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히 Ernst Ludwig Kirchner /두 개의 자화상 Double Self Portrait /1914
갈 수 없는 어떤 길
“어머니, 상래는 남다르니 꼭 그림을 시키세요.” 초등학생이던 때부터 학년이 올라가며 빠짐없이 듣던 말이었다. 고등학생이 되었을 때 내 진로는 오직 하나로 정해져 있었다. 예술가, 그러니까 정확하게 화가.
어른들은 내게 다른 세계로 향하는 길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그들은 지금의 나보다 훨씬 어렸다. 그들 역시 자신들의 세계를 정확히 알면서 가고 있진 못했을 거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 청춘의 첫 번째 고비는 고2 때 찾아왔다. 서양화가 아닌 디자인으로 진로를 변경했다. 먹고사는 길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가난한 예술가를 면할 수 없다고 했다.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던 시절, 대입도 마찬가지였다. 차선으로 선택한 대학 생활은 캠퍼스의 여유 같은 것과는 사뭇 거리가 있었다. 순수미술과는 다른, 버라이어티 한 영상디자인과에 들어와 느닷없이 영화감독을 꿈꿔야 했다. 밤새 작업실에서 거장들의 영화를 수십 번씩 보며 분석하거나(프랑스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끌로드 를류수의 남과 여 등), 코카콜라 광고를 만들겠다고 라텍스로 몸통과 눈알을 만들어 뜨거운 물에 삶고, 식으면 색을 입히며 시간을 보냈다. 애니메이션 만드는 일은 정말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밤을 새워가며 했다. 한 번은 지인의 커피숍을 빌려 단편영화 촬영을 하다가 천장에 불이 붙어 뉴스에 나올뻔한 일도 있었다. 필름을 뒤집어 끼워 촬영한 탓에 영사기에서 나오는 알 수 없는 점들을 보며 망연자실하던 때도 있었다. ‘청춘이란 원래 일이 안돼야 되는 것인가.’
아이디어를 생산하는 공장처럼 뇌는 늘 풀가동 상태여야 했다. 지구에 존재하는 영상물과 음악을 어느 만큼은 알게 된 시절이기도 했지만, 마음은 늘 순수미술에 있었다. 느릿하게 사고하는 내게 반복적으로 그림을 찍어낼 에너지가 없어 재수할 용기도 내지 못했다.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남자 동기들은 주로 편집 쪽이나 카메라맨, CF 감독, 3D 디자이너가 되었고, 여자 동기들은 제각각 달랐는데 나는 웹디자이너가 되었다. 대학을 졸업하고는 사실 좀 편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인생이란 것이 어디 쉽게 살게 해 주던가. 주 6일, 잦은 밤샘 근무, 원치 않는 회식, 강남에서 수원까지 택시로 집에 들어오는 일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들어갔다 여전히 어두운 새벽에 집을 나서곤 했다.
고등학생이던 때부터 좋지 않던 장이 자주 문제를 일으켰다. 일을 잘하면 할수록 내 일 이외에 다른 일이 넘어왔다. 업무가 끝나 퇴근이라도 하려면 의사를 묻지 않는 회식 자리가 생기곤 했다. 나는 그런 자리가 내키지 않았다. 특히, 술 취한 다른 부서 상사가 머리에 넥타이를 두르고 테이블 위에서 춤추는 걸 보는 것도, 함께 블루스를 추자고 억지로 끌어내는 상황 모두가 사회초년생인 나에겐 넘기 힘든 산 같았다. 그나마 직장생활을 버틸 수 있었던 건 동료들의 끈끈한 전우애 덕분이었다.
나는 자주 택시를 타고 집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런 일이 있고 나면, 한동안은 그 상사에게 단단히 찍혀 되도록 눈에 띄지 말아야 했다. 잔소리는 늘 같았다. “조금 더 일찍 와라. 당신만 멀리 사는 거 아니다. 회식 자리엔 꼭 참석해라. 왜 그렇게 분위기를 못 맞추냐.” 스트레스가 극에 달해 무엇이든 먹기만 하면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비워내곤 했다.
스물여섯. 원치 않는 세계에서 도망갈 계획을 세워야 했다. 결혼은 도피처가 될 수 없었고, 불현듯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꿈같은 것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일상의 세계, 꿈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의 세계, 그 어느 곳에도 제대로 발붙이지 못한 나는 이방인이었다. 어느 길 위에도 서지 못하고 공중부양인 채로 허공을 맴돌며 사는 이방인.
프랑스행은 막연한 동경에서 비롯되었다. 시절마다 나를 사로잡은 영화 역시 프랑스 영화였다. 집에선 혼자 떠나는 일이 허락될 리 없었다. 스스로 결단하지 않으면 만들어진 틀을 깰 수 없을 것만 같던 시절. 직장에 다니며 떠날 경비를 마련했다. 강남에 있는 유학원을 통해 어학연수받을 학교를 찾고 입학 허가증을 받아 들고서야 부모님께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다.
보헤미안이 되고 싶던 나
자유의 시작은 낭시에서였다. 파리에서 남쪽으로 두 시간 반가량 기차를 타고 가면 만날 수 있는 도시, 모든 것이 가성비 좋은 대학의 도시 낭시. 그곳에서 6개월가량 살았다.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던 것은 내 방 창문과 생전 처음 보는 길을 찾아 걷는 것이었다. 벽 전체를 차지하는 커다란 투명 창. 어스름한 새벽, 나는 창문 앞에 서서 골목 가득한 새벽 냄새를 맡곤 했다. 늦게 잠든 날도 새벽 공기가 나를 깨웠다. 커다란 창문 너머로 보이는 보랏빛 새벽의 그림들이 나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르코의 ‘퍼펙트 월드’ 노래를 배경 삼기에 딱 맞는 시간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보헤미안의 삶이었다. 처음에는 유학원을 통해 함께 온 사람들과 은행 업무나 학교 가는 길 등을 같이 익혀 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도움을 받거나 도와주는 일이 늘면서 특정 누구와 사귄다거나 하는 뜬금없는 소문들로 그사이에 함께 있는 것이 불편해졌다. 소란스러운 활기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고 싶어 어울림보다는 혼자 있기를 택했다.
나는 처음 보는 길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거나 영상 촬영을 하며 시간 보내는 일이 즐거웠다. 밤에는 혼자 맥주나 와인을 마셨다. 그리곤 캔버스가 아닌 스프링이 달린 검은색의 작고 두꺼운 도화지에 그림을 그렸다. 아는 이들의 얼굴을 크레파스로 채워갈 때마다 공허함이나 외로움이 같은 것이 사라지는 듯했다. 보헤미안을 자처했어도 모든 것이 불확실한 시절의 밤은 어딘지 구멍 뚫린 검은 도화지 같았다. 그 구멍을 아는 이들의 얼굴로 메우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의 나는 예술가가 되고 싶었고, 나 자신이 되고 싶었다.
골목골목 더 갈 곳이 없을 즈음, 나는 파리로 이사를 했다. 파리에서도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다. 집을 세 놓은 사람에게 집세를 떼이거나 국가보조금을 가로 차이는 등의 이유 때문이었다. 나는 몽마르트르가 있는 18구의 작은 스튜디오, 라데팡스의 음악인 기숙사, 파리 외곽의 ‘몽수리 공원’ 근처의 한적한 동네로 옮겨 다니며 살았다. 파리로 와서는 한인 민박집, 한인이 운영하는 어학원, 한불 문화협회 등의 홈페이지를 만들어주면서 부족한 생활비와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상과 현실 사이의 공간은 메우기가 힘들었다. 에펠탑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곳에 살 수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오래도록 걸으며 매일 하늘을 보는 일은 꼭 그곳이 아니어도 가능했으니 괜찮았다. 급한 일이 아니면 지하철보다는 버스를 타거나 걷는 날이 많았다. 아침 일찍 나가, 밤늦도록 목적 없이 걷는 날도 있었다. 어떤 날엔 한낮의 벤치에서 한 줌의 햇살을 안고 장 자크 상페의 ‘라울 따뷔랭’ 같은 책을 읽고 있으면 그러고 있는 내가 진짜 나 같았다. ‘비로소 보헤미안이 되었구나’
그제야 내게 주어진 시간을 만끽할 수 있었다. 도통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던 내가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아 그 시간을 정지시켜 두고 싶었다.
솔기(옷이나 이부자리 따위를 지을 때 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
“언니, 언제 와? 나 12월 24일에 결혼해.” 스물여덟, 꽃다운 나이에 둘째 동생이 결혼했다. 그러면서 스물아홉 나의 유학 생활은 막을 내렸다. 파리에서는 아르바이트해도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 한국에서 주기적으로 정해진 금액을 송금받아야 했다. 딸 셋이 공부하고 있던 때라부모님으로서는 부담이 컸을 때다. 갈 때는 그렇게 매몰차게 떠나놓고 올 때는 순순히 돌아왔다. 어쩌면 조금은 부모님 생각을 하게 되었거나, 혼자인 것이 외롭다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시작하고는 끝내지 못한 시간이 그곳에 남았다.
나는 다시 웹디자이너가 되었다. 문래동, A 시티 빌딩 17층. 직장에서 해가 가장 잘 드는 방에 디자인팀장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다. 내 책상 바로 옆엔 전체가 투명한 창문이 들어와 있었다. 내게 선물은 이런 것.
나는 틈날 때마다 창문을 투과해 들어오는 햇살을 커다란 숨으로 들이마시곤 했다. 두 눈을 꼭 감고 있으면 마치 한낮의 파리 벤치에서처럼, 장 자크 상페 아저씨의 책을 읽을 때처럼, 그렇게 진짜 내가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았다. ‘이건 내가 아는 그 햇살이구나.’ 그 시간만큼은 보헤미안이 될 수 있었다. 사각형의 공간 안에서 나는 아주 작은 자유의 흔적이라도 찾으려고 했다.
지나고 보니 청춘은 옷의 솔기 같이 느껴진다. 모든 것이 따로 떨어져 있지 않고 시작되는 곳에서 끝이 나기도 하고 끝나는 곳에서 시작하기도 하는 옷의 솔기. 맞닿아 있어서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지만, 더러는 떨어진 곳이 흉하게 구멍 나버리는, 마음에 들지 않는 어떤 부분만 떼어 내려고 하면 도무지 모양새가 나지 않는, 또 마음에 드는 한 조각만 가지고는 별 의미가 없어져 버리는 청춘이 꼭 그런 것만 같다. 완전한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온전히 도달하지 못한 어떤 아련한 흔적만을 남긴 것이 나의 청춘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나는 여전히 정확하게 청춘이 무엇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다만, 사막 한가운데 신기루처럼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어떤 곳을 찾으려고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던 시절이었던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