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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20. 2022

노년의 한옥(feat. 아무튼 상상)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해바라기/1888년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두 남자

     

  “여보, 우리 왔어. 우리 안 보고 싶었어?” “엄마, 보고 싶었어. 자 이거 봐봐. 엄마 주려고 사 온 거야.” 세계 일주를 마치고 배낭여행에서 돌아온 두 남자가 내 앞에 서 있다. 이십 대 중반 아이의 손엔 엄마 선물로 미리 꺼내 둔 작은 수첩이 들려 있다. 오스트리아 클림트 미술관 벨베데레 궁전에서 산 노트라고 했다. 노트의 그림은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와 마지막 여름을 보냈던 아터제 호수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이는 성인이 되어서도 엄마인 내 취향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여행 다닐 때마다 각 나라의 예쁜 노트를 사던 습관이 아이에게도 그대로 대물림되어 있었다.


  “지난번 마지막 통화 때 말라가에 있더니 어디를 마지막으로 찍고 온 거야? 엄청 탔는데?” 안 그래도 까만 피부가 흑연처럼 돼서 돌아온 두 남자를 보며 조금은 부러운 듯 말을 꺼냈다. “우리 신혼여행으로 갔던 말라가의 호텔이 그대로 있더라? 거기서 이틀 자고 바로 네르하로 넘어갔지. 당신과 같이 갔던 코스를 아들과 함께 가니까 감회가 남다르던데?” 남편은 둘만 다녀온 여행이 미안했는지 신혼여행 이야기를 슬쩍 꺼냈다. “엄마, 아빠랑 와인도 마셨는데 내가 사진 찍은 거 보여줄게. 자 봐봐. 엄마, 아빠도 여기서 빠에야랑 와인 마셨다면서? 아빠는 내가 엄만 줄 아나 봐. 아주 그냥 자꾸 신혼여행 때 얘기만 해.”


  이제는 가족이 한집에 있다. 그간 있었던 여행 얘기를 들으며 나는 또 이들을 주제로 어떤 글을 써볼까 궁리를 하고 있다. 사실, 두 남자가 없는 반년 동안 나는 할 일이 참 많았다. 새벽 공기를 좋아하는 탓에 일찍 일어나 예멘 모카 마타리의 원두를 갈아 두고, 마당 한쪽에 우리 먹을 만큼만 심어둔 텃밭에서 방울토마토와 가지, 바질을 가지고 들어와 프라이팬에 볶아 올리브 오일과 발사믹을 곁들여 미리 갈아 둔 커피와 함께 아침을 해결하곤 했다. 이따금 여행 중인 남편과 아들이 생각날 때면 그가 평소에 좋아하던 하와이안 코나를 내려 남편의 작업실에 들어가 서성이곤 했다. 그가 오밀조밀하게 깎아 만든 나무 소품들을 만지작거리며 우리의 지나온 시간을 되짚어 보기도 했다. “이렇게 섬세하고 예술적인 사람이 어떻게 한 회사에 그렇게나 오랫동안 몸담고 있었을까? 아무튼, 대견해.”


  내일은 고흐 이야기로 미술사 강의가 잡혀 있다. 아침마다 내려 마시는 예맨 모카 마타리를 조금씩 덜어 강의장에 가져가 수강생들에게 나눠줄 생각이다. 이 커피는 고흐가 좋아하던 커피로 강의 때 함께 음미하며 수업을 진행하면 이야기에 더욱 풍미가 오르곤 해서 자주 구비해 두는 커피 중 하나다.


  15년 전, 남편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었다. “신랑, 나는 차근히 준비해서 오십부터는 진짜 좋아하는 일을 할 거야. 아이도 어느 정도 컸을 때고 당신도 자리 잡았을 테니까 그땐 내가 정말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거 같아. 내가 돈 많이 벌어서 우리 두 남자 배낭여행 보내줄게. 딱 기다려.”


  보통 남편이 정년이 되면 부인도 함께 정년을 맞이한다고들 한다. 하지만 난 조금 다른 생각으로 삶을 살아간다. 인생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75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화가가 된 모지스 할머니나, 현대 미술계에서 가장 핫했던 86세 최고령 할머니 작가 로즈 와일리처럼, 83세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95세까지 활발하게 활동했던 김두엽 할머니처럼 나도 인생이 언제일지 모르게 사라질 때까지 나 자신을 재미있게 다루며 살고 싶은 바람이 있다. 늘 깨어 있는 할머니로 살고 싶은 소망 같은 게 아주 어릴 적부터 있었다.


  “넌 왜 부자만 보내? 어이구 답답아, 너도 같이 가든가 아님. 네가 가야지.” 주변에선 여전히 내 걱정을 해주는 친구들이 몇 있다. 엄마가 늘 하던 얘기가 있다. “상래야, 측은지심의 마음으로 살면 세상에 화 날 일 하나 없다. 조금 더 가진 사람이 양보하면서 사는 거야.” 남편의 나이 쉰다섯, 난 올해로 쉰아홉이다. 물론 배낭여행을 함께 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말이다 나는 좀 다른 생각이다. 젊은 시절, 함께 고생한 것은 맞다. 하지만 직장생활을 누구보다 잘 아는 나로선 25년을 한결같이 한 회사에 다니며 일하고 공부하느라 꿈도 취미도 가질 기회가 없던 그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다. 아빠도 30년을 넘게 한 회사에 있다가 정년퇴직을 하셨다. 은퇴 이후의 삶을 가까이서 봐 온 나로선 남편이 인내한 시간을 완벽하게 쓰게 해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뭐, 나의 개똥철학? 같은 거다.     


진짜 우리 집, 한옥에서     


  “여보, 나 내일 강의가 있어. 여행 다녀와서 피곤할 텐데 당신이 책방 문 좀 열어줘.” “오케이. 내일은 내가 문 열어두고 그간 여행에서 찍은 사진 정리 좀 하고 있을게.” 글 쓰는 일을 업으로 삼고 싶어 했던 사람은 정작 남편이었다. 손편지를 써주던 다정한 법대생의 글솜씨가 좋아서, 어쩌면 나는 그런 모습을 평생 보게 될 것만 같아 결혼을 결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예이츠의 ‘하늘의 융단’이라는 시를 한지로 된 편지지에 또박또박 적어 줬던 날을 기억한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읽고 또 읽으며 내내 눈물범벅이 되기도 했는데 말이다. 살아오는 동안 그 융단을 깔아주기 위해 노력했던 것을 나는 안다. 가난하여 오직 꿈만을 가졌던 청춘의 남편이 푸르고 침침하고 검은 융단을 내 발밑에 깔아 줬기에 외계인 같던 내가 그 시절을 사뿐히 걸으며 지나온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지구인인 그의 꿈을 찾아 줄 때다.


  우리 집은 동네에서 지대가 조금 높은 곳에 있다. 창이 크고 종일 해가 잘 드는 집을 선호했던 나는 그런 집을 찾은 셈이다. 집 뒤로 조금만 걸어가면 낮은 산이 하나 있고 차를 타고 10분 정도 가면 바다도 나온다. 세월을 안은 진한 고동색의 한옥 오른쪽 끝에 작은 정자가 딸린, 땅과 맞닿아 있는 진짜 우리 집이다. 은행에 진 빚 같은 건 이제 없다. 우리 부부가 함께 운영하는 2층짜리 북스테이가 한옥의 오른편에 있고 한옥의 왼편엔 남편의 나무 공방이 있다. 나는 주로 북스테이 1층에서 글을 쓰거나 강의 준비를 한다. 남편은 주로 나무 공방에서 작은 도마를 만들거나 집에 필요한 가구들을 손수 만드느라 점심 이후엔 얼굴을 잘 비추지 않는다. 이따금 “우리 산책이나 다녀올까?” 물으면 손에 묻은 나뭇결의 흔적들을 대강 털어버리고 손깍지를 낀다. 젊을 땐 그렇게 깔끔한 체를 하던 사람이 이제는 제법 자연인이 되어 함께 있는 시간이 훨씬 더 편하게 느껴진다.


  우리가 운영하는 북스테이는 취향대로 가져다 놓은 미술 관련 책들이 마른 꽃들과 함께 납작 엎드려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린다. 지나던 길에 들르거나, 인터넷 검색을 통해 찾아온 손님들이 주로 조용히 이곳에 머물다 간다. 풍광이 마음에 든다며 며칠씩 머물며 글을 쓰다 가는 작가도 더러 있다. 머무는 손님마다, 통창 너머로 한옥의 마당과 반대편으로 보이는 낮은 담벼락의 능소화가 너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조용히 내어놓고 돌아가곤 한다.


  젊은 시절, 우리가 채 피우지 못한 꿈을 대신한 능소화가 담벼락과 한옥의 지붕 위에 가득 드리우길 원했다.      


아주심기 (온상에서 기른 모종을 밭에 내어다 제대로 심는 일)     


  내가 집에 관해 관심이 많은 건 나름의 이유가 있어서다. 대학 시절의 남편은 1년 남짓 고시원에 살았다. 그곳은 어깨를 좁게 움츠려야 한 사람이 겨우 잘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유학 생활 내내 한 집에 정착할 수 없었다. 집세를 사기 맞거나 국가보조금을 가로 차이는 등 정착할 수 없는 상황이 늘 나를 허공 중에 떠 있게 만들곤 했다. 결혼하고는 전세자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고, 살던 집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어느 순간부터 집에 대한 불안감을 안고 살았다.


  어린 시절의 집은 늘 가족의 온기로 데워지곤 했다. 집도 우리와 함께 살아있다고 느껴서인지 디귿자 하늘이 보이던 아담한 집의 체온을 되찾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한껏 품어주던 곳. 나를 품고 우리를 품어줄 집이 필요했는지도 모르겠다.


  ‘많은 것들을 사랑하라. 왜냐하면, 그곳에 진실의 힘이 깃들기 때문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더 많은 일들을 성취하고 훨씬 더 많은 일들을 이룰 수 있다. 그래서 사랑으로 이뤄진 것은 잘 되게 마련이다.’ 엄마가 늘 해주던 이야기가 빈센트 반 고흐의 이 문장들과도 닿아 있는 것 같다. 그 시절의 방식으로 한껏 사랑했기에 이제는 떠돌지 않고, 어디에도 진 빚 없이, 원하면 언제든 땅을 밟으며 우리가 원하는 일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 쓰고 깎고 만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그렇게 무언가 우리만의 결실이 만들어질 때까지 이곳에서 아주심어 뿌리를 내리려 한다. 노년의 완전한 시간을 남편과 함께 만끽하려 한다. 제 짝을 찾을 아이와도 얼만큼의 시간은 이곳에서 함께 보내려고 한다. “남편, 그동안 참 많이 애썼어.” “사랑하는 아들아, 엄마를 이만큼 크게 해 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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