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없는 사랑
말 없는 사랑
사랑은 어떻게 전해져야 할까. 누군가는 말을 건네고, 누군가는 눈빛으로 마음을 담는다. 또 누군가는 그 사랑을 붓으로 남긴다. 말이 닿지 않아도 되는 사이, 서로의 숨결만으로 충분했던 부부가 있었다. 김기창과 박래현. 이들은 예술 안에서 서로를 만나고, 그림으로 마음을 주고받으며, 조용하고도 깊은 사랑을 나누었다. 그들 그림에는 언제나 말 없는 사랑이 흐른다. 활짝 핀 두 송이 모란 앞에 나란히 선 두 마리 새처럼, 김기창과 박래현은 언제나 같은 곳을 향해 있었다. 한 방향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사람들, 말보다 마음이 앞섰던 사람들. 그 마음은 그림 속에서 오랫동안 머물렀다. 운보 김기창은 어릴 적 장티푸스를 앓은 후 청력을 잃었다. 고열에 시달릴 무렵 외할머니가 정성으로 달여 준 인삼을 먹고 귀는 더 멀어져 갔다. 그 인삼 한 첩은 평생을 바꿔놓았다. 그는 나중에 수필에 이렇게 썼다.
“보약이라고 해서 외할머니가 인삼을 달여온 것을 먹고 나의 병은 더욱 악화되었다. 열에 인삼이 나쁘다는 사실이라든지, 체질에 따라 받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다.”
그 인삼 한 첩은 애틋한 사랑이자, 평생을 바꿔놓은 안타까운 전환점이었다. 병과 함께 말하는 법도 잊어버렸지만, 그는 다시 천천히 입 모양을 따라 배우며 구화를 익혔다. 어눌했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그는 세상과 다시 연결되기 시작했다. 그가 손끝으로 말하는 방식은 자연스레 그림이 되었다. 소리가 닿지 않는 세상에서 그는 빛과 선, 형태와 색으로 세상과 인사를 나누었다. 말이 닿지 않아도 괜찮았다. 그림이 그의 언어가 되었으니까.
서로의 화폭 안에서
그의 곁에는 늘 박래현이 있었다. 그녀 역시 말보다는 손으로, 온몸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사람이었다. 일본 유학에서 다져진 기초 위에 한국적인 감성을 더한 그녀는, 동양화와 서양화, 판화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해 갔다. 그녀의 그림에는 단단하면서도 따스한 감정이 깃들어 있다. 그녀는, 가정과 예술 사이에서 누구보다 부지런히 하루하루를 쌓아 올렸다. 한 아이의 엄마로, 한 남자의 아내로, 그리고 무엇보다 예술가로서 그녀는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역할을 성실히 살아냈다. 아이를 재운 밤이면 조용히 작업실로 돌아갔고, 붓을 들었다. 김기창이 무거운 침묵 속에서 그림을 그릴 때, 박래현은 그림으로 그 침묵에 답했다. 말이 아닌, 손끝으로 건넨 조용하고 섬세한 응답이었다.
그들의 그림엔 다정한 사랑이 조용히 피어 있다. 활짝 핀 모란 앞에 목을 빼고 서 있는 두 마리의 새는, 마치 자식을 돌보는 부모의 모습 같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따뜻한 풍경이다. 김기창은 ‘모란도’ 속에 자식을 품에 안고 살아가는 부모의 마음, 한 가정을 이루어 나가는 부부의 다정한 시간을 담아낸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서로에게 깊이 몰입할 수 있었던 건, 오히려 말이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는 울고, 물감은 마르고, 붓은 바싹 말라붙은 날도 있었다. 그들은 붓을 놓지 않았다. 박래현은 아이가 잠든 밤이면 다시 캔버스 앞에 앉았고, 김기창은 조용히 아내의 등을 바라보았다. 각자의 자리에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그림을 통해 서로를 품었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말 대신 몸으로 쓰는 편지 같았다. 말보다 진한 언어였다. 때로는 슬픔이, 이따금 기쁨이 물감 속에 스며들었다. 김기창의 ‘모란도’ 속 두 마리의 새처럼, 그들은 서로를 화폭에 담아 평생을 나란히 걸었다. 벅찬 마음, 설명할 수 없는 감정, 꺼내지 않아도 아는 고요한 다정. 그림은 그 모든 것을 담는 언어였고, 고백이었다. 그들은 말하지 않아 서로에게 더 몰입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말하지 않아도 되는 사이. 그들은 말 없는 사랑의 언어로 서로를 이해했다. 어떤 말보다 명확한 이해, 어떤 설명보다 다정한 응시. 그들은 그걸 아는 사람들이었다.
마지막 붓질
삶은 언제나 꽃처럼 만개하지는 않는다. 박래현은 평생을 성실하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가정과 예술 사이에서 누구보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쌓아 올렸던 그녀는 무리한 일정과 과로, 그리고 오랜 스트레스로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1976년, 그녀는 향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마지막은 조용했고, 담담했다. 마치 화폭 위에 마지막 붓질을 천천히 얹는 듯한 순간이었다.
그의 그림 속 모란이 여전히 진하게 피어 있는 이유. 두 마리의 새가 여전히 나란히 서 있는 이유. 그건 아마도, 그의 화폭이 아직 그녀를 잊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살아 있는 이의 그리움은, 때로 그림이 되어 우리 앞에 다시 피어난다. 화려하진 않지만 단단하고, 말은 없지만 누구보다 명확했던 사랑. 진분홍빛 모란 가지 위에, 그들은 여전히 나란히 앉아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속삭인다. 사랑은, 꼭 말로만 해야 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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