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론다로
꿈을 그리는 사람은 그 꿈을 닮아간다.
나는 여전히 꿈이 많고, 꿈을 그리며 오늘을 살고 있다. 때로는 아이 같은 나의 마음이 상처를 받고, 내가 속한 사회에서 이질적인 인간이 된 느낌이 든다. 그럴 때면 여행을 떠나고 싶어 진다. 진짜 이방인이 되고 싶어서...... 이 세계의 이데아로부터의 탈출구로서.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어제 도착한 책들 <스페인은 맛있다>, <스페인 타파스 사파리>를 기웃거린다. 오래전 여행한 스페인의 기억들로 나의 마음이 다시 달뜬다. 이탈리아의 요리사로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신 <브런치> 이웃 작가님의 글들 또한 이탈리아 여행을 새록새록 떠 올리게 해, 마음은 벌써 세계여행 중이다. 나의 버킷 리스트 중에는 '론다에서 한 달 살기'가 있다. 언젠가 다시 론다로 갈 날이 오겠지. 꿈을 이룰 그날을 위해 스페인어 공부를 시작했다.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그라나다도 아닌 스페인의 그 넓은 곳 중 하필 론다로 가고 싶냐고 사람들이 묻는다. 왜 일까?
이러저러한 이유들로 새벽부터 여행을 떠나고픈 마음 간절하니 도저히 집에 붙어 있을 수가 없어서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엄청난 폭우를 뚫고 시내에 있는 카페에 왔다. 지하에 차를 주차할 수 있어서 주차가 좋은 곳이며 가구점을 겸하고 있어 구경거리가 있다. 노트북이랑 아이패드랑 책들을 바리바리 싸들고 계단을 오른다.
너무 일찍 와서 커피숍은 오픈 전이다. 가구들을 구경하고, 빵 굽는 제빵사 분들도 구경한다. 빵 냄새가 너무 좋아 배를 움켜쥐고, 커피 주문이 되어 가까스로 커피를 마신다. 빵은 아직 30-40분을 더 기다려야 한다는데, 욕망을 채우기 전의 기다림의 욕구가 극에 달하고 있다. 빵내음 실컷 즐기기, 그게 지금 나에게 행복감을 준다. 한 모금의 커피와 함께. 그렇게 있노라니 드디어 빵이 진열되었다고 성실한 카페 알바님이 구석의 내 자리까지 오셔서 말해준다. 입맛을 다시면서 구경하고, 고르고, 이런 행위 자체가 기쁨이다.
론다
우리는 토요일에 론다에서 말라가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부랴부랴 터미널로 향했다. 우리 일행 넷은 버스 시간을 잘못 알고 너무 이른 시간에 터미널에 도착했다. 주말 시간표가 달랐는데 미리 체크 해 두었던 것은 주중 시간표로 우리가 착각을 했기 때문이다. 휑뎅그레하니 텅 빈 버스터미널의 매표소에는 여직원이 딱 한 분 계셨다.
"출발 버스는 언제 오나요? "라고 영어로 질문했다.
"꾸아뜨로.”라고 여직원이 답했다.
"몇 시라고요?"라고 영어로 다시 질문했다.
"꾸아뜨로!"라고 큰 목소리로 눈을 더 크게 뜨고 그녀가 응답했다.
'꾸아뜨로가 대체 뭐지?' 우리 일행은 결국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당시에는 와이파이가 안 되면 검색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J는 결국 그곳에 붙어 있던 배차 시간을 다시 꼼꼼히 체크하더니 거의 한 시간이 넘게 기다려야 한다면서 근처의 카페에서 잠시 쉬자고 했다. 18일간의 스페인 배낭여행에서 우리 넷은 암묵적으로 각자 자신의 역할이 있었다. 길 찾기 검색은 주로 K의 아들 J가, 두꺼운 여행 가이드 북을 들고 다니거나 현지인들에게 길을 물어보는 것은 P가, 돈 관리는 K가 했다. 나는 주로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사진을 찍는 일을 담당했다. 그래서 각자 역할을 할 때 다른 사람들이 끼어들지 않도록 주의했다. 바다로 가야 하는데 산으로 가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고 서로 기분이 상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나는 ‘꾸아뜨로' 가 뭔지 신경을 아예 쓰지 않았다. 그로부터 아주 많은 시간이 흐른 뒤 스페인어 공부를 하다 보니 '꾸아뜨로(cuatro)'는 숫자 '4'를 뜻하는 것이었다. 겨울인 데다 부슬부슬 비가 내렸지만 우리들은 짐들을 질질 끌고 터미널 주변의 카페에 들어섰다. 나는 본래 핫 초코는 질색이었다. 그런데 약간 춥기도 한 데다가 카페에 메인 음료처럼 크게 사진이 벽에 붙어 있던 핫초코가 아주 맛있게 보여 주문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 맛본 것과는 완전히 달랐다. 너무 크리미 한 것이 느끼한 데다가 물을 섞어 먹어야 하나 싶을 만큼 지나치게 되직했다. 우리들은 거기에 따뜻한 물을 부어서 저어 마셨다.
"이렇게 하니 좀 낫다. 그치?" 하고 P가 말했다.
"근데, 지금도 느끼하고 맛이 이상해!"라고 내가 말하면서 유심히 주변 사람들을 보니, 어떤 사람은 추로스를 찍어 먹고 있었다. 여하튼 그것은 우리가 아는 핫초코가 아니었다.
"아니, 무슨 곁들여서 찍어 먹는 것이 이렇게 대왕 큰 잔에 나온다니. 근데 이거 정말이지 느끼 그 자체다. 근데 정말 웃긴다. 우리들!'
배차 시간 잘못 알아 당황했던 J도, 기다려야 되는 상황이 조금은 불편했던 우리들도, 잘못 마신 핫초코 덕에 함께 하하호호 웃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카페가 '핫쵸코' 아니 ' 초콜라테'로 꽤 알려진 곳이었다.
스페인 젊은이들은 금요일을 꼴딱 밤새워 놀고 나면 초콜라테리아(초콜라테 음료 가게 ) 또는 추레리아(추로스 가게)로 몰려간다. 해장을 하기 위해서다. 초콜라테라고 하니 코코아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우유에 달콤한 코코아 가루를 솔솔 뿌려서 단숨에 들이키는 코코아. 하지만 스페인의 초콜라테는 초콜릿수프에 가깝다. 한 숟가락을 뜨면 초콜릿이 시럽처럼 떨어진다. 이런 걸쭉한 초콜릿스프를 해장하려고 마신다는 상상만으로도 이미 속이 울렁울렁하다. - <스페인은 맛있다> 중에서
금요일에 거의 날을 새다시피 실컷 놀고 온 젊은이들의 해장 또는 어른들의 일상 간식으로 애용된다는 '초콜라테'는 우리에겐 무척 낯선 음료였지만 이방인인 우리들에게 '초콜라테'는 충분히 그 역할을 다 했다.
론다를 생각할 때면 "꾸아뜨로!” 라고 대답하면서 눈을 크게 뜨고, 무척이나 답답해하던 그 여직원의 얼굴이 동시에 떠 오른다. 다시 론다에 가면 아직도 그 직원분이 그곳에 있을까. 이번엔 그분과 좀 더 긴 대화를 나눠 볼 수 있지 않을까.
엄청나게 비가 내려서 호우경보까지 갔지만 전주는 다행스럽게도 피해가 적었다. 비 온 다음날. 그나마 하늘이 조금 개인 모습이다. 여기저기서 복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집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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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자고, 입는 것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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