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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20. 2022

중년(中年)의 집

이중섭/ 물고기와 노는 세 어린이/ 1950

외계인과 지구인     


  나는 마흔여섯의 지금이 참 좋다. 단 하나,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삐걱대는 몸만 빼곤. 하지만 그 덕분에 여러 운동을 해볼 수 있고 건강검진도 자주 하게 되니 딱히 나쁜 점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이제 더는 치열하게 살지 않는다. 감각적인 웹디자이너로도, 그렇다고 꿈꾸던 영화감독으로도 살지 않는다. 뭔가 제대로 해낸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왜 지금이 참 좋을까 생각해보면, ‘미스터 선샤인’(개인적인 드라마 취향)의 고애신과 유진초이처럼 독립투사로 만났어도 연인이었을 남편과 그런 우리와 잘 맞는 아이가 곁에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나는 늘 나를 여자로 보단 사람으로 먼저 인식하는 사람과 만나고 싶었다. 그런 사람과 동지의 마음으로 사랑하며 살아가고 싶었다. 그러면 나는 그가 무엇을 하든 믿고 함께 갈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서른한 살의 나는 상사의 부당한 대우를 참지 못해 할 말은 꼭 해야 했고, 동료 이상 감정선이 생기지 않는 사람과 나를 다리 놓아주려는 상황이 생기면 웃으면서 넘기기보단 민망할 정도로 선을 긋는 사람이었다. 지금 같으면 ‘허허’ 하고 넘길 수 있을 것 같은 일들이 그때는 잘 안됐다. 그런 날 선 나, 그대로를 인정해준 사람이 있었기에 비로소 내게도 안정이 찾아왔다. 혼자 보헤미안이 될 필요가 없어졌다. 어떤 대화든 함께 나눌 수 있고 같이 걷는 곳 어디든 여행지로 만들어주는 사람을 만났기에 모든 길을 함께 갈 수 있게 됐다. 한낮의 햇살 한 줌을 굳이 찾아다니지 않아도 된다. 나이로는 나보다 네 살 아래인 남편은 우리 아빠보다 더 속 깊을 때가 있고 나보다 현명할 때가 많은 사람이다.


  남편과는 3년 연애를 하고 서른넷에 결혼했다. 군인 같이 각이 잡혀 있는 신랑과 언제나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내가 그렇게 잘 맞을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달라서 서로 끌렸을 테고 그래서 많이 싸웠을 텐데 지금에 와서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외계인 같은 나와 두 발을 땅에 딛고 있는 지구인인 남편의 궁합이 꽤 괜찮아 보인다. 안드로메다로 돌아가지 않게 나를 지구에 붙들어 준 남편에게 늘 감사한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다. “나를 구제해 줘서 고마워.”


  아이를 출산한 건, 결혼하고 다음 해였다. 처음엔 맞벌이였고 남편이 바빠지고부터는 회사를 그만두고 아이를 키우며 프리랜서 웹디자이너로 지냈다. 그러는 사이 누가 집안일을 더 하고 덜 하는 거로 따지며 싸우는 날이 잦았다. 인생을 돌이켜 봤을 때, 그래도 나는 다양한 경험을 했고, 또 내 고집대로 살아본 시절이 있으니 사회초년생인 남편에게 기회를 더 주자고 생각했다. 출근과 퇴근이 아리송하던 내 청춘의 고단한 시절을 남편은 서른에 시작했다.


  아이와 보내는 시간이 나는 즐거웠다. 배부르게 모유를 먹은 아이는 ‘아기 체육관(발로 차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장난감)’ 아래에서 놀다가 머리를 좌우로 흔들며 순하게 잠이 들곤 했다. 그러면 나는 그 시간에 집 청소를 하거나 육아 관련 서적을 뒤적이거나 프랑스어 자격증 공부를 했다. 아이가 두세 시간씩 자고 일어나면 모유를 먹여 한참을 가슴에 안고 책을 읽어주기도 했다. 그런 아이가 걷고 뛰기 시작할 무렵, 쫑알거리며 말을 하기 시작할 때부터는 아기 띠로 안고 미술관, 박물관, 도서관을 두루 다녔다. 필요한 예술적 자극을 그런 방법으로 수혈받았다. 엄마와 아이가 분리되지 않으면서도 가능한 방법으로.


  남편은 과거에 내가 했던 출퇴근을 반복했다. 남편의 빈자리는 주로 아이와 시간을 보내며 메워갔다. 나를 ‘엄마’라고 부르며 철석같이 믿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싱그러운 웃음을 보내는 아이를 보며 나는 조금씩 지구인으로 정착해갔다. 내게 한없이 온기를 내어 주는 아이에게 집중하다 보니 이 생명에 대한 무한 책임 같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가정, 소박해서 위대한 것     


  나는 운이 좋아 나와 맞는 사람을 만났고 억세게 운이 좋아 건강하고 순한 아이와 연이 닿았다. 가정이란 것이 생기면서 소박한 것이 위대하다는 느낌을 알아간다. 경제적으로 마이너스에서 시작한 남편을 만났지만, 특별히 가난에 허덕이거나 하진 않았다. 서로 노력하면 불편한 부분들은 살면서 편리하게 바꿀 수 있었다. 하지만 집이란 큰 산은 우리 힘으로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사람 하나 괜찮은 거로 결혼을 시킨 부모님은 살 곳이 마땅치 않은 우리에게 전셋집으로 작은 오피스텔을 마련해 주셨다. “살면서 조금씩 갚아가면 되니까 서두르지 마라. 너희는 우리 때 보다 나으니 함께 벌면 금방 일어날 거야.”


  오피스텔 주인이 자살했다. 그가 우리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아이가 크면서 아파트로 이사하는 게 어떨까 생각하던 차였다. 아빠 명의로 계약된 전셋집의 전세권 우선순위가 1순위에서 마지막으로 밀렸다. 그게 화근이 되었다. 집주인은 하이원을 드나들며 가진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우리가 사는 7층짜리 오피스텔 건물은 경매로 넘어갔다. 전세금 반환 청구 소송으로 법원을 내 집 드나들 듯하던 시절이 지나고 우리 손에 쥐어진 돈은 고작 이천 칠백만 원이었다. 그간 둘이 열심히 부었던 보험과 적금을 깨서 새 아파트를 분양받는 방법 말고는 다른 수가 없었다. 그때 가장 고마웠던 건 신랑의 침착한 태도와 아빠의 침묵이었다. “사업하다가 실패하는 사람들도 있잖아. 우린 그보다는 나으니까 다시 시작해보자.”


  가정이 생기면서 나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어려운 부분들을 남편과 함께 해결해 나가는 일이 대단하게 느껴지곤 한다. 그래서 어느 땐, 남편이 위대한 파일럿 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 허공 중에 떠다니는 외계인인 나를 안전하게 태워 비행에 동참시켜 주니 말이다. 나는 안드로메다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는데 이따금 남편은 내 별로 돌아갈까 봐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낼 때가 있다. “남편, 걱정은 벨트로 꽉 붙들어 매. 난 지구인이 좋아.”


우리들의 풍경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단단한 울타리가 있다. 은행에 빚을 지고 있긴 하지만 두 다리 뻗고 잘 수 있는 집이 있다. 집 안에 누구도 크게 아픈 사람이 없다. 어느덧 남편은 직장에서 성실한 직원, 스마트한 직원으로 좋은 평가를 받게 되었고, 경영대학원도 지원받을 수 있게 되었다. 열두 살이 된 아이는 마술사가 되겠다며 카드로 다양한 마술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은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은 것인지 여전히 엄마 옆에 앉아 끝없이 수다 떠는 일로도 시간을 보낸다. 그리고 고유림, 고유찬 두 마리의 러시안 블루가 함께 살고 있다. 고양이를 키우는 일에 대해선 4년을 고민하다가 각각 전주와 천안에서 올해 입양해왔다. 생후 6개월 때 온 유림인 너무 예민하고 말라서 걱정했었고 생후 7개월에 데려온 유찬인 습식사료만 먹은 것인지 도통 건식 사료를 씹지 못해 먹은 걸 토하곤 했다. 제대로 씹는 데 3개월이 걸렸다. 두 녀석의 덩치는 이제 서로 비슷해 뒤태만으론 구별이 힘들다. 둘 다 잘 크고 있는 셈이다.


  나는 특출 난 예술가이기보다는 지역에서 소소하게 문화·예술에 관련된 일을 하면서 살고 있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 문턱을 낮추는 일에 초점을 맞춰 전시해설을 하거나, 어떤 때는 예술 강사로, 우리 아이 또래 학생들이 기억하기 쉽게 작품 설명을 해주기도 한다. 작은 도서관에서 프랑스 아동 미술 강의 요청이 들어오면 이중언어 노출과 미술을 접목하기도 한다. 어떤 사이의 시간엔 동네에 있는 뉴스거리들을 찾아 지역 온라인 신문사에 기고하기도 한다. 남편이 출근하고 아이가 등교하면 잠잠히 앉아 책을 읽거나 글을 쓰면서 소소하게 작가로 살아가려고도 한다. 최근엔 그림 에세이를 위한 목차를 엮고 있기도 하다.


  중년이 된 나는 몸이 아픈 것만 아니면 만사가 오케이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진다고 일기예보가 뜨면 몸살이 나버리고 그래서 한동안 아무것도 손에 잡을 수 없는 그런 일만 빼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날인 바로 지금을 살아갈 수 있다. 여전히 꿈이 있지만, 그 꿈이란 게 청춘의 시절처럼 금방 터져버릴 풍선 같은 게 아니라 좋다. 땅과 맞닿아 있는 한옥에서 지붕과 담벼락 위로 능소화를 드리우고 우리만의 정자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잔 내려 마시면서 함께 글을 쓰고 그림도 그리면서 그렇게 소박하고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길 꿈꾼다.


  언제부터였을까? 머리만 대면 잠을 자는 통에 나를 빼고 두 남자만 극장에 다녀오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나는 좋다. 아이 어릴 때, 남편이 너무 바빠,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시간을 지금 쓰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특별한 일 없이도 늘 피곤해 잠이 오는 나는 그 시간에 잠을 잘 수 있어 좋고, 피곤하지 않은 날엔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니 셋이 함께인 날은 또 그런대로 좋다.


  청춘의 시절엔 중년이 되면 모든 것이 시들해져 버려 재미없을 줄만 알았다. 반대로, 상상하던 것들이 모두 이루어지는 줄 알았다. 지금 내 자리에서 보는 중년은 어떤 상황에서든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게 되고 또 즐겁게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는 시절인 것 같다. 불만을 품기보다는 주어진 일에 감사한 마음이 커서 남들 눈에는 나사가 한두 개쯤 빠진 사람처럼 보일지도 모르는 게 나의 중년이 아닌가 싶다. “당신 덕에 내가 이 행성에서 제대로 정착해 살고 있는 셈이야. 지구인!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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