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시작해 본 모든 일들이 놀이같이 재미있다. 회사에 들어가 종일 앉아 있지 않아도 되고 많은 곳을 운전해 다닌다. 방과후 수업을 시작할 때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붙을 수 있을까? 마음 졸였다. 방황하느라 쌓인 모든 경험들이 나의 계획서에 녹여졌다. 도서관 강사 지원을 할 때에도 내가 마음에 드는 동화책을 찾아 그 내용을 읽고 미술활동과 접목시켰다. 남들 다 하는 그런 거 말고 내가 읽어서 좋았던 것, 우리 아이에게 읽어주었던 것, 아이가 좋아하던 책 위주로 계획서에 넣었다. 내 첫 강의는 미취학 아이들을 위한 독서연계 미술 수업이었고 그 수업으로 인해 여러 도서관에서 연락을 받고 10회차까지 수업을 하기도 했다.
성인 대상 강의도 해보고 싶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영역을 확인하길 바랐다. 아는 사서라곤 하나도 없이 그저 도서관에 일일이 전화해 담당 사서의 전화번호를 물으면서 도서관에 성인 대상 강사로 발을 들이기 시작했다. 강의는 공부해서 나누는 일이다. 가장 좋은 공부법을 찾은 셈이라 더욱 빠져들어 열심히 그 시간에 임했다. 그러는 사이 실버 대상 강의 제안도 있었다. 아파본 적 없는 아빠가 담도암 판정을 받고 한참이나 아산 병원을 오가는 가운데 어르신들을 만났다. 그분들이 가진 사연을 들으며 눈물이 났다. 가장 슬펐던 건 시한부 판정을 받은, 이제 일흔여섯이 된 아픈 아빠와 아흔에 가까운 분들을 만나는 일 자체였다. 길어야 1년이던 생명줄이 일주일로 선언되었던 때, 믿기지 않았다. 아흔에 가까운 어르신처럼 우리 아빠에게도 아흔이 와야 하는데 아빤 여든도 채우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 거라 슬픔이 파도 속에서부터 솟구치던 때였다.
잡혀 있던 스케줄을 미친 듯이 클리어해 나갔다. 아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급하게 떠나셨다. 요양원엔 죽어도 안 가겠다고 하더니 요양원 가기 하루 전에 잡고 있던 생명줄을 놓았다. 취소한 강의도 있었지만 남은 강의는 매일 2시간씩 자며 몸을 혹사시켜 마무리를 해나갔다. 그 시간들이 나를 성장시켰고 아빠를 잃은 슬픔에 온전히 침잠하지 않도록 했다. 지나고 나니 독한 시간이었다. 내가 그렇게나 정신력이 강한 인간이었나 싶고 어쩌면 잘 한일 같기도 하고 한편으론 아빠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아빠 장례식 날 비가 많이 내렸는데 나는 그 비만큼 울었을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만나며 그런 슬픔이 치유되었다. 맑고 깨끗한 아이들은 어른처럼 계산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내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내게 세상의 좋음을 배우게 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엔 늘 목이 아프고 몸이 고되기도 하지만 마음만은 치유받고 돌아올 수 있어 행복감이 들었다. 선생님이란 단어가 참 좋은 거라는 걸 깨달으며 돌아오곤 했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 내가 꼭 어떤 위치에 서고 어떤 목표를 이루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시작한 모든 일들이 그 안에서 즐겁고 나를 기분 좋게 만들어 내 좋은 기운을 나눌 수 있으면 그걸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큰 수익을 내는 일은 없으나 마음이 평온해지고 따뜻해진다면 그쪽으로 계속 발걸음을 옮기며 살고 싶다.
무엇을 남기며 살 것인가. 아빠가 떠나고 나서부터 늘 마음에 두고 있는 문장이다. 조금 더 가졌다 생각하고 나누면 마음이 편해진다. 엄마의 인생철학처럼 양보하고 나누고 베풀고 살면 내가 더 큰 것을 얻는 거라는 걸 이제야 조금씩 배워간다. 조금 손해 보더라도 나누며 살아야지. 책을 쓰는 일은 나를 남기는 일이다. 아이 방학 기간 동안 저 깊은 곳에서 내 안의 나를 만나 밖으로 꺼내볼 예정이다. 아이에게 그런 걸 남겨주고 싶다. 노년엔 열권 정도의 내가 쓴 책을 매일 같이 읽으며 지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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