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리크/죽어가는 아도니스
“그런 식의 작품 설명 재미있네. 그림을 신화 이야기로 풀어가는 방식. 그걸로 책을 구상해 봐.”
이번 어윈 올라프 전시해설을 하며 흥미롭게 보고 있는 거장의 작품들이 있다. 그중 하나가 핸드리크의 ‘죽어가는 아도니스’란 작품이다. 이 작품을 어윈 올라프의 '리클라이닝 누드 넘버 5'와 함께 이미지 대 이미지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우선 작품을 감상하기에 앞서 나는 그리스 신화 이야기를 했다.
아도니스는 나무에서 태어난 미소년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그 빼어난 외모에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그를 보자마자 첫눈에 반하게 된다. 아프로디테는 아도니스를 상자에 담아 죽음의 여왕인 페르세포네에게 간다. 아도니스를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잘 길러달라는 부탁을 하는데 상자를 열어본 페르세포네 역시 아도니스에게 반하고 만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죽음의 여왕 페르세포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니, 그것을 본 제우스가 중재를 하고 판결을 내린다. 1년의 3분의 1은 아프로디테와 살고 1년의 3분의 1은 페르세포네와 살고 나머지 3분의 1은 아도니스 자신의 삶을 살라는 판결이었다. 아름다운 미소년 아도니스가 행여라도 잘못될까 아프로디테는 사냥을 하되 가까이 가서 하지 말 것을 당부한다. 그러나 한창 사춘기에 혈기 왕성한 아도니스가 그 말을 들을 리가 없다. 사냥을 나갔다가 멧돼지를 가까이 대적하고 만다. 날카로운 멧돼지의 이빨은 아도니스의 숨통을 끊었고 그 소리를 들은 아프로디테는 파티 중에 한 손에는 넥타르를 들고 백조가 끄는 마차를 타고 달려왔다. 하지만 이미 아도니스의 숨통은 끊긴 후였고 그가 흘린 붉은 피에 아프로디테가 마시던 넥타르를 부었더니 바람에도 쉬이 떨어져 버리는 ‘아네모네’란 꽃이 피어났다.
헨드리크의 ‘죽어가는 아도니스’란 작품에는 이런 그리스 신화가 밑바탕이 되어야 제대로 그림을 들여다볼 수 있다. 나도 전시해설 할 때를 제하면 늘 관람자의 입장이 된다. 전시를 보고 나면 내 마음에 한두 점이라도 남겨 오고 싶어 유독 내 마음을 사로잡는 작품들을 유심히 보게 되는데 그럴 때 도슨트의 설명이 큰 역할을 한다. 사전 지식이나 역사적 배경이 없이 보는 그림은 나 대로의 방식으로 해석을 할 수 있어 좋은 점이 있긴 하다. 다만, 조금 더 깊숙한 내 보물주머니 속에 담고 싶은 마음이 들려면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어떤 빛나는 것을 찾아낼 필요가 있어진다.
나는 때마다 아이에게 어떤 역할을 준다. 아이도 가만 보면 엄마가 어떤 역할이라도 쥐여주길 바라고 있다. 내 주문은 이랬다.
“유한아, 엄마 이 그림 설명을 좀 길게 하려고 하는데 ‘아도니스’ 이야기 좀 찾아줄래?”
“오케이. 내가 찾아 줄게.”
그렇게 아이는 내가 주문한 어떤 미션을 수행하는 것을 즐거워하고 나를 돕고 있고 내 곁에서 무언가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즐거워한다.
지난번 송 선생님의 도슨팅 때 아이가 아도니스라는 제목을 보고는 지구 주위를 돌고 있는 유성이라는 얘길 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놀라곤 한다. 그리고 자주 우리 부부는 아이의 다양한 지식들을 도대체 어디에서 알게 된 것인지에 대해 궁금해 묻곤 한다.
“유한아 넌 그런 걸 어디에서 들은 거야?”
“내가 전에 보던 그리스 로마 신화 그 만화책 있잖아. 엄마가 사줬던 거. 거기에 나와 있었어.”
“그걸 다 기억해?”
“그거 되게 재미있었어.”
나는 아이가 여러 번 본 책들, 특히 만화책은 ‘땡땡’과 중국 고전과 인문고전을 제하고는 정리를 했는데 정리한 책들에서 나름 기억하고 있던 게 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아이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독서하는 습관을 만들어준 것뿐인데 가끔 나는 돈 한 푼 안 들이고 이만큼이나 잘 자라준 아이가 기특해서 눈물이 날 것만 같은 때가 있다. 이 도슨트로의 길도 아이로 인해 시작되었다. 매 전시마다 내 스크립트 준비를 돕고 밤에 잠자리에서는 동화책 대신 스크립트를 읽어주면 그걸 듣고 잠이 들었다. 도슨팅 40분을 몇 번이고 녹음할 때면 옆에서 내 동선이라든가 어떤 나도 모르게 반복해서 쓰는 내 어투를 발견하고 알려준다. 내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고는 하지만 어느 순간엔 아이가 나를 키우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아이가 크면 클수록 그런 생각이 더 든다.
엄마와 함께 성장하는 아이, 그것은 아이와 함께 성장하는 엄마로, 더 나아가 아이로 인해 성장하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는 셈이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친구들과 밖에서 뛰어놀기 힘들어진 상황, 게임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 친구들을 만나봐야 딱히 함께 할 얘기가 없어 늘 둘이 붙어 있는 우리 집에서 아이와 둘이 보내는 시간이 나는 참 안정적이고 좋은데 아이는 불만이 한가득이다. 예전엔 엄마가 잘 놀아줬는데 이젠 바쁘다는 핑계로 잘 놀아주지도 않고 키우고 싶은 고양이도 마음대로 들여올 수도 없는 상황이라 외로움에 눈물이 날 지경이라고 한다.
금요일, 오늘은 어떤 일도, 약속도 만들지 않고 아이와 온전히 시간을 보내리라. 글 한 꼭지를 쓰고 아침 일찍 요가 다녀오는 것을 제하고는 무조건 아이와 함께 하기로 했다. 내가 무엇으로 이리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할 수 있게 되었는지 잊으면 안 될 것이다. 내 삶의 동력에게 가장 듣고 싶은 말은 “엄마가 제일 웃겨. 제일 재미있어. 오늘 엄마 짱이었어.” 뭐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핸드릭 골치우스(Hendrick Goltzius)
[1558-1617]
네덜란드의 판화가, 소묘, 작가, 화가
아버지 밑에서 유리 채색을 공부했던 그는 어린 시절 손가락에 큰 화상을 입게 됩니다. 그런 손으로 그림을 그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겠죠. 손가락의 힘으로는 되지 않으니 팔 전체를 써서 그림을 그리게 되다 보니 그의 그림은 굉장히 힘찬 느낌을 줍니다.
제가 어쩌다 보니 느지막이 무언가를 시작해 빛을 보게 된 작가들을 참 좋아하는데요. 골치우스 역시 42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요. 저는 또 그런 부분들을 눈여겨봅니다.
늦은 때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