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언젠간 늙겠지. 막연히 미래를 추측하던 날이 있었다. 노화는 생각보다 빨랐다. 스물아홉 흰머리가 듬성듬성 생기더니 마흔다섯이 되고 나니 보름 단위로 염색을 해줘야 한다. 처음엔 염색하는 일이 당연하게 생각되던 것이 작년. 재작년이던가 휴대폰을 멀찌감치 두고 보게 되면서 아차! 내게 노안이 시작되었구나 싶어 특별한 일이 아니면 염색을 참았다. 마흔다섯이 되기도 전에 노안이라니. 염색약이 눈에 영향을 준다는 얘기는 또 어디서 들어서.
그 옛날 내가 생각하던 돋보기 안경은 꼬부랑 할머니가 돼서야 끼게 되는 줄만 알았다. 어찌 되었든 친구 중 노안은 내가 첫 번째였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한 것도 처음이었던 것처럼. 노안 검증을 위해 안경점을 찾았던 날을 기억한다. 가족이 모두 총출동해 시력 검사를 받았다. 가림 치료를 했던 아이의 왼쪽 시력은 두 단계나 떨어져 있어 렌즈를 바꿔야 했다. 성장하며 안구가 커지니 시력이 떨어지는 일은 흔하다고 했다. 고도난시 관리만 당부했다. 신랑은 결혼 전 고시생답게 두꺼운 안경을 착용하고 있었다. 강남 유명 안과에서 시술받고 난 뒤로는 안경과는 작별하면서 인물이 살아났다.
나의 첫 노안렌즈그럼 나는 어땠나.
“요새는 노안이 더 빨리도 와요.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으셔도 돼요.”
“생각보다 빨리 왔는데 도무지 믿기지 않아 시력 검사를 늦게 받으러 왔네요.”
“빠른 것도 아니에요. 마흔 전에도 요새는 노안으로 렌즈 맞추러 오는 사람들 있어요.”
“괜히 그러시는 거 아니에요? 저 속상하지 말라고요?”
“아니에요. 하하. 휴대폰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보니 노안도 빨라진 것 같은데요.”
“아. 휴대폰. 제가 무슨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그저 소소하게 딱 사용하는 것만 하는데도 이렇게나 빨리.”
“정확한 원인은 모르죠. 대게 휴대폰 사용량이 많아지니 노안이 빨라졌다고 알고 있어요.”
“네. 겉으로 봐서도 돋보기처럼 티가 날까요?”
“하하. 요새는 그렇게 안 해요. 육안으로 전혀 티 안 나게 잘 나와요. 단지 착용하고 일주일간은 적응 기간이 필요해요. 잘 보이는 지점이 있으니 렌즈 나오면 설명 다시 해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노안이 맞았다. 언젠가 차인표가 나오는 방송에서 아이들 편지를 읽는 부분이었던가? 돋보기안경을 착용하고 할아버지처럼 멀찌감치서 글 읽는 모습을 보고는 '세월 앞에 장사 없구나.' 싶던 일이 내게도 일어났다. 그 옛날 오토바이에 앉아 울룩불룩한 근육을 바람과 맞짱 뜨던 차인표도 별 수 없었다.
이것은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생각해보면 뭐든 빨랐던 것 같다. 2차 성징도 남들보다 빨랐기에 초등학교 6학년 때 키 그대로 살고 있다. 아니 줄일 게 없는 키가 더 줄었다. 흰머리가 나기 시작하던 시점도, 노안이 찾아온 마흔다섯 지금도. 상태로 봐서는 폐경기도 생각보다 일찍 찾아올 듯싶다. 갱년기 또한 그럴 듯싶은데 어떻게 대처를 해야 할까? 운동을 하는 동안은 괜찮다가도 하지 않은 날은 몸이 아프니 집중할 곳이 없었다면 종일 짜증 섞인 모습으로 남은 인생을 맞이했겠지? 또 한 번 글 쓰는 일을, '펜을 잡은 건 신의 한 수였어' 라며 혼자 앉아 내 머리를 쓰담쓰담해 본다. 그리고 운동.
그렇다면 다른 노후 징후들도 앞당겨 나타날 텐데 인생을 미리 살아야 하는 걸까? 느릿느릿 달팽이 걸음으로 살아가는 지금. 내 미래를 어떻게 조금 빨리 가져올 수 있을까? 세월의 흐름 속에 주변 것들이 낡아가듯 나 또한 인생의 한가운데서 특별하지 않게 시간을 맞이할 거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인정한다. 다만, 조금 천천히 왔으면 했다. 아이를 등교시키고 돌아 나오는 길에 50분을 걸었다. 걷는 내내 어젯밤 아이의 얘기들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엄마가 더 젊었으면 좋겠어. 둘째 이모나 막내 이모처럼.”
“엄마가 너무 나이 들어 보여?”
“아니. 그게 아니라 엄마랑 더 오래 같이 있고 싶은데 엄마가 빨리 죽을까 봐.”
“엄마 열심히 운동해서 유한이랑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건데?”
“나는 엄마랑 같이 있는 게 좋아. 근데 엄마가 오래오래 같이 있지 못할까 봐 걱정돼.”
“걱정하지 마! 엄마 아직 쌩쌩해. 나이가 들면 누구나 삐걱거리는 데가 있기 마련인데 엄마 정도면 어디 나가면 훨씬 젊게 보잖아. 걱정하지 마!”
아이가 그린 숙제. 간판 만들기
초등학교 4학년. 여전히 엄마의 어디라도 맞대고 있어야 하는 아이. 시도 때도 없이 뽀뽀하고 안고 사랑한다고 말하는 아이. 그런 아이와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건강이 필수다.
오늘도 아이 없는 시간, 지금 놓치면 다시 기억하지 못할 게 분명해 어떻게든 기록하고 있는 나. 이 모든 기록이 언젠가 아이에게 선물이 되기를. 엄마는 노안 렌즈를 꼈지만 유한이는 가까이에서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