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충분히 행복한 사람

블라디미르 볼레고프

by 김상래
블라디미르 볼레고프


‘빠져나가는 세월을 아쉬워하고 허무하게 생각할 게 아니라 주어진 삶을 순간순간 어떻게 쓰고 있느냐에 보다 관심을 가져야 한다.‘_스르로 행복하라.(법정)


도서관, 미술관, 마트, 요가학원, 가끔 친정 가는 일을 제하고는 내겐 특별한 동선이 없다. 마스크를 쓰고부터는 아주 가끔 있던 엄마들의 모임이랄 것도 전부 스케줄표에서 삭제해 버렸다. 열정적인 것으로만 보이는 나는 실상 많은 에너지를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에 적게 가진 에너지를 계획 세운 곳곳에 배분시켜 사용하지 않으면 금세 녹초가 되어버린다. 생활의 작은 것들이 삐걱거리면 이도 저도 아닌 상황이 되고 만다. 새벽에 일어나 글을 쓰고 아침 준비를 하고 아이를 챙기는 그 일들이 하루의 가장 중심이 된다. 단순하게 시작해서 특별할 것 없이 마무리되는 내 삶은 결코 소극적인 삶이 아니라 내가 선택해서 이끌어가는 나만의 삶의 방식이다. 그런 삶에 새로운 일들이 늘어 갈 때마다 어떻게 배분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이 인다.


느지막이 아침밥을 먹고 영화 이야기를 나누던 주말, 남편과 아이는 톰 홀랜드 주연의 ’ 언차티드‘를 보러 간다고 들떠 있었다. 두 남자와 극장만 가면 ’ 레드썬‘ 깊은 잠에 빠져 버리는 내게 그들은 더 이상 함께 영화를 보러 가자고 묻지 않는다. 나도 의례 편한 집 놔두고 극장 가서 돈 내고 자기엔 아까워 함께 따라나서질 않게 된 지 몇 년이 됐다. 아마도 아이가 마블 시리즈를 보게 되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현란한 CG로 도배가 된 영화를 보며 스르르 잠이 드는 나. 현실적인 영화, 그러니까 이해가 될만한 영화를 봐야 눈을 뜨고 생각을 하게 되는데 판타지물을 보게 되면 그렇게나 졸음이 쏟아진다. 그래도 왠지 하루 정도는 가족들과 나들이를 가고 싶어 극장까지 동행하기로 했다.


집 앞 극장을 두고 수원역에 있는 CGV를 간 것은 아마도 남편과 내가 바빴던 시간들을 여행처럼 느껴지게 할 기회라 여겨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봄이 되면 캠핑이라도 가게 될까 싶었는데 유림이가 들어온 이후로 어딘가 떠나는 일에 대해선 포기해버렸다. 주기적으로 콧바람이 필요한 내가 여행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을 인지하고도 유림이를 선택한 데는 아이의 간절한 바람이 가장 컸다. 게다가 난 비염까지 심한 사람이었는데 어찌하여 요새 눈물, 콧물이 쏟아지지 않는 것인지 그 점은 참 신기한 일이다. 내게 있어 가장 중요한 일은 가족이, 가정이 행복하게 살아가는 일이다. 내가 하는 어떤 것도 가정의 행복을 깨면서까지 진행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남편과 아이가 극장 앞 의자에 앉아 한참이나 영화에 대한 수다를 풀어내고 시간 맞춰 극장에 들어간 시각. 나는 몇 번이고 읽고 또 읽는, 그러니까 늘 곁에 두고 읽는 법정 스님의 책에 대한 서평을 써볼 참이었다. 분위기 있는 카페에 들어가 조용하게 앉아 책을 펼칠 셈이었는데 시끌벅적하고 팝콘 냄새가 진동하는 요란한 빛이 실내를 가득 메운 CGV 앞에서 슬쩍 넘긴 책장이 새삼스레 또 눈에 들어와 읽다 보니 2시간이 훌쩍 흘러 버렸던 거다.


“여보 어디야? 우리 영화 끝났어.”

“어? 벌써? 나 아직 거기에 그대로 있는데.”

“엥? 어디 들어가 있으라니까 왜 아직 거기에 있어?”

“아, 카페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네.”

“기다려 금방 갈게.”


황금색 바탕에 검은색 ’DREAM‘이라고 쓰여 있는 펜. 새벽마다 각진 펜의 불편함을 감수하고 모닝 페이지를 쓸 때 사용하는, 내 꿈을 이루어주는 펜으로 밑줄을 긋던 법정 스님의 책. 현란한 조명이 펼쳐진 극장 앞에 앉아 형광펜으로 또 다른 줄을 긋고 있던 나. 이동할 시간이 아까워 책을 보고 있던 건지 책을 보다 보니 이동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 것인지에 대해선 잘 모르겠다. 다만, 책 읽는 것 이외에 주변 것들이 불편하고 귀찮았을 뿐이다. 그저 한자리에 그토록 앉아 있던 내게 남편은 조금 미안한 듯했고 난 배가 고픈 것 빼고는 혼자 앉아 책 읽는 시간이 행복했다. 마치 봄날 어딘가 새로운 곳으로 여행을 떠났을 때의 그 기분이었달까. 집에서도 혼자 있는 시간은 충분히 있고 아이를 피아노 학원에 보내고서 갖는 한 시간의 커피타임도 있지만 모처럼 외출이라 그랬던 걸까. 사방이 시끌벅적한 극장 앞 딱딱하고 차가운 의자에 앉아 있는 일이 참 즐거웠다. 남편은 어쩌면 모를 수도 있는 나만의 해피 타임.


그 시간, 난 법정 스님의 책처럼 충분히 스스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그리곤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오랜만에 함께 나왔는데 떡볶이가 뭐냐고 했지만 뭔가 좀 소녀적이고 싶었달까. 그날은 왠지 그러고 싶은 날이었다. 우리가 처음 만나 분식집에서 먹었던 떡볶이의 맛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모처럼 나들이, 봄바람은 차가웠지만 분명한 건 봄이 오고 있다는 사실. 혼자서도 행복한데 가족이 함께 있어 더욱 행복했던 날.


이따금 바쁜 남편 대신 아이와 떡볶이를 먹으러 가곤 한다. 마치 봄날의 첫 연애 때처럼. 그렇게.





블라디미르 볼레고프

1957년 12월 19일


러시아 하바르포스크 출신, 현존하는 인기 작가입니다. 1800년대 아카데믹 화풍을 부활시켰다고 하는데요. 여성을 주로 모델로 하고 있고 작품들이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굉장히 여성적인 느낌이 들어요. 뭔가 그의 그림들을 보면 러시아 여성들은 모두 아름답고 묘한 매력을 지니고 있음직 하게 느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림들이 굉장히 따뜻한 빛을 품고 있어요.

봄날에서 여름까지만 그림을 그리는지...^^::


흠뻑 빠져 있는 독서는 마치 새로운 곳을 여행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제 그림은 꼬마 여자 아이의 그림으로 준비해 봤어요. 발 뒤꿈치를 세워 담 너머를 보고 있는 모습이 꼭 그날의 제 모습 같아서요. 눈앞에 푸른 바다, 따뜻한 햇살은 없었지만 책 속엔 그런 풍경이 있었거든요.


읽었던 책임에도 또 다른 느낌을 찾는 중이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었어요. 소녀 옆에 고양이 한 마리는 우연인지 나중에 보고야 알게 되었습니다. 우연은 어떤 동시성과 함께 온다죠. 봄이 오려나 봅니다.


시기가 시기인지라 러시아 그림 민감하게 받아들이지 않으셨음 합니다.

작품은 어디까지나 작품으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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