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 '아르장퇴유의 양귀비 들판' 1874
이어령 선생님의 마지막 수업을 읽고 있는데 200페이지 즈음에 주로 꾸시던 꿈 이야기가 나왔다. 세 가지의 꿈을 주로 꾸셨는데 6.25 전쟁이 나서 도망가는 꿈, 신발 잃어버린 꿈, 높은 마루에서 추락하는 꿈이었다고 한다. 그중에 반복해서 꾼 꿈은 신발을 잃어버리는 꿈으로 그 내용을 보면 선생님 심부름으로 시험지 채점을 하느라 교실에 남아 있다가 숙직 선생님이 오시면 밖으로 나왔는데 신발장에 자신의 신발이 없었다고 한다. 짝짝이 신발, 너덜너덜한 신발만 달랑 남아 있다는 내용이었다. 해는 지고 막막한데 맨발로 갈 수도 없는 상황에서 꿈에서 깨셨다는데 나는 그 대목에서 내 초등시절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수업 끝나고 상래는 남아. 선생님이랑 할 일이 있어.”
“네.(시무룩)”
초등 6학년 때의 기억이다. 그때 난 뭘 딱히 배워본 적도 없고 오랫동안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공부를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늘 친구들과 모여 교회 마당에 가서 놀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놀기 바빴다. 하지만 그림으로는 운동장 게시판에 큼지막하게 늘 내 그림이 걸려 있었고 다양한 미술대회에서 상을 받기도 했다. 그때는 그랬던 것 같다. 뭘 하나 잘하면 나머지가 좀 부수적으로 함께 따라오는 행운 같은 게 있었던 것 같다. 어떤 경쟁심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었는데 경쟁할 필요가 사실 없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6학년 때, 내 성적표엔 올 ’ 수‘가 찍혀 있었다. 그때까진 난 열심히 하지 않아도 뭐든 잘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 중학교 중반쯤 가니 공부를 안 하면 어떻게 되는지 확실히 알겠더라. 하하
초등 6학년 때, 시험이 끝나면 나는 의례 나이 지긋한 담임 선생님의 명령? 에 교실에 남아 반 친구들의 시험지를 채점하곤 했다. 그땐 시험이 끝나고 친구들과 함께 나가 놀 수 없는 마음에 왜 혼자 남아 시험지 채점을 해야 하나 싶어 억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늘 중립을 지키며 살고 있어 싫어도 싫은 내색을 잘 못하는 타입이다. 그래서 기왕 결정했으면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내게 도움이 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꾸는 편이다. 손해 보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한데 그걸 또 옆에서 답답해하는 사람이 있으니 눈치 봐가면서 긍정의 에너지로 바꿔간다. 싫다는 내색도 못하고 그저 선생님이 내어준 답안지를 보며 그날 치른 친구들의 시험지에 빨간색 색연필의 테두리를 벗겨가며, 동그라미를 그리고 틀린 표시를 하며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곤 했다.
시험을 치른 다음날이 되면 친한 친구들이 우르르 몰려와 누가 몇 점을 받았는지 누가 시험을 제일 잘 봤는지 묻곤 했다. 주로 함께 놀던(내 친구들은 학교에서 소문이 날 정도로 잘 놀았다. 하하) 친구들이 모두 상위권에 포진되어 있었다. 그래서 항상 친한 친구들끼리 엎치락뒤치락이라 딱히 놀랄 일도 없었다. 대학생 때였나(언제나 기억은 그저 가물거린다), 그때 함께 어울려 놀던 친구들 중 늘 진취적인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가 선생님과 자리를 만들어주어 모두가 선생님 댁에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우리가 초등학생이던 때도 나이가 지긋하셨는데 대학생이 되어 보니 동네 할아버지처럼 흰머리가 가득 얹어져 세월 앞에 누구도 비켜 갈 수 없음을 또 한 번 보게 되었다. 우리 모두를 기억하고 계셔서 반가웠고 특히, 그 당시 키가 상당히 큰 편이었던 내가(지금 키가 초등 키다) 시험지 채점을 했었다는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계셨다. 그제야 채점을 하던 시간에 내가 얼마나 친구들과 나가서 함께 뛰어놀고 싶었는지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만남, 선생님과의 만남을 늘 앞서 만들어주던 친구는 이제 세상에 없지만 그 친구 덕에 내 기억의 작은 저장고에 좋은 기억들이 남아 있을 수 있어 감사한 마음이 들곤 한다. 너무 일찍 빛나버린 내 어린 시절에 남아 있는 소중한 사람들, 순간들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마음먹고 앉아 있을 때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책을 읽다가, 어떤 가수의 노래를 듣다가 그렇게 문득문득 그 시절의 그리운 향기가 피어오르곤 한다.
출간을 앞두니 내 책에 담아낸 그 시절의 친구들이 더욱 그리워진다. 아무도 곁에 남아 있지 않아 더욱 그럴지도 모르겠다. 너무 일찍 가버린 친구들과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어 만나기 힘든 친구, 소식조차 끊긴 친구들이 그리운 날이 그렇게 이어령 선생님의 책을 읽으며 자꾸만 떠올라 마음이 아려온다. 나는 왜 어쩌다가 자꾸 죽음을 앞두고 있는 작가의 책을 읽게 되는가. 그들의 삶의 마지막 성찰에 나타난 어떤 것을 보는 걸까. 한바탕 신나게 살아가고 있는 내 인생 곁엔 늘 죽음을 앞둔 사람들의 책이 있다. 법정 스님, 박완서 작가님, 이제 이어령 선생님의 책도 곁에 살포시 올려둔다. 두고두고 마음이 어려울 때 새로운 밑줄을 그어야지 하면서.
메멘토 모리. 죽음을 기억하라.
클로드 모네Oscar-Claude Monet
1840년 11월 14일~1926년 12월 5일
아르장퇴유는 파리에서 8킬로 떨어진 곳이에요. 저도 파리 외곽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는데요. 그 당시 인상주의 화가들 역시 이곳에서 그림을 많이 그렸는데요. 1870년대를 '아르장퇴유의 시대'라고 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던 프랑스의 시기가 바로 1870년 1880년대인데요. 모네는 이곳에 정착하며 50점 이상의 폭발적인 그림을 그렸습니다. 아마 가족이 행복하게 살던 시절이라 그 모든 것들을 남기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의 아내 카미유와 아들 장을 모델로 그림을 그렸던 작품들이 모두 스무 점이 넘는다고 해요.
이 작품은 양귀비 밭으로 가서 스케치나 데생을 무시한 채 직접 보이는 대로 그린 것인데요. 아직 덜 완성된 듯한 희미한 양귀비 밭의 느낌이 제 인상에 남는 날입니다.
선명하게만 남아 있을 줄 알았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조각조각 흩어져 이제 겨우 남은 게 몇 안되는데 그걸 잊고 싶지 않아 기록하는 날이에요. 마치 모네가 고생만 하다가 병들어 죽은 그의 아내를 기억하던 찬란했던 날처럼 말이죠.
제 책에는 그런 뿌연 기억의 파편들 속에 그나마 남아 있는 부분을 떠올려가며 적은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들로 제 책이 나오게 될 줄은 몰랐죠. 친구들이 모두 곁에 있다면 함께 기뻐하고 축하해 줄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 조금은 서글픈 마음을 가져봅니다. 그때 친구들이 참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어 마음이 아리기도 하고요.
모네는 제가 정말 사랑하는 화가입니다. 모네 책만 파던 시절이 있었을 정도예요.^^;; 저희 집에도 모네의 아내였던 카미유와 장이 모델이 된 '파라솔을 든 여인'이 한 점 걸려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