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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 노마드 Apr 14. 2024

MBTI는 커녕 혈액형도 모르는 사회

엄마, T죠?

'콩'

딸이 침대에서 내려오다 어디에 살짝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한 시간째 재우려고 애쓰는 나와 안아달랬다가, 재밌는 얘기를 해달랬다가, 귀를 파달랬다가, 등을 긁어 달랬다가, 다리를 주물러 달라며 한 30 가지 정도의 주문 목록을 뽑아내는 딸과의 여느 때와 같은 밤이었다.


내일 아침 6시 50분에 버스를 타러 집을 나서려면 얼른 자야 하는데, 그녀는 밤 10시가 넘어도 잘 생각이 없어 보이는. 그냥 평소와 같은 그런 날이었다.


"엄마 내일 출근하는 날이잖아. 너무 늦었는데 얼른 자자." 이 얘기만 적어도 열 번은 한 거 같다. 슬슬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잠은 안 자고 자꾸 침대 밖으로 기어 나오는 딸에게 엄청 다정한 말을 해 줄 상황은 아니었다.

그래서 "안 부딪히게 조심해"라고 말했더니, 초등학교 1학년 우리 딸이 나한테 한 마디를 날렸다.


"엄마, 사실 T죠?"

내 말투가 너무 차갑다며 우리 딸이 나에게 한 말이었다.

"엄마는 F라고 몇 번 말하니..."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엄마는 T에요. 호~도 안 해주고."


이 얘기를 동네 지인에게 했더니, 막 웃으며 한다는 소리가. 한국엔 T와 관련된 욕설 표현이 있을 정도라는 거였다. 그러면서 "노마드님은 T 49에, F 51 아니었어요? 호호호" 하셨다.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이성적이며 솔루션부터 찾는다는 T와, 공감이 뛰어나다는 감정적인 F. 그저 상황에 따른 성격의 차이일 뿐인데 어느샌가 우리는 또다시 제2의 B형 남자를 양산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똑같은 얘기를 직장에서 하면, 1도 공감을 살 수 없다. 아마 MBTI가 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이다. 사실 캐나다 사람들은 자신의 혈액형도 모른다. 나도 캐나다에서 낳은 우리 애들 혈액형을 애들이 다 크고 나서 알게 되었다. 첫째는 한국 선생님이 운영하는 캐나다 과학교실에서, 둘째는 한국에 갔다가 피 뽑을 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내가 캐나다에서 16 Personalities 라 불리는 무료 성격 테스트를 하게 된 이유는 전 직장에서 했던 멘토링 프로그램 때문이었다. 멘토와 멘티의 성격 유형을 이해하고, 서로의 성향에 맞게 멘토링 세션을 기획하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했던 이 검사가 MBTI라는 이름을 달고 한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16가지 성격 유형

예전에도 한국에서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바로 혈액형이다. A형은 소심하고, B형은 바람둥이고, O형은 사람을 좋아하고 성격이 좋으며 AB형은 또라이라는 얘기. 오죽하면 B형 남자에 대한 영화까지 나왔을 정도로, 한 때 대한민국은 혈액형으로 사람을 구분 짓기 위해 들끓었다.


그때와 비슷하게, 요새는 사람을 만나면 가장 먼저 묻는 질문 중 하나가 MBTI라는 얘기를 들었다. 상대방의 성격을 미리 파악하면 쓸데없는 소모전을 줄일 수 있다는 이유라고 했던가. 적어도 나한테만 상처 주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에, 자기 방어로 이용하는 사람이 많다고 했던가. 사람을 4개의 박스로 나누던 것을 16개로 세분화시키게 돼서 더 공평해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상황에 따라, 상대방에 따라, 그날의 상태에 따라 쉽게 바뀔 수도 있는 성향이라는 것을 하나의 틀에 넣는 행위 자체에 열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캐나다 사람들은 이런 거에 큰 관심이 없다. 그나마 가끔 별자리 얘기가 나올 때는 있지만, 그것도 꽤나 드물다. 남의 옷차림에 크게 관심이 없고, 남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크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남의 시선을 아예 무시하고 사는 사람들은 없지만, 한국에 비해 남의 시선을 덜 신경 쓰도록 교육시키다 보니, 그 사람과 나의 성향을 맞추거나 이해해야겠다는 생각을 먼저 하기보다는 나만 멀쩡하게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고 생각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점심에 일하면서 혼자 밥 먹는 사람이 많은 것과 회식이 없는 문화도 이런 흐름의 연장선이 아닌가 싶다. 어떻게 보면 배려가 넘치고, 어떻게 보면 참 냉정한 사회다.


한국에선 술 한잔만 마시면 친구가 되지만, 캐나다에서 친구가 되려면 적어도 5년은 넘게 알고 지내야 한다는 얘기. 그 마저도 조금 까다로운 부탁을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어야 지인(acquaintance)의 레벨에서 친구로(friendship) 넘어갈 수 있다는 얘기를 참 많이 들었다. 뭐가 더 좋고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 그저 참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대방의 태도와 말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저 사람과 내가 안 맞을 걸 미리 알아서 피하기 위해. 그래서 대한민국은 MBTI에 열광하는 걸까? '넌 원래 그런 사람이니까'라고 단정 짓고 나면, 내 속은 편해지기 때문일까? 남을 미리 파악해서 피해야 할 만큼 상처가 더 넘쳐나는 사회가 되었나... 딸의 한 마디에 많은 생각이 드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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