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우리 집 현관에서 일어나는 기적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아담의 창조(The Creation of Adam)>, 1511~1512경, 프레스코, 280 x 570 cm, 바티칸 시스틴 성당 천장화의 일부
현관문에서 마주 잡은 두 손, 기운의 통로가 되다
매일 아침, 현관문 앞에서 치러지는 작은 의식. 아이의 양손을 내 두 손으로 포개어 잡는 일, 또는 아이가 내 손을 번갈아 가면 잡으며 부비는 일. 시작은 단순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아이에게 응원을 전하고 싶어 손을 잡기 시작했다. 어쩌다 보니 우리만의 ‘에너지 전송식’이 되었다.
내가 깜빡 잊기라도 하면, 아이가 먼저 내 손을 덥석 낚아챈다. “엄마, 좋은 기운 가져가야지!” 아이는 내 손을 꼭 쥔 채 입으로 '슉슉' 소리를 내며 공기를 들이마신다. 마치 내 몸속에 흐르는 행운과 긍정의 기운을 빨대처럼 빨아들여 제 몸속 깊숙이 채워 넣으려는 모양새다. 중3답지 않은 아이의 천진한 눈망울을 보고 있으면, 내 안에 정말로 좋은 기운이 가득 차 있어 아이에게 흘러 들어가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미술사에서 ‘손’은 인간의 감정, 신성한 권위, 창조적 에너지를 시각화하는 가장 강력한 상징물로 다뤄져 왔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두 손이 등장한다. 하느님의 손가락과 아담의 손가락이 맞닿기 직전의 모습으로 말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의 불꽃이 창조주로부터 피조물에게로 옮겨오는 모습이다. 아이가 내 손에서 기운을 얻어 가는 행위는 바로 이 ‘디바인 터치(The Divine Touch)’와 닮아있다. 엄마라는 존재가 가진 생명력을 물리적 접촉을 통해 아이의 삶으로 흘려보내는, 우리 집만의 작은 의식인 셈이다. 마치 스필버그의 영화 <E.T.>에서 외계 생명체와 어린 소년이 서로의 검지를 맞대며 교감하던 그 상징적인 장면처럼 말이다.
스크린 속 기적은 우리 집 현관문 앞에서 매일 아침 재현된다. 영화 속 E.T.가 상처 입은 소년을 위로하고 먼 행성으로 떠나는 것처럼. 엄마가 곁에 없는 학교생활 중에도 든든한 등불이 되어주길 바란다.
어느새 나보다 커버린 아이의 손바닥으로 전해지는 따스한 촉감은 어쩌면 지구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먼 세대 간의 간극을 메우는 가장 원초적이고도 강력한 텔레파시일지도 모른다.
뒤러의 작품을 떠올릴 때 나는 ‘자화상’보다 ‘기도하는 손’이 먼저 떠오른다. 광산에서 일하며 마디가 굵고 거칠어진 손이 간절한 염원을 상징하듯, 꽉 쥔 아이의 손은 엄마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의지를 보여주는 가장 순수한 기도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사랑과 불안, 희망이 손바닥을 통해 서로의 심장으로 전달되는 형태랄까.
노스페이스 재킷보다 값진 ‘행운의 마법’
손을 맞잡는 것의 효과는 놀라웠다. 동아리 추첨에서 가위바위보를 몽땅 지는 바람에 원치 않던 방송댄스부에 배정받았던 아이가, 다음 날 아침 나의 손바닥 기운을 잔뜩 받아 가더니 기적 같은 소식을 들고 왔다. “엄마! 어떤 아이가 나랑 동아리 바꾸재. 나 배드민턴부 됐어!” 재미있자고 한 일이 사실이 되고 보니 아이는 내 손에 진짜 행운의 마법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재력가라 아낌없이 물질로 보상해 주기보다, 아이와 ‘기운’을 나눌 수 있는 엄마라는 사실에 깊은 행복을 느낀다. 오귀스트 로댕이 <신의 손>이나 <대성당>에서 손만으로 인간의 실존과 창조적 에너지를 증명하려 했던 것과 같지 않은가.
요즘 엄마들 사이에서는 수십만 원을 호가하는 노스페이스 재킷을 사주며 생색을 내거나, 남들 다 입히는 유행에 뒤처질까 전전긍긍하는 풍경이 흔하다. 나는 비싼 옷 한 벌로 아이의 기를 살려주기보다 이렇게 손을 맞잡고 보이지 않는 에너지를 나누는 우리가 진짜 행복한 모자(母子)라는 생각이 든다. 물질적인 무언가를 손에 쥐여주는 것보다 지금 이 순간 아이와 손을 맞잡고 서로의 온기를 느끼는 것. 따뜻한 정서는 이런 게 아닐까.
수비드(Sous-vide)의 미학
지난 주말, 우리 집의 풍경은 조금 대조적이었다. 아이는 지독한 감기에 걸려 눈 뜨자마자 병원에 다녀오고 나는 죽을 주문해 준 뒤 미리 약속되어 있던 친구의 초대를 받아 외출했다.
친구가 식탁을 바꾼 기념과 책 출간 기념이었는데 조리학교를 갓 졸업하고 대학생이 된 친구의 둘째 딸이 솜씨를 발휘한 코스 요리들이 줄을 이었다.
건새우의 고소함이 씹히는 초록빛 미나리전, 매끄러운 윤기가 흐르는 생면 자장면, 새콤한 소스 위로 양상추와 파가 듬뿍 올라간 유린기, 코스의 정점이자 현대 미술처럼 섬세했던 수비드(Sous-vide) 돼지 안심스테이크 요리. 이미 자장면에서 배가 찼지만, 정성 가득한 요리들을 거절할 수 없었다. 디저트로 나온 달달한 커피와 요즘 '두쫀쿠'의 뒤를 이어 핫하다는 상하이 버터떡까지 마주하며 나는 호사스러운 오후를 보냈다.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환>에서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의 어깨에 두 손을 올린다. 한 손은 강한 아버지의 손으로, 다른 한 손은 부드러운 어머니의 손으로 '완전한 용서와 치유'를 의미한다. 그날 친구의 손이 그러했다. 아픈 아이를 두고 온 미안함에 헛헛했던 나를 위해 친구는 부지런히 손을 움직여 귀한 요리들을 내어주었다. 그 손은 정성스러운 요리사의 손이었고 출간을 축하하는 다정한 친구의 손이었다. 친구가 내민 환대의 손길 덕분에 나는 일상의 피로를 잠시 잊고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었다.
어느 작가의 말처럼 모든 시절은 쏜살같이 흐르고, 아이를 품에 안고 손을 맞잡을 수 있는 유효기간은 그리 길지 않을 것이다. 내가 나이 들어가는 속도보다 아이가 자라는 속도가 더 무섭게 느껴지는 요즘, 이 짧은 계절이 다 가기 전에 더 자주, 오래도록 아이의 손을 잡아주겠노라고 다짐한다. 아이가 내 손에서 읽어내는 좋은 기운이 훗날 아이가 홀로 설 때 든든한 뿌리가 되어줄 것을 믿는다. 내 부모가 나에게 했던 것처럼.
호화로운 식탁에서 대접받은 요리들이 육신을 채웠다면, 아이와 나누는 아침의 짧은 의식은 나의 영혼을 채운다. 화려한 코스 요리보다 더 진한 맛을 내는 것은 결국 내 손을 잡으며 "엄마 기운 가져가야지"라고 말하는 명랑한 목소리다. 내일 아침에는 더 따뜻한 기운을 담아 아이의 손을 잡아야지. 감기 기운을 다 떨쳐버릴 수 있도록, 내 안의 가장 밝은 빛을 아이의 손바닥에 꾹꾹 눌러 담아주어야지.
내가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결국 나의 좋은 기운 그 자체임을, 오늘도 맞잡은 두 손의 온도를 통해 배운다.
수비드(Sous-vide)란?
프랑스어로 ‘진공 상태’라는 뜻. 현대 요리의 정수로 불린다. 일반적인 요리가 불 위에서 100°C 이상의 고온으로 빠르게 익히는 것이라면, 수비드는 정확히 계산된 낮은 온도(보통 50~70°C 사이)에서 길게는 며칠 동안 천천히 익히는 방식이다.
미술로 치면, 거친 붓질로 단숨에 그려내는 크로키가 아니라 아주 얇은 물감을 수십 번 덧칠해 깊이를 만드는 글레이징 기법과 비슷하다. 고온의 불길로 재료를 몰아붙이지 않고, 낮은 온도의 물속에서 오랜 시간 재료의 본질을 지켜내며 부드러움을 끌어내는 수비드 공법은 아이를 다독여 좋은 기운을 불어넣는 나의 기다림과도 닮아 있었다.
덧. 이번 미술에세이에 등장하는 작품들은 하반기에 출간될 <두 번째 미술관 북마크>에서 그 내용을 더 정확하고 쉽게 이야기합니다. 기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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