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개를 숙일 수밖에
3년 동안 매 해 한 달씩 인도에 다녀오는 나의 남편이자 당신의 아들에게 "아이고, 제 녀석이 돈을 번다고 실컷 돌아다니네. 내가 참 마음이 좋다. "이렇게 말씀하실 때만 빼면 대체적으로 공평하시고 정의 로우시다. 참고로 나도 '돈'을 벌지만 나는 아이들 키우느라 그렇게 장기간 '홀로' 여행을 '감히' 감행하지 못해 왔다.
나의 어머니는 드라마보다는 정치에 관심 있으시고, 일찍이 조정래 소설 '태백산맥' 전권을 섭렵하셨으며, 그 밖에 많은 작가들의 작품을 다수 읽으셨다. 집안이 어려우셔서 딸이기에 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해야 하셨을 때, 들판을 온종일 돌아다니며 서글피 우셨다고 하셨다. 중학교 이후 고등 교육을 받은 적이 없으시지만 박사 아들과 교수 딸을 두었으며, 다른 두 명도 각자의 자리에서 잘 살아가니 참으로 행복하신 분이시다.
오늘 시댁에 들려 문갑 위를 보니 책 세 권이 놓여 있다. 대학 도서관에서 빌렸다고 한다. 그중 한 권에 눈길이 머문다. 파스칼의 '빵세(예전에 팡세로 번역되었었는데)' 란 책이다. 고등학교 때 몇 자 읽다가 포기했던 책인데 세로줄로 작은 글씨로 되어 있는 책을 나의 시어머님은 잘도 읽으신다.
책 세 권에서 나는 그만 어머니께 고개 숙였다. 빵세라니. 추석에 재미난 책 몇 권 더 들고 가야겠다.
위 글은 2014년 8월에 나의 블로그에 올린 글이다. 현재까지 남편은 10년 동안 7회의 인도 여행을 지속적으로 다녔는데, 한번 가면 한 달가량씩 지내다 왔다. 유랑자의 피를 진하게 물려받았나 보다. 나도 전에 친구들 열명과 인도에 열흘 다녀왔는데, 인상이 아주 강렬했다. 기껏 스페인 17박 18일이 내가 간 가장 긴 여행이었다. 늘 여행을 꿈꾸었지만 아이 둘을 키웠다. 이제 나는 거의 해탈의 경지에 이르렀고, 스스로 여러 작업을 하면서 아주 잘 놀고 있다.
올해로 88세이신 나의 시어머님께 코로나로 어찌 지내시냐고 여쭤보니, 아무 데도 가시지 않고 책만 빌려서 읽거나 마당에 키우는 꽃들을 돌보거나 김장 배추가 어찌 되어가나 살피신다고 하신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늘 긍정의 말씀을 하신다. 그래도 연세가 드시긴 하신 듯하다. 예전에는 혼자 잘 지내셨는데 지금은 우리가 가면 얼굴이 활짝 피시면서 좋아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