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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상래 Aug 23. 2021

차곡차곡 모아두는 아이의 그림

호안미로 JoanMiro

나는 아이들의 그림을 좋아한다. 특히 우리 아이가 틈날 때마다 자신의 느낌대로 그리는 그림을 정말 좋아한다. 미술을 전공했지만, 미술학원에 보내지 않는 이유. 그림에 답이 있을까? 아이들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표현해야 한다. 나도 초등시절부터 고등학교 입시 미술까지 어린 시절은 늘 그림을 그리는 학생이었다. 학교 게시판엔 늘 내 그림이 걸려있었고 학교 대표로 많은 상을 받곤 했다. 그래서인지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미술과외를 받기도 했다. 그때가 초등 5학년 때로 기억한다. 미술 선생님과 국립현대미술관에 간 일은 내 평생의 좋은 추억? 다양한 길로의 가능성을 열어준 계기가 되었다. 그때가 내 인생에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좋은 수업이 아니었나 싶다.

Joan Miro, The Bird with a Calm Look Its Wings in Flames/1952


 

중학교 땐 미술반 활동으로 그림을 그렸던 일보다 생물 선생님의 논문지에 들어갈 인체 내부를 그렸던 일이 더 기억에 남는다. 선생님의 부탁으로 나 말고도 다른 미술반 친구들이 더 있었지 싶다. 고등학교 초반까진 서양화를 전공할 생각으로 수채화를 주로 했다. 그때 내가 그린 사과를 보고 학원 원장님은 “이런 그림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어. 입시 미술을 하려면 스타일을 바꿔야 해. 색감도 좋고 너무 창의적인데 입시 미술에선 이렇게 그리면 안 돼.” 그 때문만은 아니었지만 나는 다음 학년에 디자인으로 진로를 바꾸게 되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그린 사과 그림은 굉장히 독창적인 컬러로 물들어 있었다는 사실. 세잔의 그림은 누구나가 위대하다고 알고 있지만 난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다. 그때, 새로운 색감을 도화지에 입히곤 했던 내가 지금 생각해보면 세잔 같은 스타일이 아니었나 싶다. (어차피 원하는 대학에도 못 갔는데 원하는 그림이나 그릴걸.ㅋ) 디자인으로 전공을 바꾸고는 물감을 만드는 자체가 너무 재미있었다. 내가 칠한 사과처럼 다양한 색상이 선명하게 눈에 보이는 게 좋았다. 하지만 입시 미술은 어디까지 입시 미술. 그것이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고 예술가가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꼭 미대를 나와야지만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니다. 예술은 환경에 노출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적인 사고와 자유로움 속에서 더 큰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면 좋겠다.

 


우리 가족의 호안 미로 여권지갑

시대가 많이 변했고 요즘은 열린 시각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내게 마음에 드는 학원들도 많이 있다. 그런 학원들이 근방에 없는 게 아쉬울 뿐이다. 학교 앞 대부분 학원은 옛날 방식을 고수한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는 그림은 대회용 그림이다. 한 눈으로 봐도 선생님의 손길이 온 도화지에 가득 담긴, 절반 이상이 선생님의 솜씨인 그림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동 미술관계자들이 좋아하지 않을 줄로 안다. 나는 그렇다는 거다. 사람의 생각은 모두 다를 수 있으니까. 내 꿈 중에 하나엔 미술교육이 들어있다. 그게 가능할는지 아니면 마냥 허황된 꿈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만약 아이들과 미술을 하게 되면 난 좋은 친구가 되어주고 싶을 뿐이다. 어떻게 그려야 하는 답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어차피 손가락이 다섯 개인 것은 아는 사실이고 눈, 코, 입, 귀도 있다는 걸 알지 않나. 그런 부분에서 차이가 난다고 학습능력에 결부시킨다거나 지능과의 연관성을 내세우며 미술치료라는 타이틀을 거는 것 자체에 동의하고 싶지 않다. 한때 미술치료 관련 자격증과 아동 심리 미술 고급 과정을 들으며 돈을 내고 강의를 듣는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물론 자격증은 모두 취득했지만 써먹을 생각도 없고 그게 답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프랑스 학생시절 파리에서 구매한 호안 미로 책

아이의 그림엔 그때그때의 감정과 상황이 들어있다. 그것은 어떤 형태를 지니지 않아도 색감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 옛날 칸딘스키, 호안 미로, 파울 클레, 파블로 피카소 등의 대가들도 아이들의 순수한 그림을 따라 그리곤 했다. 그리고 작품으로 남겼다. 우리가 미술관에 가면 아이들 그림다운 작품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다. 열심히 틀에 박힌 그림을 배워 그걸 부수느라 더 많은 시간을 쏟게 되는 걸 보면 입시 미술의 필요성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아이의 그림은 감상할 만한 가치가 있는 걸까? 우리가 익히 명화라고 생각하는 대가들의 그림만큼의 가치. 200년 이전부터 아이들의 그림엔 위대한 가치가 있다고 믿어왔다. 그래서 1855년을 전후로 많은 예술가가 책을 쓰거나 작품을 만들고 아이들의 그림을 수집하기도 했다. 우리는 아이의 그림을 어떻게 보고 있을까? 아이가 3학년 때 같은 반 아이의 얘기에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그 아이의 그림은, 작품은 모두 버려진다는 거다. 그래서 학교 수업시간에 만들었던 작품들을 집에 가면서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다고 했다. 어차피 집에 가져가면 엄마가 버릴 게 뻔하니 아예 가져가지 않고 학교에서 나오는 길에 쓰레기통에 버리고 간다는 거다. 그래서 그 엄마는 아이가 학교에서 뭘 만들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소중한 아이의 생각들을 무참히 밟는 일. 충격적이었다. 나도 물론 아이의 그림이나 아이가 만든 어떤 소중한 작품들이 쌓여갈 때마다 이걸 어디에 두어야 하나. 더 큰 집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아이가 너무 소중하게 생각하고 모두 의미 있는 작품이라고 해서 허락되는 것들만 합의하고 정리를 한다. (거의 짊어지고 산다고 보는 게 맞을 것 같다) 그렇게 우리 집엔 아이의 많은 시간들이 차곡차곡 쌓이느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집이 되진 못한다. 미니멀리즘하고 심플한 집도 되지 못한다. 책장 앞, 티브이 아래, 아이 책상, 피아노 위에 모두 아이의 소중한 시간들이 놓여 있다. 아이는 그런 것들을 참 소중하게 생각하고 나는 그런 모습을 보는 일이 즐겁다. 자신의 어떤 생각도 인정받는 느낌. 어른과 함께 있어도 1인으로 존재하는 게 좋다.

 

한번은 아이 하굣길에  혼자만 작품을 들고 나와 궁금해 물으니, "엄마, 선생님한테 이거 뒤에다 전시하지 않고 가져가면 안되냐고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고 해서 가져왔어."하는 거다. 그래서 전시하면 친구들과 함께 보고 더 좋지 않느냐 했더니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전시 끝나면 돌려받지 못하고 없어지니까 난 집에 가지고 오고 싶었어. 내 작품은 소중하잖아"

실제로 많은 초등학교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작품 전시 후엔 쓰레기통에 버린다는 얘길 들었다. 선생님의 입장으론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다. 그 많은 아이들의 작품을 모두 둘 곳이 없으니. 코로나 시국엔 작품이 버려지는 일이 없어 어쩌면 다행일런지도 모르겠다.


이런 시국이 될 줄 몰랐을 땐 평생학습관 1층 전시실을 대여해 아이의 그림을 전시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일주일인가 한달 대관료가 10만 원 쯤 됐던 것 같다)그간 많은 작품이 쌓였고 아이에게 좋은 추억이 되겠다 싶었는데 코로나는 아이 추억 하나를 가져가 버린 셈이다. 나는 아이의 작품으로 대화를 많이 하는 편이다. 요새는 컬러 비즈를 그렇게나 만들어내고 있는데 이것도 작업량이 많아지면 좋은 작품이 될 거로 생각한다. 어떤 것도 작품이 될 수 있고 어떤 것도 괜찮다. 아이는 가끔 자기가 그림을 잘 못 그린다고 말한다. 내 눈엔 더 특별한 작품인데 친구들 그림을 보고는 영향을 받는 모양이다. 그럴 때마다 더 아낌없는 칭찬을 해주고 비슷한 그림을 그렸던 화가의 작품을 보여준다. 사람은 모두 같지 않다. 정형화된 그림만이 잘 그린 그림이 될 수는 없다. 생각이 담긴 그림을 그리는 아이, 자기 철학이 있는 아이로 성장하길 엄마는 바랄 뿐이다.


호안 미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다. (좋아하는 작가가 너무 많긴 하다) 중학교 때부터 그의 천진한 그림이 좋았다. 우리 아이도 자유롭게 자신의 세상을 원하는 색으로 칠해가며 자랄 수 있다면 좋겠다. 우리 부부가 더 애써줘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귀욤상 호안 미로 할아버지
단어들이 시를 완성해 가는 것처럼,
음표들이 음악을 완성해 가는 것처럼
저는 그림을 그릴 때 색깔을
그런 차원에서 사용하려고 노력합니다.
_호안 미로
주안 미로 이 페라(카탈루냐어: Joan Miró i Ferrà 주안 미로 이 페라. 1893년 4월 20일 ~ 1983년 12월 25일)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바르셀로나 출신의 화가, 조각가, 도예가이다. 바르셀로나 근처인 몬토로이크에서 출생하여 바르셀로나 미술 학교를 중퇴하고 1919년 파리로 나와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초기의 작품에는 사물에 대한 정밀한 형태적 감수성과 친밀감이 드는 서정적인 감동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1923년부터 바실리 칸딘스키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바뀌었다. 그의 작품은 밝고 가벼운 색채와 소박하며 단순한 형식으로 이루어져 신선한 정서가 풍긴다. 1928년에는 네덜란드를 여행하였고, 그 해에 미국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37년 파리 만국 박람회에 출품한 〈추수〉가 유명하다. 1947년 미국으로 건너가 신시내티 호텔 벽화, 하버드 대학 벽화를 그렸다. 1948년 귀국한 후로는 파리와 바르셀로나에서 제작 생활을 하였다. 1954년 베네치아 국제전에서 판화 부문 국제상을 받았다. 1983년 12월 25일 성탄절에 90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미로의 작품에는 초현실주의 특유한 어두운 느낌이나 심리묘사는 적고 밝은 소박성이 특질이며 모두를 순수한 상징 기호로 바꾸어 가는 매력이 있다.

스페인은 가우디와 호안 미로, 그리고 피카소가 있죠. 달리도 있고요.

_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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