엄마, 서울 와? 서울 오면 나한테 말해. 말 안 하고 오면 섭섭해."라고 대답하더니, "아! 엄마 글 쓰는 중이구나." 하고 혼자 다 말한다. 내가 아주 가끔은 미리 말하지 않고 서울 가서 볼일을 보고, 조용히 내려오거나 오기 직전에 말한 적이 있다. 내가 나의 엄마에게 해 드렸던 것보다 훨씬 다정하게 마음 쓴 나의 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한다.



<집 이야기>

https://brunch.co.kr/brunchbook/madang



<먹고, 자고, 입는 것에 관한 이야기>

https://brunch.co.kr/brunchbook/be-h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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