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동준은 서예를 기반으로 글자가 그림이 되는 문자추상을 하는 작가입니다. 서예 신동으로 불렸고 한국 서예계의 차세대 리더로 손꼽히죠. 그는 화선지 대신 캔버스에, 먹 대신 아크릴 물감으로 글자가 그림이 되는 문자추상회화를 하고 있어요.
궁극적으로 나의 의식적인 ‘쓰는 행위’는 노자가 말한 무위(無爲)의 세계를 향하고자 한다.
‘쓰는 미학'의 최종 단계에 이르고자 하는 다층적인 태도이다.
불애 손동준(不涯 孫東俊)
불애 손동준의 조부가 서예학원을 운영한 덕에 한문과 서예를 자연스레 접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때 첫 번째 스승 창석 김창동 선생을 만난다. 그 후, 줄곧 서예장학생으로 주목받기 시작한다. 국내의 학생서예대전 중고등부에서 대상과 1등상을 15회 정도 수상했고, 군 입대후 모필병 생활, 한국 최초의 서예학과 입학, 중국 서예유학 등 인생 자체가 서예인의 숙명이나 마찬가지다.
한국에 처음 신설된 원광대학교 서예학과에 실기만점으로 입학한 손동준은 '물만난 물고기' 였다. 예술가 인생에서 가장 부유했던 시기를 꼽자면 서예공모전에서 받은 상금으로 모든 생활비를 해결하던 대학시절이었다고 한다. 대학 1학년 때, KBS와 국제서법연맹이 공동주최하고 한국서예계의 거봉이던 여초 김응현 선생이 주관한 '제 6회 KBS 전국휘호대회'에서 처음엔 1등상을 받았으나,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2등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이 대회는 서예계를 대표하는 가장 이름 있는 서예공모전이어서 대학교 1학년생이 서단에 입문한 것은 굉장한 뉴스거리였다.
대한민국미술대전 입상을 시작으로 제 1회 서울 서예대전 대상(2001), 월간서예대전 대상(2004), 제 1회 서예문화대전 대상(2005) 등에서 젊은 서예가의 열정을 불태웠다. 2005년 수상을 계기로 '작가주의 서예인'으로 접어 들었고 2006년 '돌 틈에 부는 바람'이라는 타이틀로 국내 첫 전각 유인전을 개최한다. 전각이 서예작품의 보조적인 수단을 넘어, 전각 자체의 작업과정은 물론 그 결과물이 작가의 메시지를 담은 독립적인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사례로 기록된다.
수화김환기가 그랬듯 손동준 역시 불혹이 되던 해 중국 유학 길에 오른다.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님과 가족을 뒤로 하고 유학길에 오르기까지 고민이 많았다. 유학중이던 그해 10월 어머님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손동준은 '중국정부 사법장학생 박사 1호'가 된다. 자신을 바라보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기에 뼈를 깎는 노력과 간절함이 그 밑거름이 된 것으로 보인다.
손동준 작가는 졸업하는 4년간 학비와 기숙사비 번액 면제는 물론 생활비까지 지원 받으며 학업에만 전념했다. 그의 지도교수였던 구양중석 선생은 중국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서예가이자 학자로도 유명하다. 서예 본고장에서 원로 대가의 '외국인 정부장학생 박사 1호 제자'라는 점은 작가 개인을 넘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을 것이다.
불애 손동준 작가는 중국 랴오닝성 핀진시 예술촌에 유일한 외국인 입주 작가다. 이 예술촌은 중국 전역에서 선발된 100여 명의 작가들에게 작업실과 아파트를 제공한다. 또한 전시장과 각종 문화관련 시설이 한 데 어우러진 3만 평 규모의 복합문화단지이다. '구양중석 교수와의 졸업사진'덕에 그의 작업실 겸 화랑은 랴오닝성을 대표하는 수많은 유명 인사들이 빼놓지 않고 찾는 명소가 되었다.
예술가의 삶이란
서예가 손동준은 서예 명문 중국수도사범대학 서법문화 연구소에서 구양중석(歐陽中石) 선생에게 사사한 ‘외국인 정부장학생 박사 1호 제자’다. 구양중석(歐陽中石) 선생은 중국 국민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서예가이자 학자이다. 그동안 서울과 베이징선양 등에서 개인전 22회 개최, 키아프, 화랑미술제 등 주요 아트페어 15회, 다수의 국내외 기획전에 참여했다.
작품들은 아제르바이잔대통령궁과 덴마크왕궁을 비롯해 여러 곳의 주요 미술관·기관·개인컬렉션 등에 소장되어있다. 현재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판진시(盘锦市) 예술촌의 유일한 외국인 입주 작가로 초대되어 활동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