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무엇보다 빛나는 아이와 함께
발레리나 박세은이 발레의 종주국인 프랑스에서 에투알(étoile·별)로 지명되었다는 뉴스를 읽었다. 프랑스 파리 오페라 발레단(POB)에서 동양인 최초로 수석에 동양인을 호명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뉴스를 접하는 동안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차근히 기사들을 읽고 보니 예원학교, 서울예고, 한예종을 거쳐왔다. 그야말로 예술가로 가기 위한 코스를 그대로 밟아온 셈이다. 그렇다. 나는 언제나 마음 한구석에 예술가의 삶을 동경하고 있다. 가고 싶었지만 가보지 못한 그 길에 회한이 남아있다고 봐야겠지.
열정은 식었어. 나이도 먹었고. 어린 나이부터 차근히 그 길을 밟아가는 친구들이 여전히 안쓰럽기도 또 대견하고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어차피 인생이 한 번이라면 저렇게 처절하게 자기와 싸우며 에투알(étoile·별)이 되어보는 게 진정한 삶의 의미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하면서.
2003년 파리의 한여름. 파리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세상의 별이 된 것 같은 착각이 들던 때였다. 20대 후반이었지만 여전히 젊고 푸르던 시절, 뭐든 원하기만 하면 이루어질 것 같던 그때 생각이 났다. 한국은 막 온라인 쇼핑몰 시작이 되고 있었다.
“까뮤, 프랑스에서 주얼리 같은 거 온라인에 올려서 좀 팔아보면 어때?”
“언니, 나 공부하러 왔어. 무슨 쇼핑몰 얘기야.”
“그러지 말고 공부하면서 틈틈이 파리 시내 돌아다니며 예쁜 주얼리 있으면 판매해봐. 지금 하면 대박 날 거야.”
“주변에 가이드 한 번 했다가 돈맛 알아서 공부 그만둔 애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자리 잡고 사시는 분들 얘기로는 그런 거 하지 말고 열심히 공부하다 한국 돌아가래.”
“공부하면서는 힘든 거야?”
“지금 전혀 관심이 없어. 그냥 하고 싶은 거 할래.”
“그래. 지금 기회일 것 같은데 아쉽다.”
생각해보면 나는 언제나 뒷북이었다. 파리에서 멋진 별이 될 거란 망상에 사로잡힌 채 공부는 뒷전이고 그저 세상 구경만 요리조리 하고 있던 때. 지인의 쇼핑몰 제안에 콧방귀를 뀌었다. 별 소득 없이 돌아온 한국. 본업이었던 웹디자이너로 먹고 살길을 찾았다. 물론 프랑스 유학파라는 타이틀이 붙으며 대우는 더 좋았다. 이름만 대면 다 알만한 곳에 취업도 가능했다. (붙고 나서 출근하지 않겠다는 통보를 해버렸다)
유학을 떠났던 이유를 상기했다. 스트레스에 시달리며 밤샘 작업을 또 하기는 싫었다. ‘느슨하게 일하고 남은 시간에 투잡으로 쇼핑몰이나 해볼까?’ 바로 실행에 옮겼다. 영양사로 일하던 막냇동생과 자본금을 조금씩 대고 매일 같이 동대문을 놀려 다녔다. 내 취향대로 옷과 액세서리, 가방과 신발을 사 와선 서로 번갈아 입고 찍었다. 밤새 편집하고 상품으로 올렸다. 록 그룹에 관심이 많던 때라 이름 붙은 게 죄다 밴드 이름이거나 밴드의 곡 중에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곡의 제목이거나 그랬다. 끼니를 걸러도 잠을 못 자도 너무 재미있었다. 몰골이 말이 아닌채로 회사에 다니며 밤엔 쇼핑몰을 운영하던 게 1년 정도 됐다. 이제 자리를 잡아가나 싶던 때 신랑을 만났고 연애하느라 신경 쓸 시간이 없어진 쇼핑몰은 흐지부지.
결혼이란 걸 생각하게 된 시기에 다시 안정적인 회사에 취업했다. 쇼핑몰은 점차 접는 거로 하고. 3년의 연애 끝에 한 결혼. 아이를 키우며 프로젝트성 일을 하기도 했고 아이 교육서를 읽기 시작하면서 다시 책이 재미있어지던 찰나. 2015년 즈음, 쇼핑몰을 권하던 지인이 또 말을 걸어왔다.
“너 요즘 뭐해? 서평이나 브런치에 글을 써보는 건 어때?”
“브런치에 어떻게 글을 써? 먹는 거 아냐? 서평은 아무나 하나.”
“요새 너처럼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책 읽고 서평 쓰더라고. 잘할 것 같은데 해봐. 브런치는 작가 되려는 사람들이 글 쓰는 곳인데 이거 한번 봐봐.”
늘 뒷북인 내게 이따금 이거 해봐. 저거 해봐. 하고 최신 정보를 제공해 주는 지인이 있다. 그때 난 아이 키우는데 재미가 있었다. 책을 읽는다고 해봐야 육아 관련 서적과 아이에게 읽어줄 책, 개인 에세이를 읽는 일이 고작이었다. 물론 지금도 크게 다를 바 없긴 하다. 그리고 미련을 버리지 못해 기웃거리던 미술 관련 서적들을 들춰보는 것 정도.
미술관에서 도슨트 활동을 하면서 글을 써야지 생각했던 건 신랑의 영향이 크다. 당시 인재개발부에 있을 때 교육 관련 강사를 섭외하고 진행하는 과정을 맡고 있었다. 자기 책이 있는 강사들의 강의료가 그렇지 않은 강사들과 비교했을 때 큰 차이가 난다고 했다. 그땐 그저 남의 얘기로만 들었던 것이, 아이가 조금씩 크면서 내 책을 가지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글쓰기 강의를 좀 들어볼까 하며 기웃거리다가도 무슨 강의료가 그리 비싼가 싶어 포기하곤 했다. 그러던 것이 ‘수원시립 아이파크 미술관‘에서 '49일간 아티스트로 사는 법'에 대한 강좌에 신청했다. 매일 모닝 페이지를 적어가며 글 쓰는 재미, 루틴을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되었다. 그것도 모닝 페이지를 적어가기 몇 해 전 막냇동생이 해보자 했던 것을 이러저러한 핑계로 미루어 두었던 일이었다. SNS를 시작하게 된 계기로 블로그에 100일 글쓰기를 하고 있다. 브런치 작가가 되어 글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결국, 쇼핑몰, 모닝 페이지, 블로그, 글쓰기, 인스타, 브런치도 모두 한 셈이다. 남들 한참 전에 시작해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무렵 나는 그제야 뒷북을 ‘둥둥’ 치며….
유튜브로 책 읽어주는 방송을 하나 만들어 볼까 한 생각이 벌써 언제인지. 다들 뛰어들어 자신만의 바다를 만들어 가고 있는 때에 나는 이제야 한걸음, 두 걸음 걸음마 배우는 아이처럼 서툴게 조금씩 걸어가고 있다. 아이를 키우며 함께 성장하자는 모토로 하루의 시간을 나름 촘촘히 보낸다고 생각했는데 늘 그렇게 한참이나 늦은 출발이었다.
나는 왜 여전히 나로 살고 싶은 걸까? 아이를 별로 만들 수도 있다. 그 별 뒤에서 소소하게 별을 돋보이게 해 줘도 될 텐데. 별이 되고 싶다고 누구나 별이 되는 것도 아닐 테고. 생각해보니 나는 그저 내 이름으로 살고 싶은 거였다. 내가 별이 될지 아닐지는 관계없었다. 내가 빛나는 별이라고 생각하고 살면 되는 거였다. 이따금 멋진 별이 된 예술가들을 보면서 여전히 동경의 시선을 보내고 있는 것은 내가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아쉬움 때문일 뿐이다. 누구나 모든 길을 가볼 수는 없다. 그들이 가지 않은 길을 나는 가고 있을 테니.
사는데 답은 없다. 인생은 늘 선택의 연속이고 나는 내가 선택한 삶을 살고 있다. 늦은 움직임이란 건 그저 내가 그들을 동경하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전을 뒤적거리며 문장을 읽어나가는 아이의 예쁜 입술의 움직임으로 행복한 저녁. 그 모습이 사라져 버릴까 봐 휴대폰을 꺼내 들고 동영상을 찍고 있는 나. 아이가 날려주는 작은 손가락 하트에 심장이 가려워지는 삶을 선택한 건 나였다. ‘달팽이가 느려도 느리지 않다’라는 정목 스님의 책 제목처럼 나는 느리지만 느리지 않다. 그들처럼은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내 자리에서 충분히 빛나고 있다.
세상 무엇보다 빛나는 아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