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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Mar 27. 2022

복직

빈센트 반 고흐

빈센트 반 고흐/ 타라스콩으로 가는 길의 자화상/  1888

“허허~ 김 과장 요새 잘 지내요? 유한이도 많이 큰 것 같은데 회사 다시 복직하는 건 어때요?”

“아. 사장님, 잘 지내시죠?”

“회사에 요즘 일이 많아요. 김 과장이 나와서 일을 좀 해줘야 할 것 같은데.”

“아. 유한이가 아직 어린데 일단 집에서 의논을 좀 해볼게요.”

“유한이 다섯 살이면 다 키웠네. 다시 일하러 나와요.”


그런 연유로 유한이 다섯 살, 다시 출산 전 회사에 복직했다. 생각해 보면 연봉부터 삐걱거리던걸 가까스로 참고 다녔다.


“아니, 애 키우다가 나왔는데 이 정도 연봉이면 많이 주는 거지.”

“저 쉬지 않고 계속 프리랜서 작업하고 있었는데요. 프로젝트 단가 고급으로 받고 일했어요.”

“그래도 우리 회사에서는 중간에 쉬다가 온 거니까 이 정도면 애 키우다 온 아줌마가 많이 받는 거지.”

“애 키우다 온 거 맞고 아줌마도 맞는데 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연봉을 사장님과 협의하고 싶은데요.”

“연봉 협상은 나하고 해야지.”

“사장님 연락받고 온 거라 제가 얘기해 볼게요.”


연봉은 사장님과 해결했다. 세상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존재한다. 출산 전에도 얼렁뚱땅 대충대충 스리슬쩍 술자리에만 역할을 톡톡히 하는 사람인 줄 알고 있었지만 정말 내 취향의 사람은 아니었다. 복직을 고민할 때도 대책 없이 일하는 상무와 엮이지 않기를 바랐다. 복직, 순전히 사장님만을 보고 결정한 사안이었다.


결혼하고 출산한 엄마는 아이를 잘 키우는 일에 칭찬받아 마땅한 게 아닐까? 애 키우다 온 아줌마가 그동안 쉬다 왔으면 감사할 일이지 연봉을 맞추고 있는 게 기가 찼던 모양이다. 도통 말이 잘 안 통하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첫날부터 아줌마 화나게스리 단어 남발을 하고 있었다.


밀린 업무들이 많았다. 당장 뽑아내야 하는 시안도 여럿 있었고 출장을 가는 건도 여럿 잡혀 있었다. 그간 어떻게 일을 진행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회사에 출근하면서는 시안 작업을 보내고 나면 꼭 그 업체에 가서 회의하고 오라는 거였다. 양재에서 종로, 정부청사로.

불필요한 회의로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집단들이 있다. 디자인 협의를 하러 갔는데 다른 소리만 하고 있다가 결국 잘 만들어달라. 예쁘게 해 달라는 얘길 끝으로 사무실로 돌아오곤 했다. 출장으로 숨통이 트이는 건 신입일 때나 가능한 일. 회사에 돌아오면 업무가 책상 먼지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곳은 ‘농진청’ 사업을 주로 하던 회사였다. 경기상상 캠퍼스가 있는 자리는 예전에 서울대학교 농과대가 있던 자리다. 그곳에서 박사학위까지 마친 사장님은 주로 한국과 중국 대학에 한우 관련 강연을 다니셨고 회사에 남아 있던 직원들은 ‘농진청’에 파견되거나 관련 업체와 협약을 맺어 일하고 있었다. 보수적인 집단과의 디자인 작업. 나름대로 예쁘게 뽑아내려고 노력했다.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세련되게 뽑아도 거기서 거기다. 다니던 회사였으니 안정적인 면을 보고 출퇴근을 했다. 상무의 잡다한 일(본인이 해야 할 PPT 작업)과 메일 업무까지 쏟아내는 바람에 속에서 부글부글 불꽃이 일렁이고 있었다.


냅다 기름을 부어버린 결정적 사건.

저녁 식사를 하고 올 테니 어느 업체에 보내야 할 PPT 작업을 다 끝마쳐 달라는 거였다. 회사는 거저 다니는 곳이 아니다. 돈을 벌기 위해 나갔으니 해야 할 일은 마땅히 한다. 허나, 나의 일이 아니었다. 본인 개인의 업무를 떠넘기고 나갔다. 내가 신데렐라인가, 콩쥐인가 싶던 그날 저녁.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들어와 PPT 작업이 마음에 안 든다고 고래 소리를 하는 바람에 그동안 참아 왔던 모든 설움이 복받쳐 올랐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박차고 나왔어야 했다. 바보처럼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퇴근 시간도 한참이나 지났는데 집에도 못 가고 내 업무도 아닌 걸 붙잡고 술 마시고 들어온 상무에게 욕을 먹고 앉아 있는 게 참 서러웠다. 인간 대 인간으로의 선을 넘었다.


당장 뛰쳐나오지 못했다. 눈물을 닦으며 PPT를 수정했다. 문을 나서며 다짐했다. 오늘이 마지막 퇴근이다. 출근하지 않으리라. 1년을 참았으면 잘 참았다. 그간 많은 일이 있었고 더 이상의 배려는 보태주고 싶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사장님께 연락해 퇴직 처리를 부탁했다. 저런 사람 어디에서 써주겠냐. 가장으로, 저렇게라도 살려고 아등바등거리니 안쓰러운 사람이다. 사람 하나 살리는 셈 치고 한 번만 봐주고 다시 나오라는 거다. 거기서 깨달았다. 아! 똑같은 사람이었구나. 누가 누구를 안쓰러워해야 하는가. 마음 넓은 내가 아량을 베풀어 다시 그를 살아가게 해야 하는가. IT 성격상 프로젝트가 시작되면 개발자들이 우르르 몰려왔다가 우르르 나가곤 했다. 프로젝트가 채 끝나기도 전에 퇴근하고 출근하지 않는 직원들이 많았다. 붉으락푸르락 큰 소란이 벌어진 적도 여럿 있었다. 그런 일들에 모두 눈 감았다. 나를 도인쯤으로 알았던 걸까?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는 게 맞다. 나는 그 절이 소름 끼치도록 싫어졌다.


사장님께 전화가 왔다. 상무와 엮이지 않게 할 테니 다시 나와달라는 거다.

상무에게 전화가 오고 카톡이 왔다. 왜 이러는 거냐고. 무슨 일이냐고.

그러게. 왜 그러셨을까. 인생 그렇게 살면 안 되는 걸 텐데.


일이 많이 남았으니 얼른 나와서 일을 처리하라고 했다. 나 때문에 다른 직원들이 일을 못하고 있다고. 기가 찼다. 전화든 문자든 카톡이든 가관이라 더 이상 연락을 하면 있었던 일을 고스란히 고발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연락이 없어졌다. 대신 다른 직원들에게 전화가 왔다.


“과장님, 이거 처리해야 하는데 어떻게 할까요?”

“아, 과장님 죄송해요. 제가 이번 건만 처리해드리고 더 이상 해드릴 수 없을 것 같아요.”

“오래 참으셨어요. 저도 전화드려 죄송해요.”

“남아 계신 분들께 죄송하고 그래요. 많이 힘드실 텐데...”

“아닙니다. 한 두해 겪는 일도 아닌데요.”


출산 휴가를 쓴 직원은 내가 유일했다. 출산 후 복직한 직원도 내가 유일했다. 그 감사한 마음으로, 고마운 마음을 담아 출근하던 길이 지옥 길로 바뀌었다. 버스에 앉아 머리를 유리창에 박아 가며 퇴근하던 것쯤은 참을 수 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으니까. 다만 인간이 인간다움을 벗어났을 땐 내 정신건강을 챙기는 게 우선이다. 돈은 또 벌 수 있다. 업무에 지장이 있을 거란 판단이 있었다면 책임감은 나보다 그들이 먼저 챙겼어야 했다. 내가 없어도 회사는 잘 돌아간다. 나도 그 회사 아니어도 잘 돌아갈 수 있는 인생이다. 그래서 거기까지만 했다. 복직 1년의 일들을 이렇게 담백하게 담아내다니. 기억은 역시 시간을 섞어 각색하면 좋은 추억까지는 아니어도 욕을 섞지 않고도 쓸만한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빈센트 반 고흐 Vincent Willem van Gogh

1853년 ~ 1890년

빈센트 반 고흐의 이 그림은 밝은 작품 중 하나예요.

고흐의 말동무가 되어주던 수다쟁이 우편배달부 롤랭이 곁에 있었기 때문이죠.

고흐가 고갱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인생의 행복을 더 이어갈 수 있지 않았을까요.

인생에 어떤 사람을 만나느냐는 참 중요합니다.

함께 있으면 긍정의 기운이 샘솟고 행복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을 곁에 두어야 해요. 남에게 악한 일을 행한 사람은 뿌렸던 나쁜 씨앗을 모두 거둬가게 될 것으로 압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일이라며 책망하며 견뎌서는 안 돼요.

좋은 사람들과 행복한 시간을 꾸리기에도 모자람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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