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에우헤니오 멜렌데스 Luis Egidio Melendez
대학 때로 기억한다. 스티로폼 박스에 곱게 놓인 무화과 한 상자를 사 오셨던 게. 화려하지 않지만 투박한 듯 단아한, 마치 엄마의 가지런한 손길을 탄 과일처럼 보였다. 속으로 엄마 닮은 과일을 잘도 사 오셨구나 싶던 기억이 난다.
“상래야, 이거 한번 먹어봐. 부드럽게 씹히고 많이 달지도 않아서 정말 맛있다.”
“엄마, 이건 껍데기를 벗기고 먹는 거야?”
“아니야. 무화과는 잘 씻어서 껍데기까지 다 먹는 거야. 변비에도 좋고 뼈에도 좋고 만병통치약이야.”
“엄마 이거 뭐 이렇게 흐물흐물해. 맛이 이상해. 네 맛도 내 맛도 아닌데? 난 별로야.”
“이게 얼마나 몸에 좋은 건데, 약이라고 생각하고 먹어둬.”
“네네. 엄마 많이 드시고 건강해지세요.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새콤달콤 찝찔한 맛을 좋아하던 내게 밍밍한 무화과는 ‘이렇게 맛없는 걸 왜 비싼 돈을 주고 사 먹나 싶은 과일 중 하나였다.’ 한창 통통 튈 시기의 스무 살 내 입맛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랬던 것이, 추석 명절을 맞아 당뇨가 있으셔서 늘 약봉지를 챙기시는 어머님이 올라오신다니 대형 마트에 가서 터진 곳 없이 예쁘게 앉은 무화과를 고르며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저 지금 마트에 왔는데 엄마 과일 필요한 거 없어요? 차례 지내야 하니까 필요한 거 다 말해봐. 장 보고 엄마한테 들를 거니까 그때 가져다줄게요.”
“필요한 거 없어. 차례 지낼 건 미리 다 사뒀지. 마트 갔어?”
“음. 그럼 무화과는?”
“무화과도 벌써 사놓고 먹고 있지. 너 무화과 사지 마라. 엄마 집에서 가져다 먹어. 좋은 거로 샀어. 산적할 때 쓸 고기나 좀 사다 줄래? 좋은 거로 사 와야 하는데 딸이 돈이 어디 있어? 그냥 와.”
“아니야. 내가 한우 최고 등급으로 사 갈게. 장 보고 갈게요.”
명절이라고 봉투에 돈은 담았지만, 고깃덩어리를 들고 가는 일이 참 죄송스러웠다. 친정에 들러 오는 길은 늘 두 손이 모자라니까. 차례 지내는 데 쓸 거라고 가장 좋은 명품 딱지가 붙은 과일들을 사 두고는 상에 올릴 걸 빼놓고 몇 개씩 싸주는 엄마의 손길. 김치며 오이지무침, 열무김치도 내 취향에 맞춰 소량씩 담아 주며(우리 집엔 김치 냉장고가 없다. 평생 가도 살 생각이 없다.) 어머님 편히 있다 가시게 하라고 한 보따리 잔소리까지 얹어주는 엄마 모습에 또 괜한 심통이 올라왔다. 늘 챙겨만 오는 친정에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였다. 가장 돈을 많이 들인 딸이면서 세 딸 중 가장 형편이 넉넉지 못하니 다들 챙겨주느라 바쁜 그게 싫어서 또 뾰족하게 날이 서 집으로 돌아왔다.
신랑은 어머님 차 시간에 맞춰 터미널로 배웅을 나갔고 저녁에 친구네와 어머님 식사를 함께 차려야 해서 오랜만에 상차림을 준비하느라 나는 주방에 남았다. 어머님 속초에 사실 때 몇 번 놀러 왔던 친구네 가족이 어머님께 인사를 드린다고 함께 저녁 식사를 하던 시간, 반듯하게 네 등분한 무화과를 친구가 참 맛있어했다. 몇 년 전 위암으로 위 절반을 잘라낸 친구는 적은 음식을 먹고도 소화가 되지 않아 한참이나 쉬다가 다시 음식을 입에 가져가곤 했다. 그런 친구에게 무화과라도 입에 맞으니 다행이다 싶었다. 물론 어머님도 무화과를 잘 드셨다.
친구네와 어머님, 우리가 마주 앉아 식사하던 날 저녁,
“어머님, 평소에 무화과 사다 드세요. 너무 많이 드시면 좋진 않겠지만 이게 혈당 조절도 한대요. 포도처럼 당 높은 과일보다 무화과가 더 좋을 것 같아서 준비했어요. 드셔 보세요.”
“샤인 머스켓은 비싸기만 하고 난 그거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 돈만 비싸고. 무화과 가끔 사서 먹는데 이건 괜찮더라.”
“네 어머님, 무화과로 드세요. 딱딱하지 않아 씹기도 편하실 거예요.”
그렇게 내 손으로 직접 무화과를 산 건 이번이 태어나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무화과를 제대로 맛본 것도 어쩌면 이번이 처음 있는 일일 거다. 결혼 전 엄마가 이맘때쯤이면 열심히 사 오시던, 내겐 감흥이 없던 무화과. 그 맛을 마흔다섯이 되고야 알게 되었다. 한입 베어 물었을 때의 흐물거림은 여전했지만, 자극이 없는 그 맛이 지금 내게 딱이었다. 사과나 배처럼 달지 않고 씹히는 감도 없다. 사르르 녹는, 무자극의 맛이랄까?
조금만 짜도 예전보다 더 짜게 느껴지고 매운 것 역시 더 자극적으로 다가와 간을 심심하게 맞추다 보니 그 옛날 좋아하던 과자나 젤리, 사탕류는 정말 아웃 오브 안중이 되었다. 게다가 가을이면 도지는 비염 덕에 냄새를 맡는 일이 더 힘들어지고, 그러다 보니 입맛도 밍밍해져 버렸다. 마흔다섯은 무화과의 맛을 알게 되는 나이인가 보다.
가만가만 기억을, 생각을 더듬어 보면, 내 나이 스물이면 그때 우리 엄마가 지금의 내 나이와 꼭 맞는 마흔다섯이었구나. 엄마가 무화과를 열심히 사 오시던 초가을을 기억한다. 우리 엄마도 나처럼 밍밍한 맛에 들어서는 시기였을까? 일하며 아이들 키우고, 저녁이면 하루가 멀다 않고 손님을 모시고 왔던 아빠의 술상을 차리느라 빈혈을 달고 살았던 우리 엄마.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서야 엄마와 막걸리를 하며 알게 된 사실이었다. 빈혈로 쓰러지는 일도 있었던 그 시절에 우리 엄마는 잠을 실컷 자보는 게 소원이었다고 한다. 하루 4시간 이상을 자본 적이 없고 딸 셋의 도시락을 새벽마다 두 개씩 챙기느라 자기 몸 돌볼 겨를이 없었던 엄마. 그래서일까? 장남 대신이라는 타이틀이 생기면서 나는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겠노라고. 당당하게 내 일을 하며 제사나 손님 치를 일로 내 인생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굽어지는 허리를 갖지 않겠노라고 다짐을 하며 살았다.
신랑을 만나며 홀 어머님에 친척 신경 쓸 일이 없고 생전 가야 손님이라고 데리고 오는 법이 없는 얌전한 사람을 만난 게 그 때문인가 싶을 때도 있다. 그때 내 다짐 속, 엄마처럼 힘들게 살지 않을 거라는 신념처럼. 그럼에도 여자로 태어나 사는 일에 억울함이 들고 서글픔이 들었던 일이 많았다. 회사를 다닐 땐 그런 걸 더 못 참았다. 유한이 여섯 살, 인생 마지막 회사를 퇴사할 때는 울면서 회사에서 나오기도 했다.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 엄마는 그 세월을 어떻게 살았을까? ‘가슴에 응어리를 담아 두느라 병이 났던 거겠지’라고 머리로만 알고 여전히 결혼 이후 별다른 효도를 하고 있지 못하다. 내 인생 최대의 효도는 5월 8일 서른넷의 결혼이었으니까. 그리고 아들 못 낳아 쌓인 설움을 세 딸이 모두 아들을 낳음으로써 또 하나의 효도가 되었을 터.
그때나 지금이나 늘 내 꿈을 좇아 사는 개인주의자로 캐릭터를 잡고 살고 있다. 글을 쓰고 작가가 되는 길에, 효도라는 걸 해볼 수 있는 기회도 주어진다면 좋겠다. 그건 물질만을 의미하지는 않겠지만 직접 가꾸고 재배해 각종 채소나 과일을 얻는 두 분께 최고급 한우(물론 한우나 돼지고기보다 오리고기가 건강에 더 좋다고 말씀은 드리지만)를 마음껏 사드릴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허구한 날 단백질이 당긴다며 아빠한테 고기 좀 구워달랄 때만 방문하지 말고! 엄마가 좋아하고 나도 좋아진 무화과를 최고급으로 팍팍 쏠 수 있는 날이 머지않아 오기를. 웹디자인을 하면 지금도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김 빠지는 얘기는 이제 그만... 쉿!
루이스 에우헤니오 멜렌데스 Luis Egidio Melendez (빵, 석류, 무화과가 있는 정물)
1716-1780
멜렌데스는 스페인 출신의 화가로 18세기, 고야 이전 가장 뛰어난 정물화가로 유명합니다. 수많은 화가들처럼 살아 있을 땐 작품을 인정받지 못해 어려운 생활을 하다 생을 마감했다고 해요. 그가 죽은 후 극사실주의의 대가로 인정받았다고 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듭니다.
평범한 주제로 일상을 빛나게 했던 그의 그림을 보고 있자면 이렇게 그리기까지 얼마나 관찰을 했겠냐는 거예요. 살아 있는 사물을 보고 있는 것 같지 않나요? 그림 그리는 일처럼, 글 쓰는 일도 일상에서의 사소한 것에 대한 관찰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집요할 정도로 파고들어 가다 보면 일상의 것들이 신비로운 빛을 띠게 됩니다. 더 이상 시시한 일상이 아닌 거죠.
무화과를 먹다가 문득 제 스무 살의 엄마를 떠올리게 되고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 제 나이와 꼭 같은 나이인걸 알게 되면서 뭐랄까 같은 여자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되더라고요. 글을 쓰게 되면서 일상을 다른 시각으로 보게 되는 값진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극사실주의는 아니더라도 늦지 않게 그림도 그릴 예정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