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향의 빛과 엄마의 시간
아빠가 돌아가신 뒤, 엄마가 부쩍 힘들어하는 모습을 가까이에서 보고 있습니다. 그때마다 제 머릿속엔 에드워드 윌리스 레드필드의 〈남쪽 창〉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실은, 엄마를 보다 그 그림을 생각했고, 그 그림을 보다 다시 엄마를 떠올렸습니다. 그 왕복의 시선이 길이 되어, 한 편의 미술 단편 소설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을 들으며.
창가에 서면 엄마의 지나간 겨울이 보인다.
남향으로 난 큰 창, 프레임이 화면에서 반쯤 잘려 보이는 액자 안에는 부모님이 함께 겨울 산행 중 찍었던 사진이 걸려 있다. 창문 너머로 쌓인 눈, 창턱을 가득 채운 시들어가는 화분들. 에드워드 윌리스 레드필드의 〈남쪽 창(The South Window, 1941)〉 속 장면을 들여다보고 있자면, 나는 자꾸만 엄마가 그리던 노년의 집을 생각하게 된다. 장독대가 널찍하게 놓인 한옥 마당, 햇빛이 하루 종일 머무는 처마, 바람이 들었다 나가며 메주 냄새를 살짝 흔드는 겨울 오후. 그 모든 그림을 엄마는 “나중에”라고 부르곤 했다.
주인공의 이름은 수연.
수연은 엄마의 “나중에”를 또 듣고, 접힌 지도 가장자리를 손톱으로 문지르듯 답답함을 삼켰다. 아빠와 함께 시골로 땅을 보러 다니던 그해 겨울, 셋은 읍내 부동산의 낡은 난롯불 앞에서 긴 의자를 나란히 데우곤 했다. 중개인의 말대로, 흰 도로를 따라가면 남향으로 트인 밭과 큰 마당이 나오고, 조금 손보면 장독대를 놓을 뒤뜰도 난다. 그럴 때마다 엄마는 아주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엄마와 아빠는 아직 건강했고, 발걸음은 가벼웠다. 하지만 늘 마지막에는 같은 말로 미뤘다. “조금만 더, 우리 조금만 더 생각하자.”
수연은 그 말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살림을 옮기려면 돈과 기운, 그리고 용기가 한꺼번에 든다. 엄마는 누구보다 알뜰했다. 그러니 엄마의 “조금만 더”는 주저가 아니라, 모든 것을 따져 나온 가장 현실적인 판단이었다. 겨우내 창밖의 눈이 녹기를 기다리는 나무처럼, 아직 때가 아니라고 자신을 다독이며 단단히 서 있었다.
레드필드의 그림은 그런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고 있었다. 폭신한 눈으로 덮인 바깥 풍경은 어쩐지 쓸쓸하기까지 하다. 창 안쪽 공기에는 들어오는 햇빛과 흙냄새가 은근히 깔려 있었다. 화분 사이로 쏟아지는 빛은 바닥에 사각형의 온기를 놓아두고, 백발의 한 여인이 그 빛 가장자리에서 밖을 내다보고 있다. 수연은 그 여인을 엄마라고 부르기로 했다. 파란 가디건을 여며 쥔 손, 창밖을 향해 고개를 살짝 기운 어깨, 발치의 그림자가 겨울 오후의 길이를 알려준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되는 노년의 여행, 먼 데를 오래 바라보는 대신 가까운 빛을 가꾸는 일, 그것이 엄마가 꿈꾼 마지막 계절이었다.
엄마에게 한옥은 오래 품어 온 로망이었다. 수연에게는, 할아버지가 살던 집. 어린 날 저녁, 마당 끝에서 맡던 짠내와 볕 냄새. 그 기억을 떠올리면 한옥은 곧 장독대였다. 장독대가 있다는 건 계절을 붙잡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봄 장, 여름 김치, 가을의 된장과 간장, 겨울의 김치독. 항아리의 둥근 배가 햇볕을 먹는 동안, 그 곁에서 하루의 일과가 차례로 기록됐다. “해가 동남으로 기울어 오전 볕이 오래 들면, 간장이 더 순해.” 엄마는 그렇게 말했다. 해의 길이에 맞춰 음식을 만들고, 그 음식으로 하루를 버티며, 버틴 하루가 모여 노년의 안정을 만든다고 믿었다. 그래서 한옥의 남향은 햇빛의 문제라기보다 어떻게 버틸 것인가의 대답이었다.
삶은 늘 계획을 바꾸어 놓는다. 봄의 초입, 아빠의 몸이 먼저 신호를 보냈다. 매년 검진을 받았지만, 그제야 큰 병이라는 걸 알았다. 길면 일 년, 짧으면 여섯 달. 창밖에는 개나리가 막 피기 시작했고, 병원 복도엔 마알간 햇빛이 길게 흘렀다. 그사이 엄마의 허리는 더 굳었고, 걸음은 짧아졌다. 병문안 날이면 수연은 아빠가 좋아하던 음식을 싸 들고 가거나 지하 식당을 찾았다. 맛은 거의 보지 못했지만, 병실엔 그날의 냄새가 조금 남았다.
장례를 치른 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엄마는 한참 창밖을 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남향 창만 있으면 돼. 장독대는 잠깐 미뤄도 되지 뭐.” 그 말은, 스스로를 달래면서도 빈자리를 견디려는 기도였다. 남향으로 기울던 꿈은 잠시 접혔고, 집 안의 시간은 아빠의 빈자리를 중심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그 무렵 수연은 우연히 이 그림을 만나게 되었다.
그림이 그려지던 1941년, 세상은 어둡게 흔들리던 해였다. 유럽의 하늘엔 공습의 상흔이 남아 있었고, 대서양엔 보이지 않는 전쟁이 길을 막았다. 미국은 봄에 무기대여법을 통과시키며 전쟁의 문턱에 서 있었다. 겨울이면 진주만의 비보가 그 문턱을 넘게 했다. 그런 때, 펜실베이니아의 한 화가는 남향 창 앞에 멈춰 섰다. 바깥의 설경 대신, 창턱에 번지는 조용한 빛 가운데로 드물게 아내를 세웠다. 그는 야외 설경으로 유명하지만, 이 그림은 아내를 세운 드문 실내 장면이었다. 그림의 차분함이 수연에게는 위로를 건네고 있었다. 세상이 소란스러워도, 한 집의 남향 창은 묵묵히 제빛을 넓힌다는 사실. 그 사실이 엄마의 “조금만 더”를 비겁함이 아니라 품위로 바꾸어 주었다. 기다려도 되는 삶, 기다릴 줄 아는 삶.
그날부터 수연은 엄마의 베란다를 작은 장독대처럼 돌보기 시작했다. 항아리 대신 토분을 들였고, 고들빼기나 배추 모종은 어렵지만 허브, 고무나무, 제라늄, 금사철쯤은 해볼 만했다. 물 주는 시간을 정해두고, 잎사귀 아래 먼지를 털어 주고, 어느 때 어느 자리까지 햇살이 들어오는지 매일 살폈다. 엄마는 화분들 사이에 서서 빛의 길이를 몸으로 재었다. “지금 햇살은 여기까지구나.” 말처럼, 삶도 지금 여기까지 와 있었다. 더 멀리 가는 대신, 여기서 천천히 깊어지기.
수연은 종종 엄마의 뒤에서 그 모습을 스케치하듯 마음에 옮겨 담았다. 겨울, 창, 빛, 화분, 그리고 엄마. 조금씩 변하는 것은 화분의 키와 꽃의 색깔, 바깥 눈의 두께뿐이었다. 어느 날은 새싹이 두 잎에서 네 잎이 되고, 다른 날은 잎 하나가 누렇게 시들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가위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잎을 줄기 가까이에서 살짝 잘라 낸 뒤, 손바닥에 올려 한 번 쓰다듬고 작은 휴지 조각으로 감싸서 말아 쓰레기통에 살짝 넣었다. 버리는 일에도 힘주어 던지지 않는 사람. “얘는 여기까지.” 엄마가 그렇게 말하면, 수연은 가끔 눈을 떼지 못했다. 조용한 손끝 하나가 끝을 정한다. 그만큼 결심은 분명했다.
한옥을 미룬 대신, 엄마는 “남향”을 집 안에 들였다. 부엌의 작은 선반을 치우고, 창가 의자의 방향을 15도쯤 돌렸다. 식탁 위 과일 접시는 창 쪽으로 조금 더 밀었다. 그 사소한 이동만으로 햇빛의 길이 바뀌고, 집의 오후는 다른 얼굴을 드러냈다.
수연은 그것을 “빛의 지리”라고 불렀다. 집의 완성은 거대한 선택이 아니라 작은 각도의 반복이라는 걸, 엄마는 하루하루 익혔다. 레드필드의 그림에도 그 각도가 있다. 창틀의 반듯한 사각과, 그 사이를 비스듬한 사선으로 가르는 빛의 틈. 여인은 그 틈에 서서 창밖을 오래 바라본다. 생각은 천천히 깊어진다.
어느 주말, 수연은 엄마와 함께 다시 시골로 내려갔다. 이번에는 땅을 보러 가기보다 겨울 장을 보러 가는 길이었다. 제천시장 어귀의 올갱이해장국 집에 앉아 국을 사이에 두고, 엄마가 문득 말했다. “수연아, 나는 우리 집에 장독대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다만, 네가 내 옆에 서서 계절을 좀 알려주면 어떨까. ‘지금 햇빛은 여기까지’라고.”
너무 간단한 말이어서, 오래 기억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장독대가 간직하고 있던 건 간장이나 된장이 아니라, 계절을 세는 마음이었는지도 모른다. 그것만 옆에 두면, 집은 어디든 남향이 된다.
그 후로도 시간은 조금씩 흘렀고, 아빠의 이름이 찍힌 약봉지는 사라졌지만 식탁 한켠엔 엄마의 약봉지가 반듯이 놓여 있었다. 엄마의 걸음은 더 짧아졌고, 수연은 화분을 더 자주 돌보았다. 가끔 흙을 바닥에 쏟거나 물을 너무 많이 줘 잎이 노랗게 질 때도 있었다. 그럴 때면 엄마는 웃으며 말했다. “사람 키우는 것보다는 쉽지.” 웃음이 마를까 봐, 수연은 더 자주 손을 보탰다. 어떤 실수는 웃음을 낳고, 어떤 실수는 눈물을 부른다. 둘 다 삶의 물기였다.
봄이 오기 전날처럼 느껴지는 어느 날, 수연은 레드필드의 〈남쪽 창〉 아트 프린트를 작은 액자에 넣어 걸었다. 원본의 푸른 공기는 복제본에서도 신기하게 살아 있었다. 엄마는 의자를 끌어 그림까지의 거리와 창까지 거리를 번갈아 재더니, “이 정도면 제법 남향”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마치 마침표이자 시작점처럼 방 안에 놓였다. 한옥은 당분간 못 가도 좋고, 장독대도 조금 더 미뤄 두자. 다만 남향을 향해 서 있으면 된다. 그러면 집은 오늘도 제 호흡을 찾는다. 시작과 끝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햇빛이 벽을 건너듯, 우리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 너머에서도 조금씩 이어질 테니.
수연은 그제야 이해했다. 엄마가 말하던 “나중에”는 도망이 아니라 준비였다는 것을. 준비하는 사람은 서두르지 않는다. 남향의 빛은 결국 돌아오고, 창은 그때를 기다려 자리를 비워 둔다. 엄마가 창가에 서서 화분을 쓰다듬는 동안, 수연은 부엌의 찬장을 닦았다. 칼과 국자, 오래된 주전자, 오래전 선물 받은 접시. 귀퉁이가 조금 깨진 잔을 버릴까 하다가, 엄마의 버팀목 같은 말이 떠올라 그냥 두었다. “얘는 여기까지.” 수연은 잔을 다시 제자리에 놓았다. 언젠가, 알맞은 때가 오면 보내면 된다. 지금은 이대로, 곁에.
해가 넘어갈 즈음, 방 안에는 길고 가느다란 햇살 길이 생겼다. 엄마는 그 가장자리를 따라 천천히 걸었고, 수연은 발을 맞췄다. 바깥에는 여전히 눈이 남아 있었고, 집 안에는 조용한 온기가 가득했다. 레드필드가 그린 여인의 정지된 순간이 두 사람의 하루 속으로 스며들었다. 창틀 사이로 노을이 조금, 화분 잎에 반짝임이 조금. 그 작은 빛이 장독대의 빈자리에도, 조금.
밤이 내리고, 창은 어둠을 살며시 품는 거울이 되었다.
“엄마, 내일은 뭐부터 할까?” 수연이 묻자, 엄마는 잠시 생각하다가 여전히 남향을 바라보며 말했다. “내일은 물을 아주 조금만 주자. 그리고 화분 하나만, 창가에서 한 뼘 뒤로 옮겨 보자.” 그 말은 유언 같기보다 당부에 가까웠다. 허둥대지 않고 오늘과 내일을 한 뼘씩만 옮기는 마음. 엄마는 끝까지, 그렇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따금 수연은 상상한다. 만약 한옥을 샀더라도, 엄마는 아마 창가에서 비슷한 자세로 서 있었을 거라고. 장독대의 둥근 항아리 대신 오늘은 둥근 화분이, 처마 끝의 물방울 대신 잎사귀 끝의 물방울이, 마당의 눈 대신 창밖의 눈이 있을 뿐이라고. 중요한 건 모양이 아니라 방향이라는 것을, 엄마의 노년과 이 그림이 함께 알려 준다. 남향을 향한 고요한 뒷모습. 미뤄진 꿈이 아니라, 마침내 자기 자리로 들어선 삶이 거기 서 있다. 그 고요 앞에서, 말은 줄고 마음만 또렷해졌다.
수연은 안다. 언젠가 자신도 누군가의 “나중에”가 되리라는 걸. 그때가 오면 창가에 서서 햇빛의 길이를 조용히 재어 볼 테다. 오늘의 빛이 어디까지 와 있는지, 내일은 어디까지 건너갈 수 있는지. 손바닥으로 화분 흙을 살짝 눌러 보고, 메말랐다 싶으면 물을 한 모금 더 보탤 테다. 그러면 아주 오래전의 목소리가 천천히 돌아오겠지.
“그래, 바로 거기까지.”
겨울은 끝나지 않는다. 다만 조금씩 남향으로 기운다. 남향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다. 창을 열 수 있는 손, 빛을 재는 눈, 한 뼘을 옮기는 용기면 충분하다. 레드필드의 〈남쪽 창〉은 그 사실을 더 말없이 알려준다. 집이란, 우리가 서 있는 방향으로 완성되는 것임을. 그렇게 수연과 엄마의 하루는 오늘도, 남향으로 조금 더 기울어졌다.
장독대 자리에, 오늘은 아르보 패르트의 〈Spiegel im Spiegel〉
https://youtu.be/XDgfpaTjehA?si=tPLli6uGrcVGosk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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