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꽃 앞에서 아빠를 떠올리다
배꽃 앞에서 아빠를 떠올리다
한국 현대미술의 큰 별, 이대원(1921~2005)은 평생 농촌의 자연과 꽃을 화폭에 담아냈다.
젊은 시절 추상의 길을 걸었던 그는 어느 순간 다시 고향 풍경으로 돌아와 흰 꽃이 가득한 배나무 앞에 섰다. 현실의 소박한 꽃송이는 그의 손끝에서 리듬을 타며 장식적인 화면으로 피어났다. 민화의 단아한 선과 서양 추상의 색면이 어우러지며 전혀 새로운 한국적 서정이 태어났다. 그의 배꽃은 한국인의 기억 속 시골 풍경을 현대 회화의 언어로 바꿔 놓은 하나의 시가 되었다.
봄은 언제나 다시 온다.
나무는 다시 꽃을 피운다.
_고흐, 편지 중에서
봄의 흰 꽃, 기억을 여는 열쇠
하얀 배꽃이 화면 가득 피어난 이대원의 그림 앞에 서면,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화려하지 않으면서도 은은한 향기를 풍기는 꽃, 마치 눈송이처럼 흩날리며 피어나는 그 배꽃을 보노라면 아빠의 손길이 스며 있던 연구소 근처 밭이 떠오른다.
아빠는 연구소 주변에 사과나무와 매실나무를 심고, 옆에는 호박과 마늘, 배추와 열무를 정성스레 가꾸셨다. 감나무와 대추나무도 자리를 잡았고, 계절마다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다. 마치 작은 농원 같았다. 매일 새벽, 엄마와 아빠는 해가 뜨기 전부터 흙을 고르고 풀을 매며 그곳에 정성을 쏟았다.
시간이 흘러 열매가 익으면 우리 가족은 함께 수확의 기쁨을 나눴다. 특히 아빠가 심어 놓은 대추나무에 매달린 커다란 대추는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달콤함을 품고 있었다. 반쯤 벌레가 먹은 자국이 있으면 조심스레 도려내고 먹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내겐 특별했다.
사과나무에서 딴 사과에는 꿀이 배어 있었고, 매실나무에는 해마다 끝도 없이 열매가 주렁주렁 열렸다. 엄마는 그 매실을 설탕과 함께 병에 담아 매실주를 만들었다. 여름이면 유리병 속에서 작은 기포가 피어올랐고, 시간이 흐르면 집 안 가득 은은한 향이 퍼졌다. 배가 아프거나 소화가 잘 안 될 때마다 엄마는 늘 그 매실주를 꺼내 주셨다.
배나무가 길게 뻗은 화면 속 이대원의 〈배꽃〉을 바라보면, 그 모든 풍경이 한꺼번에 되살아난다. 아프면서도 끝내 손에서 놓지 못했던 아빠의 밭, 그곳의 사과나무와 매실나무가 사실은 나를 키운 계절의 얼굴이었음을 이제야 알게 된다.
아빠의 연구소, 나의 작은 시골
아빠가 숙직을 하는 날이면, 우리는 이따금 아빠의 회사에 함께 갔다. 그곳은 내게 연구소라기보다는 작은 농촌 마을 같았다. 동네 어른들이 가꾼 고추밭과 가지밭, 여기저기 심어진 작물들이 줄지어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고추를 따는 법을 배웠다. “비틀어야 잘 떨어진다.” 아빠가 알려주면 작은 손으로 고추를 살살 비틀어 보았다. 또, 깻잎과 비슷한 잎사귀들을 두 장 놓고 “어느 게 진짜 깻잎일까?” 하고 맞추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그 시절의 나는 흙냄새와 햇볕 냄새 속에서 자랐다.
구미에서 보낸 1년의 시골살이도 내게 큰 기억이지만, 사실은 아빠 연구소의 밭이 더 큰 영향을 주었는지도 모른다. 도시 아이였던 내가 흙과 나무에 친근해질 수 있었던 건 그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푸르른 이파리를 바라보며 느릿하게 걷는 사람이 되었다. 바람이 스치는 길을 따라 걷다가 잘 익은 토마토를 따서 옷에 슥슥 문질러 먹을 수 있는 그런 감성을 가진 것도 아빠 덕분이다.
배꽃과 아몬드 꽃 사이에서
이대원의 배꽃은 실제의 배꽃보다 화려하고 장식적이다. 현실의 배꽃은 작고 수수하지만, 그림 속 배꽃은 화면 가득 알사탕처럼 박힌 팝콘 같은 모습으로 피어 있다. 문득 고흐의 《꽃 피는 아몬드 나무》가 떠오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 꽃송이가 터져 오르는 그 그림은 봄의 희망을 가장 단순하고 강렬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배꽃은 조금 다르다. 특별할 것 없어 더 소중한 꽃. 그 소박함 속에 담긴 기억은 화려한 꽃보다 오래간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심은 배나무와 매실나무를 기억한다. 아빠가 다니던 연구소의 밭은 이제 엉망이 되어 버렸을지 몰라도, 그곳에서 피어난 꽃과 열매는 여전히 내 안에서 살아 있다.
도심 속 시골의 마음
나는 인천에서 태어나 대부분을 수원에서 살아왔다. 도시의 삶이 내 일상이고, 빽빽한 건물들이 내 주변을 메운다. 하지만 마음 한편에는 늘 시골이 자리 잡고 있다.
어린 날의 기억 때문일까. 때로는 내가 시골에서 태어나 도시로 올라와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화단의 풀꽃만 보아도 오래 바라보게 되고, 시골길을 걷던 느릿한 속도를 그리워한다. 흙 위를 걸을 때 마음이 편안해지고, 계절의 냄새가 스칠 때마다 삶의 중심이 잡히는 기분이 든다.
이대원의 배꽃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림 속 꽃이 내 기억을 열어 주는 열쇠가 된 듯하다. 아빠의 손길, 엄마의 정성, 어린 시절의 웃음이 함께 피어난다.
나는 여전히 아빠가 만들어 준 시골의 기억을 안고 살아간다. 언젠가 그때처럼 흙을 밟으며 살고 싶다. 도시의 삶이 전부는 아니라고, 꽃과 나무와 열매가 우리를 키워 왔다고, 배꽃은 조용히 말해 준다.
언젠가 내 삶이 조금 더 여유로워지는 날이 오면, 나도 작은 밭을 가꾸고 싶다. 아빠처럼 사과나무와 매실나무를 심고, 아이와 함께 대추를 따며 그 달콤함을 나누고 싶다. 그날, 내 삶에도 흰 배꽃이 다시 피어날 것이다. 오늘처럼 그림 앞에서 아빠를 떠올리듯, 땅 위에서 또 다른 계절의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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