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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Jun 18. 2021

<서평>_프리다 칼로와 나혜석, 그리고 까미유 끌로델

프리다 칼로

한 권의 책은 두꺼운 형태는 아니었다. 함께 묶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줄은 알지만 과감히 한 분씩 서평을 쓰기로 했다.

그 처음은 프리다 칼로. 멕시코 출신의 짙은 눈썹, 굳게 다문 입, 표정 없는 얼굴. 평생을 걸쳐 32번의 대수술을 받았고 그로 인해 인생의 모든 시간 동안 죽음이란 그림자와 함께 살았던 그녀. 자신에게 처해진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그림으로 고통을 표현한 위대한 화가.

나는 내 자신을 그렸다.
나는 늘 혼자이기에
내 자신은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이기에

_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아버지는 유태계 독일인, 어머니는 모델 출신 인디언 후예와 스페인 혈통이 섞인 메스티조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나혜석처럼 프리다 칼로도 멕시코시티 최고 명문교육기관을 입학했고 과학에 흥미를 느껴 의대에 진학해 의사가 되기를 꿈꿨었다. 1925년 9월 17일 프리다의 일생을 바꾸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교통사고로 척추와 오른쪽 다리가 골절되는 중상을 입고 승객용 손잡이가 달린 쇠막대가 그녀의 자궁을 관통했다. 또 누군가의 물감통이 터져버려 청동 가루로 뒤덮인 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심한 우울증과 반복되는 32차례의 수술로 평생에 걸쳐 육체적인 고통에 시달렸을 그녀에게 세상 바람둥이인 디에고 리베라와의 만남은 정신적 고통으로도 그녀를 괴롭게 했다.

프리다 칼로의 첫 자화상
일생 동안 나는 두 가지 커다란 사고를 당했는데 그중 하나는 어린 시절 당한 전차 사고이고, 다른 하나는 디에고와의 만남이다.
_프리다 칼로

그러나 공산주의 혁명가 디에고 리베라와의 결합으로 많은 예술가, 화가들, 혁명가들과 잦은 교류를 하며 그림을 그리는데 지대한 영향을 받게 된다. 마음대로 육신을 쓸 수 없는 프리다 칼로의 입장에서 디에고의 즉흥적인 행동이라든가 풍부한 상상력은 아무리 잔인한 행동을 한다 하더라도 신적인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1930년 첫 임신 후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아 인공 유산을 하고 1932년 또다시 임신했으나 3개월째에 유산을 하게 되면서 아이와 자신에 관한 많은 드로잉을 남긴다.

생명을 잉태하지 못하는 자신의 심경은 뿌리에 관한 강한 집착을 보임으로서 조부모, 부모,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그림들을 그린다.


그 사이 디에고 리베라는 또 다른 여자들과 수 없이 사랑에 빠지고 그를 견디지 못한 프리다 칼로는 이혼을 한다. 1940년 멕시코에서 열린 대규모 <초현실주의 국제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고 명성을 날린다.

남미 화가 최초로 루브르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는 영예도 안았다.

척추의 고통으로 수술을 받은 후 디에고 생일에 재결합을 하지만 디에고는 단 한 번도 성실한 남편이지 못했다.


1944년 또다시 건강 악화로 교정용 코르셋을 착용하게 되고 그 고통의 수단으로 그림에 몰두한다.

1946년 더욱 악화되는 건강 상태로 뉴욕의 필립 박사와 월슨 박사에게 척추 접합 수술을 받게 된다.

죽을 만큼 잔인한 고통을 주는 강철 코르셋을 다시 착용하게 된다.

1950년대 초반에 오른발에 피부가 썩어 들어가는 회저병이 생겨 발가락 절단 수술을 받고 그와 함께 골수 이식 수술을 받다 세균에 감염돼 재수술을 받았다. 이렇게 계속되는 수술로 인해 프리다는 거의 죽음의 상태로 빠져 든다.


멕시코의 고대 찬란했던 아즈텍 문명의 아즈텍인들은 죽음을 더 큰 삶으로 나아가는 행복한 과정으로 생각해 죽음의 이미지를 유머러스한 작품으로 묘사하곤 했다. 그들의 풍습 중 명절 때 모든 가정에서 화려하고 우스꽝스럽게 재현된 죽음의 이미지로 집을 꾸미거나, 상점에는 해골 형상을 한 인형이 피아노를 치는 모습으로 꾸며지기도 한다.


1953년 더욱 악화되는 건강상태로 무릎 아래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다.

더 이상 그림을 그리기가 힘들었고 통증을 없애기 위해 복용한 약물 때문에 심한 우울증에 시달리며 자살 시도를 한다. 자신의 생일을 보낸 일주일 후인 7월 13일 47세의 나이로 합병증인 폐렴에 걸려 사망한다.


1958년 프리다 칼로의 집과 그림은 정부에 헌납해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조한다.

코요아칸에 있는 푸른 집에 가면 그녀가 누워서 말년을 보냈던 영원한 안식처인 침대가 보인다.

그녀에게 침대란 고통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피난처였고 모든 고통을 감내한 인고의 장소였을 것이다.


남성 중심의 초현실주의 미술 성향을 멕시코 문화와 복합적으로 수용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예술세계로 구축한 프리다 칼로의 일생에 그림은 '고통받는 자아와 이를 극복하려는 자아'인 그녀 자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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