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찾아온 어둠의 시간들

가혹한 시간은 나를 단련 시킨다.

by 김상래
가혹한 시간은 나를 단련시킨다.


힘들었던 출산과 회복의 과정 그리고.


힘들었던 출산. 회복하는데 서너 달이나 걸렸다. 더는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다.

유한이 하나만으로도 충분한 시간이었다. 사람은 망각의 동물. 신랑과 99프로 흡사한 유전자를 키우며 나와 비슷한 유전자의 딸이 있었으면 했다.


서른아홉.

유한이 5살 무렵 동생이 찾아왔다. 유치원 끝난 아이와 산책한다고 아파트 옆길을 빙~ 둘러 걸어오던 길에 하혈을 했다. 그리고 몇 주 되지 않아 뱃속 아이의 심장이 멎었다. 수술 후 눈을 떴을 땐 메스껍던 속도 무겁던 몸도 모두 아무 일 없었던 듯 예전처럼 돌아가 있었다.


자리를 훌훌 털고 일어났다. 나를 위로하려던 신랑의 움직임을 제지하고 쿨~ 한 척 조용히 묻어두기로 했다. 수없이 많은 눈물을 삼키며 긴긴밤을 보냈다.


마흔하나.

유한이가 7살 때.


"이 아이는 분명 여자 아이야."

"이름을 유림이라고 짓자.

고유한(맑을 유, 큰 나무 한)

고유림(맑을 유, 수풀 림)"


아이가 다시 왔다는 사실을 알았던 순간, 아니 그전부터 '유림'이었다.

고유림.


수원 A병원.


유한이 때도 A병원에서 출산했고 유산 때도 같은 부원장님이 조치를 해 주셨다.


“음, 목 투명대가 너무 두꺼운데 혹시 모르니 검사받아 봅시다”


혈액 채취만으로도 90% 이상은 알 수 있다고 했다.


“한주라도 빠를 때 하는 게 산모한테 더 좋아요. 아이도 힘들고 엄마도 힘들어요. 운이 좋아 살아서 나와도 얼마 못 버텨요.”


그렇게 한 주를 뱃속에 더 품었다. 서초동에 유명한 N 병원으로 융모막 검사를 받으러 갔다.

A병원 부원장님을 신뢰할 수 없다는 것보다 혹시... 혹시 모르니까...

인터넷을 뒤적이며 비슷한 경험을 했던 산모들의 이야기로 잔뜩 겁을 먹고 검사실에 들어갔다. 나보다 더 많이 아플 아이를 생각하니 배의 살짝 아랫부분을 찌르는 융모막 검사는 참을만했다.


“목 투명대가 너무 두껍네요. 자세한 결과는 나와봐야 알겠지만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렇게 또 한주가 흘렀다. 그리고 집에 한 장의 서류가 도착했다.

염색체 이상.
에드워드 증후군(정상적이라면 2개이어야 할 18번 염색체가 3개가 되어 발생하는 선천적 기형 증후군) 약 8,000명 당 1명의 빈도로 발생하며 여아에서 3~4배 정도 더 많이 발생한다.
이런 염색체 이상으로 인해, 여러 장기의 기형 및 정신 지체 장애가 생기며, 대부분 출생 후 10주 이내 사망.
근본적인 치료는 없으며, 각 장기의 기형에 대해 각각 치료를 해야 한다. 만약 산전에 일찍 발견되었으면 의학적으로는 인공유산을 고려할 수 있다.


한 시간 단위로 흰 알약을 삼켰다. 약을 삼킬 때마다 뒤틀리는 배를 움켜쥐고 몇 시간을 그렇게 방 안에서 화장실을 들락거렸다. 나와 그리고 마지막일 아이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와선 안 되는 존재. 나는 생명의 죽음을 온몸으로 느끼지만 살아 있다. 살아가야 할 존재.

‘퍽’

신랑이 화장실을 가고 없는 사이에 양수 터지는 소리가 들리고 하혈을 했다. 빨간색 비상 버튼을 눌러야 한다. 비상 버튼에 빨간 불이 들어온다.


"화장실에 들어가 볼일을 보고 나온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절대 아래는 쳐다보지 마시고요. 볼 일 후 바로 나오세요.


울컥~ 큰 덩어리를 쏟아내고 수술대에 올라 후 조치를 받았다. 그렇게 아이는 차가운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그날은 2017년 5월 3일. 후 조치와 영양제 주사가 남아 있어 병원에서 하루를 보냈다.


2017년 5월 4일. 어린이날 전날이었다.

유한이를 친정에 맡겨 두고 하루 꼬박 병원에서 보내고 친정엘 갔더니 아이가 울더라. 생전 가도 우는 법 없는 아이가 전날 그렇게도 울었다고 했다. 미안했다. 보낸 아이에게도 내 옆에 남아 있는 아이에게도.


어린이날은 어린이를 위한 날인데...

날짜가 기가 막히게도 그렇게 되었다. 그 모든 것이 나는 살고 힘든 아이는 보내야 하는 정해진 시간.

부원장님의 꽉 찬 스케줄에 그날이 빈 날이었다. 기가 막히게도 5월 4일. 이렇게 된 이유는 나이가 있는 내 탓이라고 모두들 말했다. 수없이 많은 시간을 아이를 보내며 삼켰던 흰 알약처럼 쓰디쓰게 삼키며 버텼다.

눈꺼풀을 꼭 닫고 두 눈을 어둠 속에 가둬 버렸다. 이따금 유한이가 묻는다.


“내 동생은 왜 죽은 거야? 아파서 죽은 거야?”


7살, 8살, 9살, 10살인 지금도 꼭 그렇게 한 번씩은 묻는다. 내 가슴에 뭍은 그 아이를 남아 있는 아이가 묻는다.

그렇게 마음으로 울며 가슴에 묻어둔 아이가 있다.


행복의 기준은 최대한 낮게 잡아 두고
내게 일어나는 나쁜 일들의 기준은 최대한 높게 잡자.
행복의 그물코는 작은 기쁨이라도 놓치지 않도록
최대한 촘촘하게 만들고 불행의 그물코는
웬만한 것쯤은 다 빠져나가도록 크고 넓게 만들 것.

정희재_아무것도 하지 않을 권리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걸 깨닫는 시간이었다. 옆집 엄마들과의 수다도 재미가 없고 그저 살아가는 시간들이 허비하듯 흘러가 버리는 것만 같았다. 왜 남들처럼 사는 그저 평범한 일상이 내겐 허락되지 않는 걸까? 때가 돼서 신랑이 "갖고 싶은 게 무어냐" 물으면 그냥 "명품백" 해버리고 반짝이는 가방 하나 어깨에 걸쳐 매고 나가 커피 마시며 나 따위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아이 하나만 바라보며 사는 그 평범한 일상이 왜 내겐 허락되지 않는 거냐고! 종교가 없지만 어딘가에 신은 분명 있다고 믿었는데 신이 내게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어 이리도 끝없이 방황하게 하는 것인지.


자만하며 살았던가. 남에게 손가락 질 받을 만한 일을 했던가.

왜 나에게 이런 올가미가 씌워지는 걸까. 수없이 되뇌고 많은 밤 뒤척이며 혼자서 피눈물을 흘리던 밤들.

아무도 내 편은 없었다. 나를 다독이고 챙겨줄 사람은 오직 나뿐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아픈 시간이었다.

행복을 포장하기를, 누군가는 나를 ‘있어 보이는 사람(미술관과 도서관을 좋아하면 그런 사람?)’이라고 꼬아서 말하던 그 시점에 나는 모든 쓰기를 멈춰버렸다. 매일 밤 감사의 하루를 마감하던 것을 버린 채 3년을 흘려보냈다.


다시 나오고 싶었다. 세상 아무도 없는 어둡고 컴컴한 날들의 무서운 감옥에서 빠져나오고 싶었다.




요가와 명상, 수영과 독서로 극복


차분하게 나를 생각하며 내 몸을 돌 볼 시간이 필요했다. 내가 잘못한 것은 무엇일까? 내 몸은 왜 이렇게 힘이 들까?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닌 채로 살아갈 것인가? 같은 생각을 반복 재생하며 사는 날들의 연속이 3년간 지속되었다. 유한이는 바랄 것 없이 영특하고 건강하게 성장해갔다. 나는 아직 내 밑바닥 침전물을 어쩌지 못하고 지내던 어둠의 시간들이었다.


결혼 후, 직장을 다니며 아이를 임신했다. 출산 막바지에 시작했던 태교 요가가 떠올랐다. 그때의 잔잔하고 고요한 분위기를 다시 가지고 싶었다. 아픈 몸을 회복하는 게 나에겐 정신보다 먼저였다. 무엇보다 당장 옆에 아이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시작한 요가와 명상. 물놀이 좋아하는 아이를 수영 강습장에 보내 놓고 보니 정작 나는 튜브 없이 물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 엄마였다. 아이가 자라는 그 시간 동안 엄마와의 추억을 많이 만들어 성인이 되고 나서 꺼내어 볼 추억들이 양파껍질 벗겨 내듯 계속해서 넘쳐 나오는 화수분이 되길 바랐다. 그래서 용기 내어 시작한 수영 강습.


특별한 일 없으면 주말을 포함, 강습 없는 날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뭐든 꽂히면 시간과 투자한 돈을 생각해 열심히 하는 편이다.(어릴 때 너무 그렇지 못해서) 열심히 하다 보니 물이 두렵지 않았다. 수영이란 운동이 굉장히 재미있고 매력적임을 알게 되었다. 한마디로 완전 중독이 된 상태였다. 자유형 한 팔 돌리기에서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그 이유로 중단하게 되었지만 수영하고 돌아오는 길에 만났던 나와의 시간. 비움의 시간들 속에서 시간이 흘렀고 나는 조금씩 나아졌다.


내가 수영을 하던 곳

우선 아픈 몸이 회복되니 좋은 에너지들이 생겨났다. 다시 도전 해 보고자 하는 의욕들이 솟아났다. 사람으로 상처를 치유받거나 화려한 무언가에 이끌려 나를 던져 버리지도 못하는 사람. 내 상처는 스스로 치유하고 빠져나와야 직성이 풀렸다.




그렇게 도슨트로의 길에 진입


프랑스 유학시절. 가장 부러웠던 건 동네마다 있던 아주 체계적인 도서관 시스템과 자료들이었다. 미대생들은 미술관, 박물관은 '아트 패스'로 무료로 드나들 수 있어 ‘그 역시 선진국이구나 ’했었다. 미술관에서 전시해설을 해 주시던 나이 지긋하신 도슨트분이 어찌나 매력적이고 근사해 보이던지. 막연히 '많은 사람들을 몰고 다니며 얘기하려면 얼마나 공부를 많이 하셨을까? 프랑스는 나이가 들어도 이렇게 일 할 수 있다니 역시 달라.' 하고 생각했다. 마치 인디아나 존스의 고고학자처럼 꾸미지 않은 우아하고 지적인 매력의 해리슨 포드를 보는 것 같았다. 물론 여성분이 도슨트를 해주고 계셨지만 나는 그랬다. 막연한 동경이었다. 프랑스로 유학을 가게 된 동기처럼 아주 막연한...


뭐든 일단 도전해 보자. 세상 밖으로 쏘아 올려질 탈출구가 필요했다. 비슷한 고민과 같은 관심사로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도슨트 서류통과, 수업을 듣고 시연을 통과하고 도슨트가 되었다. 백영수 전 준비를 열심히 하고 있던 찰나 코로나가 터졌다. ‘더 많은 침묵의 시간이 나에겐 필요한가 보다’ 생각했다. 전에도 그랬지만 특별한 일 없으면 무조건 도서관엘 갔다. 아이에 관한 책, 내 마음을 단련할 책을 빌려다 읽었다. 도서관 다니는 것을 일상으로 삼았다. 사람 사는 세상과는 떨어진 채 책 속의 세상에 흠뻑 빠져 지내고 있었다.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아트스페이스 광교, <내 나니 여자라> 수원시립미술관.

<그것은 무엇을 밝히나>


<내 나니 여자라>

그렇게 코로나가 잠시 한가한 틈을 타 도슨트로 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