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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나다 노마드 Apr 06. 2024

아동 학대가 밝힌 언어 습득의 비밀

영어는 어릴 때 배워야 한다는 믿음은 어디서 왔는가?

여기, 모든 것을 빼앗긴 아이가 있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숨죽이는 것뿐. 시끄럽게 굴면 아빠가 와서 자신을 때릴 테니까. 평생을 침대에 갇혀 사는 게 당연한 줄로만 알았던 이 소녀가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 것은 소녀의 집에 들렀던 한 사회 복지사 덕분이었다.


지니 와일리 (Genie Wiley). 13년 동안 집에만 갇혀 있던 한 미국인 소녀의 이야기다. 지니의 부모는 지니를 집에 가두고, 몸을 묶어 손 발만 겨우 움직일 수 있는 상태로 아이를 방치했다. 지니의 부모는 아이와 제대로 된 의사소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를 향해 으르렁 거리거나 위협하는 것뿐, 아이와 일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그렇게 만 13세에 발견된 지니는, 소리만 낼뿐 말을 하지 못했다.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상태였다. 지니의 재활을 위해서 각계각층에 있는 전문가 군단이 투입되었다. 그중에 언어학자도 있었다. 그리고 지니에게 영어를 가르치려던 그 언어학자의 노력은 놀라운 발견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니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영어 원어민이다. 부모가 영어를 쓰고 미국에 살며 본인도 미국에서 태어났다. 그러니까 지니의 영어는 재활을 통해 금방 자리를 잡았어야 했다. 그래, 금방은 아니더라도 가능해야 했다.


그러나 지니의 영어는 미국 어린이의 언어 숙련도를 결코 따라가지 못했다. 감금, 사회 격리, 언어의 부재에서 13년을 학대당한 아이의 언어는, 특히 영어의 문법구조를 제대로 습득하지 못했다. 왜일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이 학계에서 언어습득 가설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실험이었다면 윤리위원회에서 절대 허락받을 수 없는 연구 설정. 모국어 발달의 결정적 시기를 현실판으로 실험당했던 이 아동학대 사건을 계기로, "언어 습득의 결정적 시기 가설 (Critical Period Hypothesis)"이 엄청난 힘을 얻게 되었다.


이 가설이 말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언어의 습득에는 결정적인 시기가 있다. 이 시기를 놓치면 제대로 된 언어 발달은 불가능하다.' 지니의 케이스를 바탕으로 정해진 초창기 '결정적 시기'는 만 13세까지. 1967년 에릭 레너버그의 연구와 이 사건을 계기로 어린이 영어 교육 시장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13세 전에 제2외국어를 배워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그다음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전개였다. 언어의 모든 면이 같은 시기에 발달하는가. 더 어릴 때 배우면 더 효과가 좋은 게 무엇일까? 제2외국어의 발달과 모국어의 발달 방식은 같은가. 학자들은 학문적 호기심에 답하기 위해 연구를 했고, 그 연구는 뇌과학 분야의 발견들과 엮여 거대한 어린이 영어 사교육 시장을 낳게 된다.


그래서. 만 13세 즈음 영어를 배운 나 같은 사람들은 결국 영영 제2외국어를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린다는 소린가? 어릴 때 배우면 만사 오케이인가? 언어는 결국 생물학적으로 결정되는 것인가?


현재도 진행 중인 학계의 언어 전쟁이 발발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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