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ui Xuan Phai 'Phat Loc alley' 1985
그 여름, 우리들의 낙원
부 샹 파이(Bùi Xuân Phái)의 '하노이 거리'를 보고 있으면, 몇년 전 겨울, 베트남의 호이안 여행이 떠오른다. 투박한 선으로 그린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그림 안에서 사람 냄새가 난다. 편안한 브라운 톤은 낡아서 오히려 따뜻하고, 오랜 시간을 견딘 벽들은 묘하게 정겨움을 준다. 그림을 오래 들여다보고 있자니, 아빠와 가족 모두가 함께했던 시간이 파도처럼 마음속으로 밀려온다.
그 여행은 우리 가족이 함께한 마지막 해외여행이었다. 세 자매와 남편들, 조카들, 그리고 엄마, 아빠까지.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있다는 것만으로도 든든하고 신이났다. 숙소 근처 다리 위에는 '에스카르고'처럼 커다란 달팽이들이 천천히 기어가고 있었다. 마치 이곳이 자기 나라라는 듯 느긋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이들은 만져 보기도 했지만 나는 어쩐지 개구리 보다 큰 달팽이를 보며 피해 다녔다. 아빠는 늘 서둘러야 마음이 놓이는 성격이셨지만, 그날만큼은 달팽이처럼 천천히 흐르는 시간을 즐기시는 것 같았다.
아빠가 서두르며 생긴 빈 틈을 엄마는 말없이 채우곤 했다. 아빠가 여행을 준비할 땐 다른 때보다 더 급해졌다. 그런 아빠는 아침이면 우리보다 먼저 눈을 뜨곤 했다. 언제나 맨 앞에서 길을 열어주는 사람은 아빠였다. 하얀 곰 모양의 커다란 튜브를 몸에 두르고 어린 조카들과 놀아주던 아빠는, 그 순간만큼은 누구보다 해맑은 아이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그저 아이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마음이 아니라,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잡고 싶었던 마음이었을 거다.
다낭, 바다 앞에서의 고요한 순간
여행 중 하루는 단체로 차량을 타고 근거리 다낭에 갔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차 안은 농담과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도착 후 우리는 해변 근처 카페에 앉아 각자 시원한 과일 주스를 주문했고, 아이들은 모래 위를 뛰어다니느라 바빴다. 파도는 잔잔했고, 햇살은 물 위에서 은빛으로 반짝였다.
“우리 자주 가족 여행 오자. 이런 게 행복이지, 인생 뭐 별거 있나?”
아빠가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귀에 남아 있다. 아빠의 눈가에 햇살이 반짝였다. 카페에서 바라본 바다는 행복이라는 이름을 가진 시절 같았다. 낙원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그 순간에 있는 거였다.
호이안, 비 오는 거리에서
하루는 여자들끼리만 우비를 입고 호이안 올드타운에 갔다. 그날은 비가 참 많이 내렸는데, 그래서 더 특별한 하루였다. 우리는 모두 막내 제부가 선물한 빨간색 팔찌를 맞춰 차고, 빗속에서 사진도 찍었다. 우비를 입고 한껏 웃던 그날의 사진. 가끔 휴대폰을 뒤적이다가 그 사진 앞에서 멈춘다. 그때의 웃음소리가 다시 들려오는 것 같아 한참을 들여다보곤 한다. 빗방울이 우비 위로 조용히 또르르 흘러내리던 그 순간, 슬리퍼 사이로 스며드는 차가운 물에 발가락이 젖을 때마다 엄마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남자들 두고 나와 자유로움에 취한 여자들의 그 환한 웃음이 아직도 선명하게 내 눈앞에 아른거린다.
또 한 번은 한참 어린 조카들을 돌보느라 늘 정신없던 막내가 그날만큼은 우리에게 아이들을 맡기고, 엄마와 단둘이 마사지를 받으러 갔었다. 돌아와서 밝게 웃던 막내의 얼굴에는 한결 여유가 묻어 있었다. 그날 저녁, 비가 그친 호이안의 골목에 달빛이 스며들던 모습까지도 잊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날이 참 좋았다.
그림 앞에서 다짐한 소중한 약속
부 샹 파이(Bùi Xuân Phái)의 '하노이 거리'는 단순하고 소박하지만 그래서 더 따뜻한 날들을 떠오르게 만들었다. 그림 속 오래된 벽을 바라보고 있으면, 아빠가 웃던 얼굴이 그곳에서 슬며시 나를 향해 미소 짓는 것 같다. 혜민 스님의 말처럼 '멈춰 서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아빠가 떠나고 나서야 그 멈춤이 왜 중요한지 알았다. 그 여행이 우리의 마지막 가족여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으니까. 아빠가 계실 때 더 자주 멈추고, 더 자주 웃어드릴걸. 후회는 남지만, 그 시간들이 있었기에 삶의 순간순간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세상이 아무리 복잡해도 타인의 잣대에 나를 맞출 필요가 없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더 많이 웃으며 살아가면 된다. 아빠가 늘 서두르던 이유도 결국은 그걸 위해서였을 것이다. 인생은 긴 여행이 아니라 짧은 소풍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나는 오늘도 부 샹 파이의 그림 앞에서 아빠를 떠올린다. 사는 동안 더 미루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을 가장 먼저 챙기겠노라고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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