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이 지켜준 우리들의 여름>

실베스터 슈체드린의 포도로 덮인 베란다 1828을 들여다보며

by 김상래
러시아화가
Сильвестр Феодосиевич Щедрин(실베스터 페오도시예비치 슈체드린) 실베스터 슈체드린
제목 Веранда, обвитая виноградом» 포도로 덮인 베란다
캔버스에 유채 1828


당신이 지켜준 우리들의 여름

그림 속 포도나무 그늘 아래, 햇빛이 사선으로 스며드는 풍경 앞에 한참 서 있었습니다. 넝쿨 사이로 바람이 스치고, 포도잎 그림자가 땅 위에서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오래 전의 기억들이 조용히 말을 걸어옵니다. 먼저, 흑산도가 떠올랐습니다. 여러 번 쾌속선을 타고 갔던 바다, 흔들리는 파도 위에서 배멀미에 지쳐도, 섬에 닿는 순간 모든 힘겨움이 바닷바람 속으로 흩어지던 날들.


짭조름한 공기와 부서지는 물빛이 금세 내 마음을 채워주곤 했죠. 그러다 그 기억은 곧, 아빠 발령으로 초등학교 입학 전 1년을 지냈던 구미로 이어졌습니다. 그때 우리는 넓은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았습니다. 집을 나서면 오른쪽엔 수박밭, 왼쪽엔 참외밭이 있었습니다. 동네 어르신들이 판매할 수 없는 수박과 참외를 건네주면, 엄마와 동생들과 함께 베어 먹었죠. 손끝에서 흘러내리던 달콤한 즙, 그 맛을 함께 나누며 깔깔 웃던 여름이 기억납니다. 친구들과 계곡을 따라 오르다 산딸기를 따먹던 일, 뒷산에 올라 작은 마을을 내려다보던 여유. 그 모든 순간이 지금도 마음속에 맑게 남아 있습니다. 아빠를 따라 내려간 그 1년 덕분에, 나는 흙을 밟고 땀을 흘리며 사는 사람들의 하루를 따뜻한 기억으로 품게 되었죠.


수원으로 발령이 난 뒤에도 아빠의 일터는 우리 가족의 놀이터였습니다. 보통리 저수지에서 아빠는 친구들과 함께 배를 태워 주셨고, 연잎이 무성할 때면 연밥을 따서 나눠 주셨습니다. 연밥에서 밤 맛이 난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죠. 친구들을 데리고 가면 아빠는 커다란 냄비에 라면을 끓여 주셨고, 막 건져 올린 생선으로 매운탕을 끓여 주기도 하셨지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라면과 어디에도 팔지 않는 아빠만의 매운탕이 이제야 참 좋았다는 걸 깨닫습니다.


아빠는 식물박사 같았습니다. 길을 걷다 “이건 무슨 잎이고, 저건 무슨 꽃이고, 이건 무슨 열매”인지 물으면, 아빠는 단 한 번도 모른다고 하지 않으셨죠. 어린 시절의 나는, 아빠 같은 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빠를 참 좋아했으니까요. 엄마는 늘 말했습니다. 아빠는 친구처럼 잘 놀아주고, 어디를 가든 가족과 함께였다고.


사춘기가 온 뒤에는 그런 시간이 답답하고 귀찮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알겠어요. 아무나 그렇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는 걸 말이죠. 그건 우리 아빠니까 가능했던 일이었죠. 아빠는 늘 우리에게 세상을 보여주고, 경험하게 해 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내 안에는 수많은 빛깔과 냄새와 계절이 살아 있죠. 지금 이렇게 그림 앞에 서 있는 순간에도, 아빠와 함께한 그 시간들이 나를 부드럽게 감싸줍니다.


그림 속 사람들은 한낮의 햇볕을 피해 포도넝쿨 아래에서 쉬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아빠와 함께한 여유로운 순간들을 데려옵니다. 섬에서의 바람, 시골에서의 1년, 그리고 아빠의 일터에서 보낸 오후들. 그 모든 시간 속에서 아빠는 우리의 그늘이자 울타리였고, 안전한 항구였습니다.


이제는 알겠습니다. 그때 우리가 받은 것은 그저 그런 포도송이, 수박, 참외가 아니었습니다. 기다림과 정성스러운 손길이 만든 계절의 맛, 세상에서 가장 부드럽고 든든한 사랑이었죠. 아빠, 나도 이제 그 울타리를 만들어 보고 싶어요. 햇빛을 피해 가족이 쉴 수 있는, 포도송이 따 먹으며 웃을 수 있는 그늘. 그곳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천천히 사는 집 말이에요. 아이는 훌쩍 자랐고, 남편은 정년을 마친 뒤, 우리 부부의 오래된 꿈처럼 살아가고 싶어요.


그러니 아빠, 나를 자주 내려다봐 주세요.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그곳에 있는 아빠와 눈을 맞출 테니까요. 고단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겠어요. 가족이 있기에, 모두 힘을 내는 걸 겁니다.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쉬어갈 수 있는 울타리가 있다는 건, 비를 피할 수 있는 울타리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참 감사한 날들이었습니다. 내게 세상의 색과 향을 알려주고, 계절마다의 빛깔을 손에 쥐어주던 사람.


세상에서 가장 좋은 친구였던 아빠에게.

구미 집 뒷산에서 찍은 어린 시절 사진

#그림에세이#미술에세이#러시아그림#러시아화가#살롱드까뮤_마더로그#그림보며글쓰기#아빠생각#아빠에게 #편지

매거진의 이전글반짝이는 순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