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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20. 2022

어린 시절의 집

모네/노르망디의 거리

마루에서의 추억     


  좁은 골목길의 첫 번째 파란 대문 집. ‘삐그덕’ 대문을 열고 마당에 들어서면 오른쪽에 우리 집 대문과 같은 색을 입은 백구의 집이 있었다. 백구의 집은 대문을 칠하고 남은 페인트로 그 지붕 색을 입혀 우리 집과 한 세트처럼 보였다. 백구는 그런 집을 꼬리가 떨어져라, 들락거리곤 했다. 나는 없는 자기만의 방을 가졌다고 자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백구는 5년쯤 우리와 함께 살다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이틀 후, 아빠가 꽂아준 링거를 맞고도 회복하지 못해 할머니 곁으로 떠났다. 우리 가족은 할머니를 잃을 때만큼 눈물을 흘렸다. 아니, 어쩌면 마루에 앉아 그보다 더 ‘꺼이꺼이’ 울었는지도 모른다. “강아지는 두 번 다시 키우지 않을 거야.”

  동생들과 하염없이 앉아 울던 마루. 밟을 때마다 삐걱대던 짙은 붉은빛을 띤 낡은 마루를 엄마는 하루에도 몇 번씩 윤을 내가며 세심한 손길로 길들이셨다. 마루뿐 아니었다. 그 옛날, 할머니가 시집오실 때 가지고 오셨던 문갑이며 나무로 된 거무튀튀하고 커다란 뒤주와 밤중에 할머니에게 꼭 필요한 국화꽃 그림의 도자 요강도 귀히 여겨 닦고 또 닦으셨다. 그 시절, 모든 것엔 엄마의 보이지 않는 노고가 숨어 있었다.

  마루에서의 추억은 한낮의 엄마와 함께 시작한다. 우린 경단이나 백설기, 도넛을 만들어 먹었다. 엄마가 “우리 경단이나 만들어 먹을까?” 하면, 딸 셋이 쪼르르 마루로 나와, 두 손바닥 사이에 찹쌀 반죽을 조금씩 떼어 내, 한입 크기의 동그라미로 빚어냈다. 그러면 엄마는 카스텔라를 노란색과 갈색으로 구분해, 채 쳐 쟁반에 흩뿌리듯 담고, 그 위로 삶아온 찹쌀 경단을 굴리셨다. 절반은 만들면서 없어졌고, 나머지 절반은 아빠와 함께 먹을 요량으로, 한 김 식혀 갈색 찬합에 담아 두셨다. 나는 위, 아래 종이가 붙어 있던 갈색 빵가루가 입혀진 경단을 특히 좋아했다. ‘설탕의 약간 탄 맛이 느껴져서 좋았달까.’


  세상에 하나뿐인 백설기를 만들어 먹던 날도 우린 마루에 있었다. 아빠가 술 드시고 오신 날, 양손 무겁게 사 오셨던 ‘종합 선물세트’ 안에서 엄마 몫은 ‘사랑방 선물’이라는 알록달록한 알사탕이었다. 백설기 만들 때 필요한 이 알사탕은 파란색 양철통에 담겨 있었다. 양철통의 뚜껑은 꼭 참치캔처럼 따야 안에 있는 사탕을 꺼낼 수 있었다. 찹쌀가루 안에 색 배열 맞춰, 보석 박듯 사탕을 ‘콕콕’ 집어넣으면, 어디에도 없는 백설기가 만들어졌다. 엄마표 백설기는 설탕 없이도 단맛이 났다. 나만의 것을 찾고 싶어 하는 건 아마도 엄마가 내게 물려준 삶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가 싶다.

   여름철엔 주로 복숭아를 먹었다. 좁은 골목길을 빠져나가 큰 길가에 다다르면 보이는 만물상회엔 우리 주먹보다 큰 복숭아가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었다. 과일도 예쁘게 생긴 걸 먹어야 우리도 그리 큰다며 엄마는 그 많은 복숭아 중에 고르고 골라 가장 좋은 것으로 우리에게 내어 주셨다.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복숭아즙을 요리조리 핥아가며 여동생들과 나누던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도 그 시절의 마루에 남아 있다. 

  아빠와의 추억도 빠질 수 없다. 아빠는 술 드신 날이면, 만물상회 맞은편에 있는 가마솥 통닭집에서 튀김 닭을 사 오셨다. 그러면 온 가족이 총집합해 마루에 동그랗게 둘러앉아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로 시작하는 노래를 손에 손을 잡고 목청껏 불러야 했다. 늦은 밤, 파란 대문에서 ‘삐그덕’ 소리가 나면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동생들과 자는 척을 했다. 그 시절 아빠의 음성이 들리는 것만 같다. “우리 똥강아지들 전원 집합!”


  직장을 그만두고, 육아와 프리랜서 일을 병행하다 보니 그 마음이 헤아려져 눈물이 날 때가 있었다. 고단한 일과 후, 동료들과 한잔하며 밥벌이에 대한 시름을 이야기하다 보면 술잔 위로 딸들의 얼굴이 비쳤겠지. ‘딸 셋 대학 졸업할 때까지는 참고 다녀야지. 별수 있나.’ 

  튀김 닭 기다리며 가족을 떠올렸을 아빠. 자는 가족들 깨워서라도 자식들 얼굴 한 번 더 보고 싶던 아빠의 마음. 출근 전 면도한 수염이 까슬하게 올라온 밤, 아빠에겐 술 냄새가 났고, 우리 얼굴은 한참이나 쓰라렸다. 주말 아침, 남편의 까슬하게 올라온 수염을 ‘스윽’ 한번 만져보는 이유, 그래서일까. 이제는 아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은 야속하게도 반대로만 흘러간다. 반성은 어디까지나 지금의 마음, 그해 가을, 내겐 사춘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맨션에 대한 동경     


  1989년 열두 살의 가을, 나는 맨션을 동경하기 시작했다. 온기 가득한 마루는 시끄럽고 불편한 마루로 변해갔다. 친구가 사는 맨션은 쾌적한 현대인의 공간 같았고 우리 집은 과거에서 벗어나지 못한, 도시도 시골도 아닌 어정쩡한 공간처럼 느껴졌다. 그건 아마도 서점 하는 고모에게 선물 받은 ‘소년 소녀 세계명작 문고’ 보다 고학년 형이 있던 친구가 빌려준 ‘셜록 홈스’나 ‘아가사 크리스티’가 더욱 흥미롭다는 걸 알게 되면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맨션에 사는 친구들은 이런 책을 읽는구나!’ 

  집집이 형제처럼 붙어 있던 우리 동네는 골목을 지날 때마다 마주치는 동네 사람들과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서야 그 길을 지나칠 수 있었다. “얘, 너희 엄마는 남자아이 하나 더 안 낳는대? 네가 아들 노릇 해야겠구나. 요새도 그림을 그렇게 잘 그리니? 그런데 너는 왜 선머슴처럼 입고 다니니. 여자애가.” 

  유난히도 누군가와 마주치기 싫은 날, 빠끔히 대문을 열어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한 후, 전속력으로 달려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삐걱대는 파란 대문, 아빠랑 목청껏 부른 노래들로 골목 안의 모든 사람이 우리 집만 예의 주시하는 것 같았다. 다정했던 집이 구닥다리 공간으로 변해버리는 건 한순간이었다. 

  친구네 집은 대화가 별로 없다고 했고, 우리 집은 대화 좀 안 하면 참 좋겠구나 싶었다. 나는 동생들과 함께 방을 썼고, 친구는 자기만의 방이 있었다. 우리 집은 한없이 작고, 친구네 집은 세상에서 가장 쾌적하고 넓은 집 같이 느껴졌다. 

  우리 집은 늘 손볼 곳이 생겼다. 삐걱대는 대문은 아빠가 기름칠해도 그 소리가 며칠을 못 갔고, 때마다 벗겨진 대문을 페인트칠해야 했다. 보일러도 고장 나기 일쑤였고, 비가 많이 오는 날엔 처마 밑으로 빗물이 쏟아지는 탓에, 꼭 마루에 걸터앉아 우산을 접어야 비를 덜 맞을 수 있었다. 마루의 미닫이문을 닫고 있으면 ‘이러다가 집이 떠내려가는 건 아닌가?’ 걱정이 되기도 했다. “나는 이다음에 꼭 맨션에 살 거야.”     


아파트에 살면서     


  아이가 여섯 살 무렵, 그토록 원하던 맨션 대신(시대가 변해서), 아파트에 살기 시작했다. 각종 보험금과 적금을 깬 돈으로 운 좋게 청약에 당첨된 아파트는 관리비만 내면 집에 관한 한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다. 그야말로 우리만을 위해 준비된 도시인의 집 같았다. 앞집, 윗집에 누가 사는지도 모르는 채 서로 무관심한 환경이 30년 전 열두 살 사춘기 시절의 나를 달래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햇수를 거듭해 살다 보니 각 잡힌 공간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향수병 같은 것을 앓게 되었다. 네모난 상자 안에서 내다보는 바깥 풍경은 어딘지 모르게 갇혀있는 기분이 들곤 했다. 내가 사는 아파트 5층은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땅과 떨어져 붕 떠 있는 것만 같았다. 현관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마당이 있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와 또 1층 복도를 지나고 문 하나를 더 통과하고 나서야 땅과 만나게 되는 구조다. 집에 들어오면 다시 밖에 나가는 일은 잘 생각하지 않게 된다. 이건 마치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파리에서 한국을 가리키며 ‘여긴 너무 멀어 지금은 갈 수 없어’와 같은 심정이다.

  내가 한 시절을 보냈던 동네는 허물어졌다. 초등학교만 그대로 남고 좁은 골목길, 만물상회, 가마솥 통닭집 등은 모두 추억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사각형 틀 속에 나만 혼자 남아 그 시절을 떠올릴 뿐이다. 아이와 함께 살아갈수록, 삐걱대고 완벽하지 않던 그 시절의 집이 그리워지곤 한다. 빈틈없이 세련된 모습보다는 어딘지 조금 모자라 손볼 것이 생기는 집, 고치고 고치다 보면 그제야 우리를 닮아 숨을 쉬는 진짜 우리 집 말이다.

  땅과 맞닿아 있는 안정된 우리 집에서, 나는 그 시절의 엄마처럼 세심한 손길로 마루를 닦고, 동네 어귀에서 잘 익은 복숭아를 사다 우리 아이와 남편에게 내어 주면서 살고 싶다. 더러는, 아직 동네에 남아 사춘기를 겪고 있는 아이들에게 조금 귀찮은 관심을 주기도 하면서 말이다. “ㅇㅇ아, 들어와서 복숭아 하나 먹고 갈래?”

  아파트 창이 아무리 크고, 그곳에서 보이는 하늘이 넓다 해도 파란 대문 집만큼 나를 품어줄 순 없다. 엄마, 아빠가 만들어준 디귿자 하늘을 가진 집. 그야말로 구닥다리 낡은 집 마루에서 올려다본 그 하늘이 세상에서 가장 큰 하늘이었구나 싶다. 한 시절의 모든 것들은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저 새롭게 지금 내 가족들과 온기 있는 집을 만들어갈 뿐이다. 그 시절을 추억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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